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전쟁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군대의 이동 상황을 최대한 숨기면서 은밀히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병력과 무기 배치가 대중에 생생하게 공개된다. 지상에 있는 전차부대 집결 상황, 기지를 출발한 해군 함정과 공군기의 항로까지 온라인에 등장하고 있다.
소수의 정부 기관 요원만 알 수 있었던 적성국 군대의 움직임을 수많은 사람이 알게 되는 ‘오픈 소스’ 전쟁 시대가 열린 셈이다.
◆우크라이나 겨냥한 러시아군 움직임 모두 노출
우크라이나 사태는 ‘오픈 소스’ 전쟁의 대표적 사례다. 민간 인공위성 사진에는 러시아군의 움직임이 빠짐없이 공개되고, 항공기와 선박 추적 사이트는 미군과 러시아군의 대응 상황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다.
틱톡과 유튜브, 페이스북 등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투와 피난민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미국 인공위성 전문기업 맥사 테크놀로지는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주목받는 기업이다. 맥사는 지상 30㎝ 크기의 물체까지 식별하는 해상도를 지닌 위성사진을 제공한다. 고해상도 위성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어 미국 국방부와 정보기관들을 핵심 고객으로 두고 있다.
이같은 기술을 토대로 맥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 단계에서 국경에 집결한 러시아군 동향과 침공 직후 교전 상황을 담은 위성사진을 공개해 왔다.
지난 20일(현지시간) 맥사는 자체적으로 촬영한 위성사진을 공개하며 러시아군의 전투준비태세가 강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맥사는 지난 11일에도 위성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에는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 동부와 인접한 러시아 서부, 북부와 국경을 맞댄 벨라루스에 러시아군이 대거 배치된 정황이 드러났다.
맥사가 공개하는 위성사진은 러시아 정부 발표와 실제 군사행동을 대중과 민간 전문가들이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평가다. 실제로 러시아군은 벨라루스와 크림반도, 동부 국경 지대를 거점으로 우크라이나를 3면에서 압박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대중이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항공기 궤적을 추적하는 에어크래프트 스팟은 20일 트위터에 “러시아 해군 순양함 아드미럴 우샤코프함이 지중해 중부 해역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미 해군 P-8A 해상초계기가 이탈리아 시고넬라 공군기지에서 출동해 감시활동을 했다”고 밝혔다.
러시아군의 침공 직후인 24일에는 터키 공군 A400M 수송기가 키예프 인근 보리스필 공항에 도착했다는 것과 미 공군 글로벌호크 무인정찰기가 우크라이나와 흑해에서 정찰비행을 했다는 것도 공개했다.
동영상 공유 플랫폼 틱톡에는 관련 영상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10대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틱톡은 초기에는 자신의 춤을 영상으로 올리는 플랫폼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정치적 견해를 알리는 기능이 강해지면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컨텐츠가 올라오고 있다.
틱톡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신경전도 치열하다.
러시아 국영 리아 노보스티 통신은 지난 19일 틱톡 공식 계정에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인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수장 데니스 푸실린이 현지 주민들에게 러시아로 대피하라고 촉구하는 영상을 올렸다.
틱톡은 해당 계정을 정지하고 영상을 삭제했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의 개입으로 하루 만에 복원됐다. 틱톡에서는 TV 뉴스나 신문을 잘 보지 않는 젊은 층을 대상으로 우크라이나 사태를 설명하면서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영상이 잇따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북한의 실상을 파악하는데도 ‘오픈 소스’가 큰 도움이 된다. 미국 민간 위성사진 서비스 업체인 플래닛 랩스 등은 열병식 준비 동향이 포착된 평양 미림비행장, 영변 핵시설, 신포조선소 등 한미 정보당국이 주목하는 곳을 촬영해 공개하고 있다.
북한을 촬영한 위성사진들은 북한 전문 민간 연구기관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빅터 차 한국석좌와 조지프 버뮤데즈 연구원 등은 7일(현지시간) 북한 전문 사이트 ‘분단을 넘어’(Beyond Parallel)에 올린 보고서에서 북한 자강도 화평군 회중리 미사일 기지에 대한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이때 쓰인 위성사진은 맥사가 찍은 것이었다.
적성국 견제 효과 있으나 정확한 의도 파악 어려워
민간 상업위성 업체나 오픈 소스를 통해 공개되는 군사정보는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정부나 군이 독점하던 정보가 일반에 공개되면서 안보, 국제정치, 국방정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였다. 국민의 뜻을 정치에 반영하는 민주주의 원칙을 다소나마 반영할 수 있는 셈이다.
적성국 군대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효과도 있다. 해상도가 떨어지는 민간 상업위성에 군사행동이 노출됐다면, 성능이 더 우수한 군사정찰위성에는 훨씬 자세한 동향이 드러났을 것이라는 우려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같은 위험을 방지하려면 위성 감시를 회피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군사행동은 제약이 생긴다.
군과 정보기관 입장에서도 민간에서 수집해 공개하는 군사정보가 유용하다. 정찰자산의 성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적성국을 압박하는 여론전을 펼칠 수 있다. 위험 분석 등에 필요한 정보가 늘어나는 효과도 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은 국가지구공간정보국(NGA)을 비롯한 정보기관 외에도 민간 위성사진 서비스 업체들을 동원, 북한 전역을 수개월 동안 샅샅이 정찰해 영변 이외 지역에 있는 핵시설들을 찾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낙엽이 지는 가을이나 눈이 쌓이는 겨울철에는 북한이 숨겨둔 시설이 위성사진에 더욱 잘 드러났던 것으로 전해졌다.
‘오픈 소스’ 정보의 단점은 적성국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위성사진 등에서 나타나는 군사행동은 훈련 또는 전쟁 준비, 심지어 침공 직전 단계로도 해석될 수 있다.
심지어 역정보를 흘리기 위한 기만술일 수도 있다. 고도로 훈련받은 분석관이나 최신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을 투입해도 역정보 여부 등을 정확히 식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같은 점은 군과 정보기관이 군사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민간보다 우위에 서게 해준다.
군과 정보기관은 위성사진 외에도 지상과 해상, 공중에서 적성국 통신장비를 감청한 코민트(COMIT·통신정보), 적성국 내에 잠입시킨 첩보원에 의해 수집된 휴민트(HUMINT·인간정보), 다양한 종류의 전자장비에서 방출되는 신호를 잡은 테킨트(TECHINT·기술정보) 등을 수집한다.
이렇게 모은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적성국의 의도를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 민간 분야에서 확보된 정보를 더하면 분석의 정확도를 끌어올리는데 도움이 된다.
이에 따라 민간 분야에서 수집한 군사정보는 안보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을 높이면서 군과 정보기관의 활동을 보완하는 역할로서 계속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숨겨도 보인다"..첨단 기술이 연 21세기 '오픈 소스' 전쟁 [박수찬의 軍] (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