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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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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사는 이야기 스크랩 처용의 노래, 화해의 음악 / 처용무, 분노 대신 풍류와 해학으로 우뚝 서다
삽달마 추천 2 조회 99 15.07.09 13:1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

 

 

 

처용의 노래, 화해의 음악

 

깊은 밤 신라의 곡조
옛 악보에 전해지는 소리.
술잔 멈추고 함께 듣자니
기상은 그 때를 연상케 하는데
지는 달은 성곽 머리에 가까워지고
새록새록 이는 회포 견디기 어렵구나.

 

<11월 17일 밤 신라 처용가를 들으니 성조가 비장하여 느끼는 바가 있어서>라는 시의 일절이다.

고려 말 학자 이숭인이 썼다.

그는 팔관회에서 공연된 처용의 춤과 노래를 밤늦도록 보고 들었고, 그 때의 감상을 시로 형상화했다 .

 

고려의 이숭인이 들었고, 조선 시대에도 구나(驅儺) 의례에서 불렸던 <처용가>의 기원은, 이숭인이 노래했듯이 신라에 있다.『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 따르면 신라 49대 헌강왕 때(875~886)의 이상야릇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헌강왕은 개운포, 그러니까 지금의 울산 지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구름과 안개에 휩싸여 길을 잃는다. 일관이 동해용의 짓이라고 해석하자 왕은 용을 위해 절을 지어주도록 명한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구름과 안개가 사라졌고, 곧이어 용이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왕의 덕을 찬양하면서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한다.

 

이 설화적 사건의 함의에 대해서는 무수한 해석이 베풀어져 있지만 음악의 상징성에 초점을 맞춰보면 숨은 뜻이 분명해진다. 서라벌로 돌아가는 헌강왕의 길을 지운 안개와 구름은 모종의 갈등을 암시한다. 그것은 서라벌의 왕권과 개운포의 지방세력 사이의 정치적 갈등일 수도 있고, 화랑도와 불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일 수도 있다. 갈등의 성격이 무엇이든 헌강왕은 망해사 혹은 신방사라는 절 짓기를 통해 갈등의 해소를 꾀했고, 동해용가(東海龍家)의 춤과 음악은 해소의 퍼포먼스였다. 용 패밀리의 음악과 춤이 화해의 표현이었으리라는 추론은 이어지는 기사에서 더 분명해진다.

 

동해용은 일곱 아들 가운데 하나, 곧 처용을 왕에게 바친다. 정치를 도우라고.
그런데 서라벌에 와서도 처용의 마음은 개운포로 향했던지 왕은 그의 마음을 잡으려고 미녀를 아내로 준다. 급간이라는 벼슬도 내린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이 탈이었다. 처용 처의 미모를 귀신도 사모했으니까.

처용이 집을 비운 사이 역신(疫神)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아내와 동침했고, 이 참담한 장면을 귀가한 처용은 목도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저 유명한 신라 향가 <처용가>가 흘러나온다.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었건만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 兮隱吾下於叱古

二 兮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처용은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다가 물러난다.

아내의 불륜, 여전히 <사랑과 전쟁>의 단골 소재지만 결말은 전혀 다르다. 실로 돌진하여 두 연놈을 요절내는 결말이 아니라 둘의 동침을 인정하고 물러나는 결말이다. 게다가 춤과 노래까지 동반한 후퇴.

 

이 <처용가>의 기원 설화에도 갈등이 있다. 달밤에 혼자 놀러 나갔으니 처용과 아내 사이의 부부 갈등일 수도 있고, 아내를 범한 역신과 처용 사이의 애정 갈등일 수도 있고, 마마라는 질병을 초래는 귀신과 신라 민속사회 사이의 문화적 갈등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갈등이든지 간에 처용은 힘으로 타자를 굴복시키지 않는다.

타자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한다. 헌강왕이 절을 지어 갈등을 해소했듯이 처용은 춤과 노래로 갈등을 해소한다.

 

 “본디 내 것이었지만 /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라는 결구는, 따라서 체념이 아니라 포용을 통한 갈등의 승화이다. 이런 해석의 유효성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즉시 확인된다.

 

 

역신은 제 본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한다.

 

“제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지금 범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공이 화를 내지 않으시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깁니다. 맹세컨대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아내의 간통 현상을 목격하면 화를 내는 것이 ‘남지상정(男之常情)’이다.

처용은 화를 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공불견노(公不見怒)”, 곧 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역신은 바로 ‘화를 드러내지 않는 그 모습’에 감동한 것이다.

 

화를 드러내지 않고 화를 승화시키기 위해 처용이 선택한 것이 악무(樂舞)였고, 음악은 신라의 유행가, 곧 향가였다. 일연은 「월명사도솔가」에서 신라인들이 일찍부터 숭상한 향가가 천지귀신(天地鬼神)을 감동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썼다.

 

월명사의 <도솔가>는 하늘에 해가 둘이 떠오른 괴변을 해결했고, 월명사의 피리 소리는 달의 운행도 멈추게 했으니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일연은 노래와 음악의 권능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권능은 천지귀신을 힘으로 위협하고 억누르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다. 권능은, 노래가 천지귀신과의 화해,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의 화해를 담고 있기 때문에 발휘되는 것이다.

 

헌강왕의 시대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11월의 밤, 이숭인은 <처용가>를 들었다. 그러나 저 화해의 곡조를 듣는 이숭인의 심사는 편치 않았다. 지는 달을 보며 그는 회포를 견디기 어려워한다.

새벽녘 지는 달에서 고려의 운명을 읽었기 때문일까? 화해의 곡조에서 화해와는 다른 길을 간 헌강왕 시대와 그 뒤로 이어지는 신라의 만가(輓歌)를 들었기 때문일까?

 

이숭인의 회포를 거울처럼 들여다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노래가 화해를 노래해도 심사가 어지러우면 화해가 깨어진다는 사실은 거울에 비췬 듯 선명하다. 이숭인의 회포가 어제 일 같지 않은 가을의 문턱이다.

 

 

 

 

 

 

 기사경회첩 본소사연도 [ 耆社慶會帖 本所賜宴圖 ] .1744년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조가 51세가 되는 해인 1744년 9월 기로소(耆老所)의 입사를 기념하여 제작한 것으로 그림과 함께 행례(行禮)와 의절(儀節)을 기록한 것이다. 본소사연도에서는 행렬을 지어온 이들이 기로소에서 가연을 즐기고 있다.

 

 

처용무, 분노 대신 풍류와 해학으로 우뚝 서다

 

분노 대신 풍류와 해학으로 우뚝 서다

 

처용무의 모티브에 관한 기록은『삼국유사』의「처용랑·망해사」조에서 찾을 수 있다. 헌강왕이 개운포(학성의 서남, 현 울주)에 행차하였을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길을 잃어버렸다.

이상하게 여겨 주변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천문을 담당한 관리가 말하기를 “이것은 동해 용왕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은 명하여 근처에 절을 지어주도록 하였는데, 이에 감동한 용왕은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고, 그 아들 중 한명이 왕을 따라 서울(도읍지 금성, 현 경주)로 입성하였다. 왕은 그에게 ‘처용’이란 이름을 지어주었고, 또한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아주었다.

 

이 내용을 보면 처용가는 아름다운 부인과 역신, 그리고 처용의 삼각관계에서 비롯된 매우 직설적인 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학계에서 이 처용가를 풍월계 향가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태준에 의하면 처용설화는 풍월도에 바탕을 둔 각종 신들의 춤이 중요한 매개체로서, 처용은 춤과 노래로 역신뿐만이 아니라 신령과 교제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시하였다고 한다.1)

 

1) 김태준, 화랑과 풍류정신화랑문화의 신연구, 한국향토사연구 전국협의회, 1996, 256쪽.

 

평양감사환영도 부벽루연회도 [平壤監司歡迎圖 浮碧樓宴會圖] 이 그림에는 조선후기 궁중정재()의 하나로 공연된 처용무 장면이 나타난다.

 

 

처용은 분노 대신 풍류와 해학으로 역신을 물리치고, 천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처용무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처용의 상징성이 단순한 열병熱病을 치유하는 신앙으로부터 구나驅儺행사 속의 벽사진경僻邪進慶의 의미를 띤 형태로도 정립된 것이다.

 

 

제2회 한국 명작무 대제전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 김중섭이 처용무를 펼치고 있다.

 

 

용맹스러운 남성상, 신라의 화랑花郞처용

 

고매한 인격의 처용은 과연 어떠한 이미지를 소유한 인물이었을까? 바꾸어 말하면 신라인들은 처용에게 어떠한 이미지를 요구한 것일까? 처용을 ‘처용랑處容郞’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신라인들이 사랑하고 동경한 화랑, 다시 말해 용맹스러운 남성상의 표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이다. 고대 사회에서 용왕은 전통적인 수신水神과 도교의 용신龍神 신앙이 더해져 만들어진 국가의 수호신으로서 매우 강력한 신격을 발휘한다

 

더불어 『삼국유사』에도 나타나는 「처용랑·망해사」조가 신라의 망국 설화와 관련 있다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한 경계 내용이 설화 속에 담겨있다는 점, 처용이 동해용왕의 아들로 설정되어 있는 점 등은 당시의 호국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화랑은 신라인들이 나라를 위해 만들어 놓은 호국 집단이다. 호국 집단 화랑에 속한 개개인은 당당하고 용맹스러울 뿐만 아니라 선인들처럼 풍류 또한 즐긴다. 풍류를 알고 당당하면서도 유연하게 역신을 물리치는 처용, 당시의 신라인들이 동경하던 화랑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천년의 세월이 깃든 한국의 미감

 

통일신라의 헌강왕 대에 시작된 처용무는 1인 처용무로 벽사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였다. 그러던 것이 고려에 들어서는 2인 쌍처용무로 나례에서 연행되었으며, 조선 세종 대에 가사를 개작改作하여 정식 궁중정재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 초기, 벽사의 의미를 지닌 오방처용무로 이어지게 되는데, 음양오행설의 영향을 받은 처용무복의 오방색五方色과 무원의 위치 그리고 무원들의 동선動線 변화는 잡귀를 막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성종 대에 이르러 처용무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당시 처용무의 연행모습을 대략 살펴보면, 두 마리의 학鶴이 무대에 오른 후, 오방처용이 등장하며, 이후 연화대로 연결되어 학연화대처용무합설로 진행된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단순히 3개의 정재를 합쳐 놓은 것이라기보다는 ‘발단-전개-절정-결말’의 구조를 갖추어 놓은 것인데, 특히 ‘처용가무’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은 구나의 기능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후기로 들어서면 처용무는 학무와 연화대무로부터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연희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구나驅儺적 불교적 성격이 강한 처용무가 조선후기 정재사적 흐름 속 향유층의 미감에서 점점 멀어졌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처용무가 주는 교훈, 앞으로 천년

 

처용무는 한국 궁중정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근대 초기 국가 악무 기관의 실질적 해체 등 급박한 사회 변화 속에서도 그 정체성을 꿋꿋하게 지켜온 한국 궁중정재의 표상이다.

 

그러나 처용무는 결코 불필요한 고집으로 일관하지 않았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처용무만의 고유성은 유지하되 나머지 것들은 과감히 그 시대와 사상에 맞추어 변모를 계속하였다. 즉, 처용무는 당대 사람들의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의해 계속해서 재평가되며 변천과 발전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처용무를 통해 볼 때, 한국의 전통은 일방적 아집이 아닌, 당대의 가치판단을 기초로 새롭게 변화하고 발전하여왔음을 알 수 있다. 천년을 이어 온 처용무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화 유산이다. 앞으로 다시 천년 이상을 이어나갈 처용무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글 허영일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원장)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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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감사환영도 부벽루연회도 [平壤監司歡迎圖 浮碧樓宴會圖]

 

1745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새로 부임한 평양감사를 평양의 백성들이 환영하는 연회 장면이다. <부벽루연회도>에는 앞마당에 춤과 음악 공연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 끝에 녹포를 입은 집박악사가 위치하고, 그 옆으로 해금1, 대금1, 장구1, 좌고 1명이 보이는데 악기가 보이지 않는 나머지 2명은 현행 춤 반주 편성인 삼현육각에 피리 2명으로 짐작된다. 여기(女妓)가 처용무를 추는 모습을 담았다. 이 그림에는 조선후기 궁중정재()의 하나로 공연된 검무()가 출현한다.

 

 

연광정연회도 [ 練光亭宴會圖 ]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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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8.11 18:22

    첫댓글 _()()()_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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