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18
4월5일[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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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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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19RqvREnac
[서울대교구 신현범 베드로(석관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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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에 현존하시니 즉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주님 부재시 부재시 제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실 순간의 모습도 동시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후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제자단에 전해졌지만, 아직도 제자들은 긴가민가했습니다. 그저 누군가가 헛것을 봤겠지? 누군가가 만든 헛소문이겠지? 생각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제 새로운 왕국에서의 물 좋은 자리에 대한 희망도 사라져버렸으니, 앞으로 살아갈 길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마음 저변의 표현을 베드로 사도가 대표해서 던졌습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다른 제자들도 동조해서 함께 밤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그 날따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고기잡이라는 것이 참으로 희한하더군요. 잔뜩 챙겨서 낚시를 떠날 때는 얼굴에 화색이 만연합니다. 발걸음도 얼마나 가벼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허탕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운지? 돌아 나오는 길은 또 얼마나 멀고 가파른지? 꽝치고 호숫가로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우중충, 망연자실...
주님 부재시 우리들의 모습은 언제나 그러합니다. 인생의 가장 크고 중요한 의미가 사라져버렸으니, 우리네 삶에서 기대할 것이 그리 없습니다. 삶의 방향, 중심, 지주가 사라져버렸으니, 낙담과 절망, 무의미가 전부입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시니, 그 얼마나 충만하고 화사한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하셔서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에 현존하시니 즉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어둡고 음산하고 우중충했던 분위기는 즉시 밝고 화사한 분위기로 변화됩니다. 항상 목마르고 배고프고, 결핍 투성이였던 우리네 나날이었는데,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즉시 풍성하고 충만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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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ceLKNGjl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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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낳는 게 양식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통해 우리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신 분은 영광을 받아야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시기 위해 돌아가셨다가 부활해야 함도 인정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아도 눈이 가려 알아볼 수 없습니다.
누구나 예상하는 것만 보이는데, 눈에 보이는 부모의 얼굴에서 영광을 보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믿는 것은 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연결해서 오늘은 생명을 경시하고 자녀를 낳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은 사람들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만날 때도 자녀를 낳을 때입니다. 그제야 부모가 자신을 낳을 때의 바로 그 부모를 알아보게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보다 부모의 영광을 보는 더 완전한 방법은 나도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모는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어져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어집니다.
유튜브에 “‘동물과 감정 나눠요’… 심리 치유 효과 ‘주목’”이란 짧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학교 아이들에게 동물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갖게 했더니, 생명 존중감 8%, 인성 8.2%, 자아존중감 13.2% 상승했다는 결론입니다.
사람이 반려동물의 눈을 바라보면 출산과 수유 시 분비되는 어머니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동물을 사랑하며 어머니가 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어머니가 보이게 됩니다.
어머니가 보이면 어떻게 될까요? ‘자존감’이 상승합니다. ‘아,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아 존귀한 존재라는 느낌, 이것이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지면 다른 생명도 존중할 줄 알게 되고 인성도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엄마를 지독히 미워하는 여자 주인공이 엄마보다 더 심한 사형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그 사형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와 화해하려 합니다. 혼자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죽어가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어머니가 됩니다. 그때 어머니의 참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얼굴에 모반이 크게 있다고 어머니는 김희아 씨를 버렸습니다. 김희아 씨는 딸을 낳고 어머니를 보았다고 합니다. 딸의 모습에서 자기를 그렇게 바라보며 가슴 아파했을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는 가장 완전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인간을 하느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 수난 하실 수밖에 없으셨고 부활의 영광에 드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자녀를 잘 낳지 않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건 이런 마음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부활 체험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창조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에게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보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셔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생명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에게 보여주셔야 어차피 알아보지도 못하기에 당신을 감추십니다.
온라인 미디어 굿 타임스는 중국에서 사고를 당해 뒷다리를 잃은 한 어미 개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는 기차역 근처 거리를 떠돌다가 그만 사고로 뒷다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주민들은 강아지가 기찻길을 돌아다니다가 기차에 치여 뒷다리가 잘려 나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강아지는 뒷다리가 없어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서 기적과 같은 삶을 보여줬습니다. 살아난 강아지는 새끼들을 건강하게 출산해 어미 개가 되었고,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은 두 다리로 씩씩하게 살아갔습니다.
새끼들이 젖을 떼자 열심히 구걸해서 새끼들을 먹이며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미 개와 강아지들에게 또 한 번의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역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어미 개와 새끼들을 모두 입양하기로 한 것입니다.
강아지들의 울타리가 되어준 직원은 “어미 개는 엄청난 모성애를 보여줬다. 음식을 주면 절대 자신이 먼저 먹지 않고 새끼들을 먼저 먹이고 나서 남은 것만 먹었다.”라며 “사람보다 낫다.”라고 전했습니다.
왜 역무원은 그 유기견과 새끼들을 키우려 했을까요? 당연히 어미의 사랑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해하는 주인을 잘 따를 것도 알았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비를 가진 이에게 자비를 보이십니다.
이처럼 자녀를 낳을 줄 아는 사람은 생명에 대해 소중함과 창조의 이유를 볼 수 있기에 창조자 하느님을 알아볼 줄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처럼 하느님 자녀를 낳는 일을 하는 베드로를 부르셔서 함께 하느님 자녀를 상징하는 물고기를 드십니다.
자녀를 먹는다는 말이 웃기지만, 물고기 ‘153’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의 자녀들’이란 뜻이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선교하시고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를 낳는 일이 양식인 사람은 주님을 만납니다.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빛을 봅니다. 생명에 대한 자비를 가진 이들만 모든 생명의 창조자를 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첫 명령을 이렇게 내리신 것입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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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보 중에 ‘구약성서의 배열’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는 성서와 우리가 말하는 구약성서는 그 내용이 같습니다. 그런데 유대인과 교회는 성서의 배열이 다르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의 삼중 구조로 성서를 배열하였습니다. 율법서는 모세5경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 성조들의 이야기,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이야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알 수 있습니다. 율법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율법서는 신호등과 같습니다. 신호등을 잘 지키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듯이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잘 지키면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예언서는 하느님의 뜻과 멀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시련은 하느님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면서도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회개하면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회개하면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사자와 어린이가 뛰놀고,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한다고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문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시편이 있습니다. 삶의 지혜와 방향을 알려주는 지혜서와 잠언이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욥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삼중구조로 배열된 유대인들의 성서는 안정적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이런 배열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교회는 ‘율법서,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의 사중 구조로 배열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성서 배열이 안정적이라면 교회의 성서 배열은 열려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아직 메시아, 구세주가 오지 않았지만 교회는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서가 이야기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실현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놀며,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지내는 시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실현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언서가 말하는 모든 지향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의 구약성서 사본은 유대인들이 성서 배열과 같았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과 같은 성서 배열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꿈꾸었던 희망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이방인도, 유다인도, 세리도, 창녀도, 과부도, 어린이도 모두 같은 빵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마치 그 모습이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놀며,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두 가진 것을 팔아서 교회로 가져왔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만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초대 교회가 버린 것은 ‘소유’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원수마저 사랑하기 위해 그들은 ‘칼과 방패’를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비폭력 무저항은 시대의 부조리와 부정의에 맞서 선택한 약자들의 항쟁 수단과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불의와 폭력의 낡은 시대를 부수고 출현한 평화와 사랑의 새 시대를 사는 승자들의 전혀 다른 지배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의 길입니다. 예언자들의 희망을 현실의 삶에서 드러내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의 희망을 현실의 삶에서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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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1-14: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베드로와 토마스, 나타나엘,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는데,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3절) 하자 모두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러나 그들은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아침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못 잡았습니다.”(5절)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 제자들은 스승님을 뵙고, 그분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잔뜩 잡았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그분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7절). 그 말을 듣고 베드로는 그분께로 달려갔다. 다른 제자들이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8절).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9절). 제자들의 아침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물고기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다. 물고기가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물 밖으로 나와야 하며, 죽어야 하고 불에 구워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에게 구원의 원천이 되기 위하여, 당신의 신성을 버리시고, 물 밖으로 나오셨고 돌아가시고(십자가형) 영광을 받으셨고(성령의 불꽃)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제는 우리의 삶도 이러해야 한다. 나의 고집으로부터 나의 선입견에서 과감히 벗어나(물 밖으로 나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이 죽는 삶(죽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삶(성령의 불로 타오름)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삶이(“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되어야 한다.
고기가 물속에 있으면서는 음식이 될 수 없다. 밖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 자신 항상 나의 편견이나 아집에서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탈출하는 삶이 필요하다. 여기에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와 하느님 안에 기쁨이 있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10절) 다음으로 153마리는 물고기의 종류가 또한 그만큼 된다는 것으로 모든 종류를 포함한다는 의미이고, 고기가 그토록 많이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라는 그물은 아무리 많은 나라의 백성들이 들어와도 그 모두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그물을 베드로가 끌어올렸다는 것은 그의 역할로서, 백성들을 모아 사도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가리키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잔치를 벌이신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13절)
물에서 나와 인간의 음식이 되는 고기처럼, 하느님이신 아드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 구원의 빵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도 같은 삶으로 끊임없이 물 밖으로 나와 죽으며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그래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그분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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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엠마오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십니다. 제자들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놀라고, 의혹을 가집니다. 당연합니다. 예고를 하고 들어오셨어도 놀랐을 터인데, 대화 가운데 조용히 나타나시니 누구라도 놀랐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 당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다양한 감각(시각, 청각, 촉각, 미각)을 동원하시어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 만져 보아라. …… 말씀하시고 …… 보여 주셨다. …… 잡수셨다.” 무엇보다 손과 발을 보고 만져 보게 하심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분이 바로 이렇게 살아 계심을 확인시켜 주시는데, 이러한 확인을 통하여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연장선에 있는 사건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부활하신 모습이야말로 이 연계성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연계성은 그리스도교가 고백하는 케리그마(복음 선포)가 되어, 사도들이 선포하여야 할 내용의 핵심으로 정립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일의 증인이 된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제1독서)에서 준엄하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부활은 정신이나 영혼의 영역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이 보여 주듯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당신의 육신성을 우리에게 물리적으로 확인시켜 주십니다. 부활하셨어도 상처의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계신 것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연속성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상처는 가리거나 없애 버릴 필요가 없는 소중한 생명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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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3-6)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 쉰 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요한 21,11)
1)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자마자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이 아니라, 사십 일 동안 일종의 보충 교육을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사도 1,3)
2)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내릴 때까지(성령의 은사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사도들에게 지시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7-49)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이라는 말은 ‘성령’을 뜻하고,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은 ‘성령의 은사’를 뜻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주님의 도우심’이기도 합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성령의 은사가 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성령의 은사를 받을 준비를 했습니다.(사도 1,14)
3)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고기잡이 기적 이야기’의 전반부는 사도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기도 전에, 즉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들만의 힘으로 뭔가를 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상징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이 이야기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4)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졌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선교활동을 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대단히 많이 잡힌 일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하면, 또 성령께서 인도하신 대로 하면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잘 받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5) 이 이야기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의 이야기와 많이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루카 5,4-7)
두 이야기는 겉으로는 많이 비슷하지만, 뜻이 다릅니다. 루카복음의 이야기는 부르심을 받기 전, 즉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던 때의 일입니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말은,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는 인생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허무한 인생이라는 고백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 말씀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새 인생의 방향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두 이야기를 하나로 합해서 생각하면, 두 번째 기적 이야기를 ‘새로운 부르심’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의 마음으로(초심으로) 돌아가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6)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또 ‘믿음’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신앙인은,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예수님과 함께라면 못할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과 상관없이, 즉 예수님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라면, 세속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고, 언젠가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허무하게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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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와서 아침을 먹어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절망에 빠져 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빵’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 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요,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을 증거하고 부활 생명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상을 차려 올리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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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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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티베리아스 호숫가에 펼쳐진 정겹고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요한 21,4)
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언젠가 그분을 만났던 어느날(루카 5,5 참조)처럼,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해 빈 배인 그들 앞에 나타나 물으시지요.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 "못 잡았습니다."(요한 21,5)
과연 제자들은 못 잡았습니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습니다. 여전히 빈 배인 채로 있을 뿐입니다. 일생을 걸었던 스승을 잃고, 부활하신 그분을 몇 차례 뵙기는 했지만 이내 사라지셔서 딱히 무얼 어떻게 실행해야 할 지 막막합니다. 그래서 옛 터전으로 돌아와 그때 하던 일에 다시 손을 댑니다.
이상과 의미를 찾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려둔 채 떠났던(마르 1,16-20) 곳으로 되돌아와서 그때 버렸던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이미 잔뼈가 굵은 익숙한 일에 뛰어듭니다. '그래도 이건 자신있지' 하면서요. ... 하지만 여전히 빈 배입니다.
예수님의 조언과 순명, 그리고 만선의 놀라움과 기쁨... 이어지는 고백!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뭍에는 "숯불"이 있고 "물고기"가 있고 "빵"이 있습니다. 찬 새벽 공기, 피로에 젖고 물에 젖은 정들, 타오르는 불길, 생선이 익고 빵이 구워지는 냄새 그리고 스승의 환대와 나눔...얼마나 따사롭고 행복한 장면인지요.
숯불, 물고기, 빵 이 모든 것은 주님의 표상이거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물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 뭍에서 당신 자신을 준비하십니다. 당신을 먹이려고 차려 놓으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밤새 수고한 이들에게뿐만 아니라 새 날을 맞는 모든 이에게 아침 식사는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차려 주시고 또 함께 나누는 아침 식사 역시 앞으로 펼쳐질 새 삶을 준비하는 동시에 스승과 나누었던 최후의 만찬을 갱신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3)
젖을 물린 엄마가 아기에게 주는 건 단순히 젖만이 아니라 엄마 자신입니다. 고된 노동으로 밥을 벌어온 아빠에게는 아이 입에 들어가는 것이 곧 자신입니다. 그래서 흐믓하고 뿌듯합니다. 어떤 고통도 수고도 피로도 괜찮습니다. 내 땀과 눈물 피와 살이 자식의 입으로 들어가 생명이 되고 활기가 되고 행복이 된다면 지옥인들 마다할 리 없습니다. 자식이 곧 나니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도 주시고 물고기도 주십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주고 또 주셨다."라는 말로 들립니다. 이미 예수님의 생명은 제자들 존재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되고그들이 예수님이 되어갑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현존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에 누구도 그분이 누구신지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스승 예수님만이 그러실 수 있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요한 21,14)
신학적으로 3은 완전한 숫자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세 번째 발현은, 나중에 이어질 사랑 고백(요한 21,15-19 참조)까지 합하여 참으로 의미 깊고 완전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만남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다시 한 번 온전히 주셨기에 제자들은 부족하나마 또 다른 예수로 살아갈 영육의 양분을 얻은 겁니다. 이제 그들은 성령을 기다리며 몸과 마음을 준비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사도 4,7)
불구자를 치유하고 백성을 가르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가 유다의 권세가들, 종교지도자들 앞에 섰을 때 받은 질문입니다. 사실 질문 중에는 답을 잘 찾을 수 있도록 정곡을 찌르는 '좋은 질문'이 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 입장에서 꼭 듣고 싶은 질문이 아닐까 할 정도로, 고맙게도 그들의 이 물음이 딱 그렇습니다. 그 답을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본질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최상의 질문이니까요.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이 대답은 옛 베드로의 것이 아닙니다. 현재 베드로가 지닌 예수님의 이름이 주님의 일을 한 것이고, 베드로 안에 흐르는 예수님의 생명이 그 답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미 그가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이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벗님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그 일이 신나고 기쁜 일입니까? 아니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입니까?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보잘것 없어 보여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라 여기고 기쁘게 흔쾌히 일한다면 내가 상상치도 못하는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 주님의 일로 여기고,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오늘 어부가 한번 되어 보실래요? 물고기를 잡든, 사람을 낚든 만선의 기쁨을 안고 즐거워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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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주현 알베르토 신부님]
<“나를 따르라!”>
우리나라는 웰빙 바람이 불어서 난리들입니다. 그러면서 직장인들에게 아침을 꼭 챙겨서 먹으라는 방송매체들의 보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침을 먹어야 건강하다, 아니고 사람의 체질에 따라 다르니 먹어서 좋은 사람도 있고 안 먹어도 되는 사람도 있다, 등등 여러 가지 의견이 다양합니다.
그래도 아침에 따뜻한 밥 한 그릇 챙겨 먹으면 하루가 든든한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침을 챙겨 주시는 주방장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성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낙심하여 베드로 사도를 중심으로 티베리아 호수가에 살고 있었나 봅니다.
그들이 모시던 스승이 죽었으니 이제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본업이었던 어업에 종사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티베리아 호수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갈릴래아 호수 또는 건네사렛 호수라고 일컬어지는 같은 지명의 호수입니다.
이 호수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힘찬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만을 따랐는데 이제는 실의에 차고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힘없이 죽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베드로 사도를 주축으로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서서 티베리아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지만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밤새껏 이리 저리 던져보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마는 제자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말을 듣고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자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그것을 보고 사랑하는 제자는 주님이심을 알아보고 베드로는 겉옷만 걸치고주님께 헤엄쳐 옵니다. 주님을 알아보고 빨리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모습은 물론 그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불신앙에 쓰러지는 약점도 지녔지만 예수님께서 수위권을 맡긴 수제자임을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제자들은 분명 피로와 배고픔이 찾아 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수 구운 생선과 빵이라는 아침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오늘도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성찬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금 알려 주는 대목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손수 내 아침을 준비해서 먹기도 힘든데, 손수 아침까지 지어서 주시는 예수님의 수고와 정성을 받은 제자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하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 중 그 아무도 “누구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고 생각한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았던 갈릴래아 호수로 고기를 잡으러 갔었습니다. 하지만 부르심을 받았던 그 장소에서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알아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과정은 다양합니다만,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장소는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부르심을 받았던 바로 그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어쩌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아니 우리 모든 이들에게 “나를 따르라!”하고 부활의 체험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부르셨던 바로 그 부르심인 “나를 따르라!”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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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와서 아침을 먹어라.” (21,12)
주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결국 배신하고 그런 자신들에 대한 실망과 환멸 가운데, 베드로와 동료들은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사실 위기의 때에는 익숙한 고향과 일상으로 되돌아가서 초심을 되살리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간 베드로 일행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요20,3참조) 역설적으로 그런 낙담과 실망의 순간에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물가에 서 계셨지만, 아직도 자신들의 실망과 낙담 안에 갇혀 있는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에게.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21,5) 하고 그들이 한 일에 관심과 아울러 친밀감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들이 ‘못 잡았습니다.’라고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자, 예수님은 즉시 그들에게 문제 해결책을 지시하듯,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20,6)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거절의 말이나 거부의 몸짓 없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20,6) 이처럼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의탁할 때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일을 통해서 제자들은 뼈저리게 자신들의 무능과 약함을 통해서도 권능을 드러내시고 그런 자신들을 당신의 구원의 일꾼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특히 그 순간 뭍에 서 계시면서 그물을 던져라, 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아차린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제자가 이내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20,7)하고 상기해 주자 베드로는 주저함 없이 하느님 은총의 바다에 뛰어듭니다.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바다로 뛰어든 것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며, 그 뛰어듦을 통해 어제의 베드로는 죽고 오늘의 새로운 베드로로 다시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강권하고선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나아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14,25~33참조)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이랬던 베드로가 옷을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며, 그 믿음은 바로 하느님은 자비이시다, 는 체험에서 기인하였기에, 이는 바로 그 자비에 온전히 내어 맡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절정의 순간은 제자들의 배신과 배반 그리고 도망침을 묻지 않고 예전과 똑같이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와서 아침을 먹어라.” (21,12) 하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초대의 순간입니다. 이 말씀 곧 ‘와서 아침을 먹어라, 는 말씀은 자신들의 죄책감과 자기 환멸의 갇힘에서 풀어 주시고 용서하심을 통해, 떠나시기 전날 밤의 사랑과 섬김의 마지막 만찬의 기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아무도 “누구십니까?” (21,12)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 그 순간의 은혜로움을 묘사합니다. 용서와 사랑의 이 초대에는 우리 역시도 예외가 아니며, 우리 모두 이렇게 부활의 새 아침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사랑을 다시 확인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담대하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듯이 무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된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4,4참조)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이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4,7) 라고 추궁하지만 용감하게 증언합니다. 자신들의 하는 모든 일은 바로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4,10) 하고 당당히 밝힌 그 원동력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주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새롭게 거듭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연극이나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의 도입부와 후반부의 다른 색깔과 분위기를 보면 마치 한 편의 공연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세 번째 발현하신 예수님이 등장하기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름을 느낍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로 인한 밤과 아침, 어둠과 밝음, 낙담과 기쁨, 텅 빔과 충만을 다양한 색깔로 연출하고 특히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나눈 ‘대화 내용’은 그 상황에 맞는 긴장감과 함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낙담과 실망으로 가득한 삶의 어두운 순간, 돌연 부활의 아침 우리를 찾아오시어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는 당신 위로와 위안의 말씀이 저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저희 또한 당신과 아침을 먹고 새로운 길을 걷겠습니다. 늘 저희와 함께 동행하여 주십시오. 부활하신 주님! 그것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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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중학생 때 시험 보기 10일 전에 계획을 세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과 함께 늑장을 부리며 공부를 계획대로 하지 않았지요. 이제 시험을 3일 앞에 두고는 다시 계획을 세웁니다. 촉박하기는 하지만 이대로만 하면 충분히 좋은 성적을 맞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합니다. 친구들의 유혹과 이럴 때일수록 더 놀고만 싶은 것은 왜일까요? 결국 벼락치기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벼락치기 스타일이라며 합리화합니다.
결과는 당연히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것인데도 열심히 해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며 투덜거렸던 것 같습니다. 계획을 통해 결과에 쉽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획만 세우고 멈춰있다면 좋은 결과는 당연히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우리 신앙인도 계획은 가득합니다. 문제는 아직 시간이 많다면서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때를 모르면서도 계속 뒤로 미루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학창 시절의 시험처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그 시험에도 벼락치기가 가능할까요? 마지막 순간에 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이 역시도 평소에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획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바로 이 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예수님과 함께했던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부르심 받기 전의 생활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때는 계획이 있었지요.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의 양옆에 앉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도 했었고, 예수님께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망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그들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어부 출신이 많은 제자단이었지만,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하자,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랑의 실천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 역시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는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해야 하는 우리입니다. 그래야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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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다시 당신과 함께>
요한 21,1-14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다시 당신과 함께>
홀로인
밤을 지나
낯설 수 없는
당신이건만
왜 이리 낯선
당신과 함께
새벽을
맞습니다
너무나 아프고
너무나 힘들어
당신의 사람이
아니고자
당신 품에서
홀로의 세계로
한걸음 뒷걸음치던
당신의 사람에게
늘 그러하시듯
당신 몸소 오시니
어둠이 걷히고
새벽빛 밝아옵니다
홀로의 세계에서
당신 품으로
새로이 한걸음
애써 내딛으려
어둠을 걷고
새벽빛 품으니
여전히 살가우신
당신이 계시고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제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늘
저의 주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새로
당신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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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우리 앞길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밋밋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은 기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거듭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서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걸으신 십자가의 길은 고통스럽고 힘에 겨운 길이지만 부활을 통해 희망을 줍니다. 우리도 걸을 수 있다는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3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에수님과 지내면서 손 놓았던 일상으로 돌아간 고된 삶의 현장입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이제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야! 하는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할 수밖에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며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한 채 힘없이‘못잡았습니다.’했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았으니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이르셨고 이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덜컥 겁을 먹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사건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는 포기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가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 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주님의 말씀이 더욱 요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고기 몇 마리를 직접 요리하시고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 가운데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잃은 것이 더없이 큰 아픔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 믿음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여러 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누구십니까?” 하고 묻지 않습니다. 혹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을 거듭날 기회로 알고 기뻐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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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희망>
“그리스도 살아 계시다!(Christ is Alive!)”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금주 부활 팔일 축제중 날마다 부르는 복음 환호송이 마음을 파스카의 참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부활 대축일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사는 우리 믿는 이들이요 날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부를 시편 복음 환호송입니다. 어제 읽은 일화를 나눕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살다 간 수도자 사로포의 세라피노 성인에 관해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생고를 털어놓으려고 그를 수도원으로 찾아오면 그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거리까지 그들을 마중나오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합니다.
“기뻐하고 기뻐하여라. 그리스도께서 되 살아나셨다!”
성인의 입술에서 나오는 그 말마디가 얼마나 힘있었는지 그 말소리만 들어도 괴로움이 마음에서 싹 사라지고 희망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금주 부활 팔일 축제내 복음 선포전 함께 부르는 부속가도 참 흥겹습니다. 어제 부속가 후반부가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내 희망 그리스도 살아 계시니
그 제자들 앞에서 갈릴래아로 가시리라.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정녕 부활하심을 우리는 아노니,
승리자 임금이시여 우리를 불쌍이 여기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입니다. 희망의 힘,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희망도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우리의 희망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선택해 살 때 천국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믿음도 사랑도 살아납니다. 희망에서 기다림과 인내도 있고,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샘솟는 기쁨의 샘이 바로 희망이신 주님입니다. 그러니 희망보다 더 좋은 명약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을 상징하는 어둔 밤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일곱 제자들의 상황을 반영하는 수제자 베드로와 동료들과의 대화로 시작되는 오늘 복음입니다.
“나는 고기 잡으로 가네.”
“우리도 함께 가겠소.”
참 쓸쓸한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상징들로 가득한 참 아름다운 살아 있는 그림같은 장면입니다. 때는 밤이었고,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의 마음은 참 춥고 삭막하고 밤처럼 어둠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저절로 입에서는 다음 시편 127장 고백이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제자들은 위 시편과 더불어,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ㄷ) 말씀도 연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배경에는 다음 묘사에서 보다시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물끄러미 제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셨습니다. 희망의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의 동녘하늘!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또 아름다운 장면인지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절망은 없습니다. 절망의 그 현장 우리 뒷 편에서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태양처럼 서 계신, 마침내 절망의 어둔 현장에 희망의 빛처럼 개입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보다 우리 내면의 사정을 잘 아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제자들은 그물을 던졌고,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텅빈 허무는 텅빈 충만의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광석화, 그 순간 주님께서 사랑하신 애제자가 주님을 즉각 알아보며 고백합니다.
“주님이십니다.”
사랑할 때 보이고 압니다. 사랑의 영안이 활짝 열린 애제자의 고백에 베드로의 반응 역시 수제자답습니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 듭니다.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주님의 출현에 혼비백산, 반응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의 모습이 흡사 활동가와 관상가의 조화로운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익명의 애제자가 상징하는바 교회공동체내의 숨겨진, 교회의 심장같은 사랑의 관상가들입니다. 주님과 깊은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의 숨겨진 보물, 애제자 관상가들이 있어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 공동체가 됩니다. 활동가 수제자 베드로만 있어서도 안되고, 이런 애제자들은 교회 공동체마다 꼭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랑의 관상가, 애제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저는 교회 공동체 곳곳에 숨겨진 이런 보물같은 주님의 애제자같은 분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주님은 모두를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고,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같은 현실은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 안에 머물 때 견고한 일치의 교회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밤의 허무의 어둠은 사라지고 희망과 기쁨,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이 펼쳐집니다.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으로 바뀝니다. 저절로 터져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흡사 아침 미사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 말씀처럼 들립니다. 바로 이런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 선교열정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명설교가 된 베드로는 옛 베드로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열화와 같은 베드로의 설교가 이를 입증합니다. 수제자 베드로의 감동적인 설교 일부를 그대로 나눕니다.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설교인지요!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할 때 날마다 축제의 삶입니다. 오늘 4월5일과 내일 6일은 총선 사전투표날이고, 4월10일은 총선 투표날입니다. 나라의 명운이 달린 선거입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중인 나라의 독립운동이요, 참으로 역사의식, 민족의식, 공동체 의식, 시대정신과 좋은 전통을 지닌, 나라와 국민을 참으로 사랑하는 당과 사람들을 잘 분별하여 대표를 뽑아야 할 것입니다. 정당이나 사람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살아온대로 삽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말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당이요 사람들이었는지 잘 살펴보고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 모두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참 좋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집짓은 이들이 내버린 돌같은 예수님을, 우리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모퉁이의 머릿돌 답게 주님 주시는 분별의 지혜 은총으로 투표를 잘하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세육창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느님 만세!
부활하신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모두 만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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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자가 들어가는 것은 다 빼야>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이 질문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 지도자들이, 곧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주님을 죽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힘으로 불구자를 살린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오늘은 제게 하는 질문으로 다가왔습니다. 제자들에게 질문한 이들이 오늘은 내게 한 질문으로. 그래서 질문을 받고 자문합니다. 나는 무슨 힘으로 또 누구의 이름으로 일할까?
저의 경우 요즘 확실히 주님의 힘으로 일합니다. 이것이 젊을 때보다 나은 점이고 편한 점입니다. 요즘은 확실히 저의 힘을 뺐습니다. 뭣을 하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일도 술술 잘되고, 일하며 그렇게 고민하거나 스트레스받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해주시는 체험을 소소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식당에서 비지찌개를 메뉴로 추가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저 마음만 먹었는데도 그날 누가 묵은지를 한 열통 보내주시는 겁니다.
이런 식의 작은 하느님 체험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가 힘을 뺀 것은 오늘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밤새 고기잡이했지만, 허탕을 친 것처럼 저도 과거 제힘으로 했을 때 실패했던 많은 경험 때문에 제가 힘을 뺀 것이기도 하고 나이 먹어 힘이 빠져 저절로 그리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내 힘이 빠지고 하느님의 힘으로 하니 성과도 좋고 힘도 안 들어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얘기를 제가 한다는 겁니다.
그제도 회의를 위해 형제들과 함께 산청을 다녀오는 길에 제가 자연스럽게 나는 요즘 하느님을 만나는 작은 체험을 자주 한다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해주시는 것이라는 점을 사심 없이 증거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은근히 자랑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대놓고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대놓고 자랑하지 않고 은근히 자랑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됩니까? 하느님의 힘으로 해놓고 내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힘도 빼고 이름도 빼야 합니다. ‘내’자가 들어가는 것은 다 빼야 합니다. 내 힘도 빼고 내 이름도 빼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히 주님의 힘으로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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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21,6)
<순종의 결과!>
오늘 복음(요한21,1-14)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는 말씀'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있은 후, 제자들은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일곱 제자들, 곧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그들은 밤에 배를 타고 티베리아 호숫가로 나가 고기를 잡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그물에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했고, 그런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여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의 삶의 자리인 '갈릴래아'로 가셔서 그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순종의 결과는 대박'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매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바로 매일 들려오는 '복음'입니다. '복음에 순종하면 대박'납니다. 그 대박은 바로 '영과 육이 함께 살아나는 대박'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오늘도 복음에 순종합시다! 그래서 오늘도 대박을 이루어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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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CufxU84vzZ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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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요한 21, 5)
예수님을 통해
열리는
따뜻한
행복입니다.
수 많은 행복이
널려 있고
깔려 있지만
행복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안간힘을 써도
우리 힘으로는
잡을 수 없는
살아있는
행복입니다.
살아있는
행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모든 순간이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행복입니다.
아무 것도
못 잡은
어리석은 시간도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는 순명의 시간도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는 감사의 시간도
따뜻한 빵과 생선을
나누는 이 모든 시간이
행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들어놓은
길 위에
행복이 있습니다.
부활의 아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 사랑을
닮은 아침식사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아침은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에게
옵니다.
아픔과 실망을
밀어낸
그 자리에
아침상이
차려집니다.
부활의 현주소는
그래서 언제나
아침상이 차려지는
우리들 마음의
현주소입니다.
사랑을 받아 먹으면서
사랑을 배워나갑니다.
부활도 사랑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차려지는
삶의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다시 배우는
사랑의 아침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말씀하시는 행복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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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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