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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
로마서 8:18-25
제33회 파리 올림픽이 내일 12일에 대 장정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당초 금메달 5개를 목표로 했던 한국선수단은 벌써 금메달 13개로 현재 7위를 달리는 선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은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금메달을 따기 위해 엄청난 훈련을 하였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 훈련의 강도가 얼마나 센지 지옥훈련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선수들이 훈련에 매진하고 땀과 눈물을 흘리는 단 하나의 이유는 훈련 뒤에 오는 영광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메달을 목에 건다는 그 목표를 위해 그 영광을 위해 선수들은 그렇게 어려운 훈련도 감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고난도 훈련도 어려움도 능히 이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이와 똑같은 말씀을 합니다.
18절 말씀에서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다른 성경을 보면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조금 힘들고 어렵지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힘을 내자고 독려합니다.
당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는 고난이 힘들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게까지 신앙생활을 해야 하느냐고 항변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복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복은커녕 이런 고난을 당한다니 이게 웬 말이냐? 고 따지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을 참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격려합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냐? 고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미리 체험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요,
자신은 십 사년 전에 셋째하늘에 이끌려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셋째 하늘은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4절)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 중에 가장 큰 계시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는 계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계시를 보고 경험했던 사도 바울은 그 영광이 너무나 크고 화려하기에 그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주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그 영광에 비교해보면 현재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니 그것을 참고 인내하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때로 예수 믿는다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이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은 별 것 아닌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이고 가장 귀한 일이고 우리가 한 일중에서 가장 잘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보다 더 복되고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저는 이런 고백이 여러분들의 입을 통하여 여러 번 고백되어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에 갔을 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격적으로 고백되어질 때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때에는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큰 축복이었고 이렇게 잘 한 일이었고 이렇게 굉장한 일이었구나 하는 고백을 감격적으로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렇게 크고 놀라운 축복입니다.
교부 크리스톰은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겪었던 모든 고난을 다 모아도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에 단 1초에도 비교할 수 없다.”했습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강력하고 얼마나 풍성하고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크고 작은 고난을 경험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예수 믿는 자가 받는 영광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탄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자기는 못 들어가는 그 영광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 너무 속상해서 악한 사탄은 그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핍박하고 그래서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있다는 것은 영광이 있다는 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광이 있기에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참고 이기며 승리한 자에게만 영광이 주어집니다.
고난 때문에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자에게는 아무런 영광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기 위해 예비하신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참고 이기며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먼저, 현재의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18절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현재의 고난을 면하기 위해 미래의 영광을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미래의 영광을 위해 현재의 고난을 참고 기다릴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늘 직면하는 신앙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꼭 고난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현실 때문에 현실을 위하여 미래를 포기하고 미래를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현실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을 말하고 거짓된 삶을 살아갑니다.
현실의 고난을 피하기 위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하게 살아갑니다.
현실의 재미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마음껏 즐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현실의 편함을 위하여 힘쓰고 애써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쉽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위한 삶은 필연적으로 미래의 삶을 파괴합니다.
미래를 가난하게 하고 희망이 없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현재를 위해 미래의 영광을 포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미래의 영광을 위해 현재의 고난을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가스펠 투데이라는 교단 신문에 대구 대봉교회 원로목사였던 박00목사님의 이야기가 최신예화로 소개되었습니다. (현재는 고인)
이 목사님이 목회사역을 마친 후에 한 번은 꿈을 꾸셨답니다.
자기가 죽은 후에 천국에 가서 살게 되는 꿈이었는데 그 꿈에서 목사님은
그 천국에서 자신이 받을 상급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평생 목회를 하고 주님을 위해 일을 하고 총회장까지 했는데 막상 천국에서 상급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 너무 깜짝 놀란 것입니다.
아무리 꿈이지만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목사님은 ‘왜 그럴까?’ 고민하면서 스스로 판단을 내렸습니다.
‘내가 너무 대접만 받고 베풀지 못하고 현실을 위한 삶을 살고 미래를 위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후 목사님은 남은 삶을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삶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래의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현재를 위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난 때문에 미래의 영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난을 조금 덜 받기 위해 미래의 엄청난 영광을 버리는 잘못된 자가 되지 않습니다.
미래의 영광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2. 둘째로,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보이지 않는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 영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가 바라보는 소망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으니까 잘 바라보지 못하고 중간에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고 중단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보이지 않는 소망을 끝까지 붙잡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크게 잘못하는 것이 보이는 것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 목표를 두고 신앙생활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사실 보이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이것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 소망이 깨어지고 실망할 때가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게 살고 싶었던 소망이 생각지 못한 이곳저곳 탈이 나고 병이 들면서 그 소망이 참으로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쁘고 세련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소망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쓸데없는 소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보다 더 배우고 더 똑똑하고 더 지혜롭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소망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 똑같아 진다는 것을 알면서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인 줄 믿습니다.
보이는 소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 쓸데없는 것으로 끝나지만 보이지 않는 소망은 영원한 소망으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소망의 실체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실체가 있습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라는 말입니다.
보이는 것을 소망으로 생각하다가 실망하지 마시고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으로 간직하면서
진정한 소망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세처럼 애굽의 모든 보화와 공주의 아들이라고 칭함 받는 보이는 세상의 것에 너무 미련 갖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붙잡는 성도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셋째로,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25절 말씀에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으로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은 절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진실하신 분이시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는 장래에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잠시 잠깐 당하는 고난을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참고 장래의 영광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소망가운데 현재 잠시 잠깐 당하는 고통은 참고 견뎌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 약속을 분명하게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였던 요한 칼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조물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탄식하며 고통당해 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참고 견뎌왔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 땅에서 잠시 잠깐 당하는 고난을 참고 견디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이 서겠는가?”
그러면서 임종할 때 로마서 8장 18절의 말씀을 계속 암송했다고 합니다.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5번을 암송하고 마지막 16번째는 끝까지 암송하지 못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었던 사람입니다.
그 소망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갔던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영광도 비교가 되지 않고 이 세상의 고난도 비교가 될 수 없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어떤 것도 이길 수 있게 하고 어떤 것도 참을 수 있게 하고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소망하며 그 나라의 영광에 참여한 자가 최고로 성공한 자이고 최고로 지혜로운 자이고 최고로 행복한 자입니다.
그 나라와 영광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보이는 이 세상의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참음으로 기다리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고난을 이기고 영원한 나라의 주인공이 되시는 축복이 성도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024.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