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년 (박 성우)
미숫가루가 실컷 먹고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가도 몽땅 털어 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짧고 재미있는, 그러나 슬픔이 배어있는 시입니다.
저도 이 비슷한 사고를 쳐서 쥐뿔나게 혼이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의 안태 고향(본적)은 경남 서하이고, 제가 태어난 곳은 경남 진해라는 곳입니다.
서울과 묵호에서 조금 살다가 다시 진해로 내려가서 국민학교 3 & 4 학년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아버님이 군인이셨기 때문에 전학을 하도 많이 다녀서 (묵호, 진해, 포항, 광주, 전라도 광주,서울…) 생활 기
록부가 항상 너덜너덜 했었죠.
“장북(복?)산 푸르러 우뚝 솟아서…… (기억이 가물가물)…… 진해 만 푸른 바다 갈매기 날아 태평양 물결소리
들려오도다” 그때 다녔던 진해 도천 국민학교 교가가 대충이랬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제가 다녔던 학교들의 교가에는 꼭 무슨 산 & 강 이름이 하나씩 들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말 그대로 꽃피는 동네였었습니다. 군항제가 열리는 봄이되면서 시 전체가 혼통 벚꽃,
진달래, 철쭉으로 뒤덮혔고 통제부 안 밖에는 낙화로 인해 발목이 푹 잠기곤 했었죠.
매일 저녁 어머니께서 식사를 준비하시는 동안 동생을 등에 업고, 퇴근을 서두르는 자전거의 행렬이 장사진
을 이루는, 이순신 동상 로터리 앞을 “저기 저기 저 도령 글 읽는 도령 소리 소리 듣기 좋게 잘도 읊는다, 저기
저기 저 색시 어여뿐 색시 노닥 노닥 버선 한 짝 잘도 깁는다…” 노래를 부르며 슬슬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납니
다. 여름에는 평상에 앉아서 보리 & 찹쌀 미숫가루, 수박 화채들을 먹곤 했었는데 아버지께서 얼음 덩어리에
이불을 꾸메는 바늘을 대고 망치로 살살 두들기면 그 큰 얼음동어리가 툭툭 깨지는 것이 너무도 신기 했었습
니다. 퇴근 길에 백장미 빵집에서 콘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녹기 전에 딸내미들을 먹이기 위해서 땀을 뻘
뻘 흘리면서 부지런히 달려 오셨던 아버지, 온 식구가 대따 큰 전지가 달려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 앞에 둘러
앉아서 “한국남 박사의 재치 문답시간이 돌아왔습니다!”를 애청했던 기억도 나구요.
옆집 아저씨는 해군 함장이셨는데 한 번 해외에 나갔다 오면 커다란 RCA TV를 비롯하여 냉장고가 3-4대씩
집안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너무나 부러워서 “아버지는 옆집 아저씨와 계급이 똑 같은데
왜 우리 집에는 그런 것이 없냐고” 우리도 TV 사자고 막무가네로 떼를 썼던 것이 생각납니다.
처음으로 금성 TV를 산 날은 온 식구가 밤 12시 까지 TV앞에 둘러앉아서 애국가가 나올 때 까지 보았습
니다. 코 질질 흘리고 찌질이 못 생긴 심술꾸러기 원봉이, 사과를 먹을 때 씨 & 꼭지 어느 것 하나도 남기지
않고 통채로 와작와작 먹어 치워버리는 원봉이네 집에서 잠시 세를 살때의 이야기 입니다.
그 집 정원에는, 어렸을 때 기억으로, 무지무지 큰 무화가 나무가 두 그루 있었습니다. 여름이 지날 무렵이면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열매가 가득 열리곤 했었는데 어린 마음에 땅에 툭툭 떨어져 버리는 무화과가 무척 아
까웠습니다. 어느 날 원봉이 엄마와 우리 엄마가 마산으로 장을 보러 가신 틈을 타서 친구 은주(원봉이 누나
)와 커다란 다라이에 무화과를 하나 가득 따서 담고는 끙끙거리며 번갈아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무화과 사
이소!” “맛 좋은 무화과 사이소!” 온 동네가 떠 내려가라 소리를 지르면서 신나게 팔고 다녔습니다.
해질 녘 장에서 돌아오시는 어머니들과 딱 맞닥드려서 은주는 따귀가 아닌 엉덩이가 비오는 날 먼지나게 맞
았고 저는 “너 도대체 커서 뭐가될래?” “이따가 아버지 오시면 어디 두고보자”라는 어머니 말씀으로 인해 몇
일 동안을 공포 속에서 떨어야 했습니다. 차라리 은주엄마 처럼 속 시원하게 몇 대 왕창 때리시지…
몇 일 동안 아버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엄마가 다 말하셔서 벌써 알고 계실까? 아니면 아직 말
하지 않으셔서 모르고 계실까?” “아니 왜 도대체 아무런 말씀이 없으실까?” 생각하면서 초조하게 보내었던
하루하루는 어린아이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생고문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가 아무리 고자질을 하셔도 대수럽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대충 걸러서 통과
시켜 버리시고 어머니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면 한 번 몰아서 꾸중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꼭 무엇을 잘못
했는지 분명하게 말하게하셨고 충분히 변론을 할 시간도 주셨고 몇대을 맞아야 되겠는지 본인이 정하게
하셨습니다. 적게 부르면 왠지 혼날 것만 같아서 터무니 없이 많이 부르면 항상 씩 웃으시고 제가 부른 것
보다 훨씬 적게 회초리로 손바닥 & 박바닥을 때리셨었습니다.(치마 입었을때의 창피함을 면하게 해주셨음)
아버님은 다섯 딸들을 끔직히 사랑하셨습니다. 어디서 맛있는 것을 잡수시고 오시면 항상 손에는 그 음식이
들려있었고, 여의치 않을 때는 주말에 꼭 당신이 드셨던 식당에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가셨습니다.
옆집아저씨는 술만 잡수시면 잔뜩 취해서 동네가 떠 내려가라 대문을 쾅쾅 두들기곤 하셨는데…… 손에는
늘 큰 꾸러미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술자석에서 먹다 버린 생선뼈, 다 뜯고 버린
갈비뼈를 비롯하여 음식 찌꺼기 하나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분이 왜 그러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않음) 이 집은 자기네 집이라고 마당에 석필로 그리지도 못하게하고, 고무줄 놀이도 못하게 괴롭히고
심술을 부리는 원봉이가 하나도 부럽지않았습니다. 아버님은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배우고 생각나게 나게 하시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셨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부터는 부모님을 따라 다니지 않고 언니들과 서울에서 유학을 했는데….
먹어도 먹어도 무지무지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죠. 특히 전령아저씨가 우리들의 생활비,학비,용돈을 몽땅
가지고 도망(탈영)을 갔을 때는 한 달 내내 갈치조림, 갈치구이(그때 가장 쌌던 생선)만 먹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 아는 분이 찾아 오셔서 (일하는 언니를 포함해서 달랑 여자 4명 밖에 없는 집에 도대체 어떻
게 하라고?) 살아있는 큰 장닭을 두 마리를 선물로 주고가셨습니다. 부엌 바닥에서 모이를 먹으며 왔다 갔
다하는 벼슬이 유난히 붉고 큰 닭들이 그 당시 명동의 유명한 통닭집 (버드 나무집?) 앞에 기름을 똑똑 떨어
뜨리며 돌아가는 살이 통통한 전기구이 통닭들로 보였습니다. 매일 매일 큰 언니에게 닭이 먹고 싶다고 징징
거렸습니다. 어느날 말광량이 우리의 백말 띠 큰 언니께서 “은미야 정말 저 닭 꼭 먹고 싶니?” 마지막으로
결연히 물어 보고는 일하는 언니에게 가마솥에 물을 끓이라고 명령하고 식칼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부엌에서 두 언니의 비명소리가 마구 마구 흘러 나왔습니다. 머리를 어설프게 내리쳐서 닭이 부엌
바닥을 정신없이 싸돌아 다니는 바람에……
결론은 얼굴에 버짐이 허였게 핀 동생을 끔찍히 사랑한 언니 덕분에 닭 통집까지 남김없이 소금에 찍어서
아주 맛있게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올 추석에는 회사에서 복숭아, 배, 보름달 같이 대따 큰 수박을 주었습니다.
차에 하나 가득 싫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이 하늘의 둥근달 만큼이나 풍성하였습니다.
문득 “매일이 매일이 추석 한가위만 같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루하루 끼니가 참으로 어려웠던, 춘궁기라는 것이 있었던 우리나라, 명절이 되어야 그나마 힌 쌀밥에 고기
국을 구경할 수 있었다고 남편은 아이들에게 늘 말하곤합니다.
나눌 때에 행복은 배가 된다지요?
사장님이 그렇게 많은 과일을 혼자서 다 먹으라고 주신 것 같지 않아서 신학생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큰 아들
내외내 집에, 아랫층 동생집에, 가끔 2층을 3층으로 착각하고 초인종을 마구 눌러대도 전혀 화내지 않는 흑
인 아줌마 집에 한국의 추석을 설명하면서… 두루두루 골고루 나누어 먹었습니다.
모처럼 마음이 풍성하고 따뜻한 한가위를 보냈습니다.
달빛 기도 (이해인)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 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난 마음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 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가을밤 (정호승)
휘파람을 불며 불며 기러기들이
보름달을 향해 날아가더니
보름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때부터
보름달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가을 (조병화)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 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거
가을은 구름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묵은 사진첩을 (조병화)
묵은 사진첩을 들추고 있노라니
까닭 모르는 슬픔이
왈칵, 내 몸에 배어 옵니다.
기쁜 얼굴도 그렇고
웃고 있는 얼굴도 그렇고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얼굴도 그렇고
슬픈 얼굴은 더욱
슬프게 다가옵니다
기억 밖에 아주 묻혀 버린 얼굴들
기억 내에 아직 머물고 있는 얼굴들
어렴풋이 그때 그 시절, 생각나는 얼굴들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핑 돕니다
첫댓글 좋은글 재미있게 잘 보고 갑니다
날마다 행복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