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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회귀
슬하는 오랜만에 자신의 집으로 퇴근해있었다. 20평대의 아파트였지만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지 않아 슬하에게는 더 크고 차가운 공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슬하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자신 방 책상에 앉아 있었고,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열쇠 중 하나로 잠겨있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서류 하나를 꺼내 보기 시작했다.
슬하가 꺼낸 서류에 중앙 상단에는 면목동 부녀자 살인사건이라 쓰여 있었다. 슬하는 그 서류를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1993년 면목동 다세대 주택 2층에서 30대 가정주부가 흉기에 찔려 사망한 강도 살인사건. 범인은 도시가스 배관을 타고 2층 창문이 열려있는 주택에 침입, 집안에 혼자 있던 가정주부를 수차례 송곳으로 가격했고 피해자는 범인의 흉기에 의해 췌장, 비장과 소장의 손상으로 인한 과다 출혈로 사망. 범인은 범행 후 집안의 귀중품을 훔쳐 현관을 통해 빠져 나갔고 핏자국이 난 발자국이 거실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신고자는 피해자의 딸로 학원에서 돌아온 뒤에 거실에 쓰러져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경찰과 응급차가 도착했을 시점에는 피해자인 어머니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사건 당시를 직접 목격하거나 도주 할 당시 목격한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 상황과 사건 현장 거실에서 발견된 발자국으로 봐서 키 170~175cm 남자로 절도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추청 될 뿐이었다. 그 지역 전과자를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 되었지만 신체적 조건, 알리바이 등의 이유로 용의선상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수사대상에서 제외 되었고 사건은 미해결 사건으로 종결 되었다.
슬하는 사건서류를 들고 어릴 때부터 사용하던 자신의 옷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옷가지 들이 있는 맨 아래 서랍을 서랍장에서 빼내었다. 슬하는 비워져 있는 서랍 안을 잠시 들여다보고 손을 집어넣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옷장 뒤 나무판이었지만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구멍 모양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슬하가 잡아당겨 빼낸 나무판 뒤에는 비밀 서랍이 있었고, 그 속에는 먼지가 쌓여져 있는 남성용으로 보이는 운동화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그 운동화 밑창 옆 부분에는 시간이 오래돼 색깔이 바랜 이물질이 묻어 있었다.
슬하는 다시 사건 서류를 열었고 서류 맨 밑에 사건의 신고자인 피해자 딸의 정신 감정서를 꺼내어 보았다. 그리고 그 서류를 읽으며 자신의 지나온 하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슬하는 소파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슬하의 눈은 시시각각으로 움직였고 꿈을 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꿈의 악몽이라 볼 수 없었으나 그 꿈과 관련돼 자신이 힘겨운 하루를 보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슬하는 꿈속에서 또 한 번 서랍장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전 다른 꿈속의 전개에 의해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란 듯이 슬하 앞에 놓여 있었다. 슬하도 애써 그것을 피하고 있지 않고 서 있었고, 자신의 꿈에 쫓아다니며 존재하던 서랍장이 어쩌면 자신 스스로가 놓아둔 무의식이 아니었는가 하는 꿈의 자각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슬하는 아직 그 서랍장 안에 있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것의 일부에 대해서는 무엇인지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고 그 역시 자신에게 아련함과 거부감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슬하가 그 서랍장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단지 서랍장 안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것을 확인한 후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게 슬하는 한참동안 우두커니 그 서랍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슬하의 그러한 꿈에서 깰 수 있었던 것은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 때문이었다. 슬하는 자신이 덮고 있던 점퍼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 했고 올바른 자세로 몸에 긴장감을 주었다. 그리고 최대한 핸드폰 신호음을 끌 수 있는 시간까지 잠에서 깨기 위해 노력한 후에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박현호 과장이었고 평소 강한 어조와 강직한 음성과 달리 흐트러진 목소리로 슬하에게 자신의 사무실로 올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슬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저곳에서 자고 있는 형사들을 피해 수사본부를 빠져나와 서늘한 새벽공기를 마시며 5분정도 걸어 서대문 경찰서에 들어섰다. 슬하가 박현호 과장 사무실에 들어서자 사무실 안에서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박현호 과장은 사무실 불을 켜지 않고 자신의 책상위에 있는 스탠드 불빛에 등지어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있었다. 슬하는 사무실 문을 반쯤 열린 상태에서 비서실에 켜진 불빛에 기대어 경례를 했고, 그제야 슬하가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박현호 과장은 뒤늦게 자신도 슬하의 경례를 받으며 앉은 채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슬하가 자리에 앉자 박현호 과장은 한쪽팔로 팔 거리에 지지를 하며 자세를 바로 잡으려 했지만 아직 몸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수사 진행은 진전이 있다고.”
박현호 과장의 음성은 평소와 같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가누지 못하는 몸만큼 정신이 없지 는 않았다.
“그래. 자네라면 잘할 것이라고 믿었네.”
박현호 과장의 말투는 비아냥거림은 아니었고 슬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도 자네만큼 그 범인을 빠른 시일 안에 잡고 싶네. 지금은 현장에 투입되지는 않지만 아나 역시 전직 형사였고 지금도 경찰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그리고 김동욱 경감도 지금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테니까.”
박현호 과장은 유능한 형사이자 강직한 형사였고 자신도 그런 과거를 그리워하는 있는 것 같았다.
“자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만 나와 김동욱 경감은 좋은 동료였네. 그리고 비슷한 생각도 많았고 말이 통하는 선후배로 지냈었네.”
박현호 과장의 입가에는 회환 섞인 미소가 비치었고 그것이 그의 말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김동욱 경감과 나는 시간이 날 때 마다 범인에 대한 생각과 범죄에 대한 방식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는 수사기법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네. 그리고 새로운 수사 기법을 상상해내고 실제 현장에서도 적용 해보곤 했었지. 하지만 우리 둘에게는 그러한 일들을 생각하고 고민할 때마다 느껴지는 것이 있었네. 범죄자를 잡는 경찰은 범죄가 수반되어야 수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네. 피해자가 생기기 전 선제적 수사는 공상 과학에 나오는 이야기에 불가하다는 것이지. 그러던 중 경찰청에서 김동욱 경감에게 범죄 구성에 대한 연구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우리 둘은 그것을 진행시켜왔네. 그리고 어쩌면 그 연구가 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하더라도 범죄가 성립된 직후, 가장 빠른 시일 안에 범인을 색출해 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네.”
박현호 과장은 술기운에 힘들어 하고 있는 반면에 발음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동욱 경감은 4년 전 마포구 부녀자 살인 사건을 해결하면서 그것은 단지 우리의 희망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네. 그 이후로는 연구에 흥미를 잃었고 오히려 지금까지의 연구가 잘못된 방향으로 이용될 것이라는 의심까지 하는 것 같았네. 그리고 나와의 대화가 단절되기 시작했고 나와 단절된 시간만큼 마포구 연쇄살인 사건 용의선상에 있던 이하윤 소장과의 만남이 늘어나게 된 것이네. 난 김동욱 경감의 선배였지만 단 한 번도 내가 보살펴 주어야 하는 후배라는 생각을 가진 적인 없을 정도로 그를 존중해 주었네. 그래서 난 내가 의지하는 후배로서 김동욱 경감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었네. 하지만 동욱이는 그런 나를 철저히 외면하기 시작했네.”
박현호 과장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은 지 불빛이 비치지 않는 어둠으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그때부터 연구도 지지 부진 하고 김동욱 경감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을 접한 경찰 수뇌부는 김동욱 경감의 내사를 지시했고, 나는 그것에 대한 내용을 알고 묵인 하면서 예의 주시하는 정도로 지내고 있었네. 처음에는 단순 뇌물이나, 청탁에 관한 내사로 시작되었지만 제흥동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김동욱 경감이 윗선의 명령에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내사과에서가 아닌 내사를 지시한 당사자가 직접 보고를 받기 시작했네. 감찰 강도 역시 그만큼 강화되어 나에게도 공조를 하라는 지시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고 난 그것에 협조하게 된 것이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있어 얼마 안 돼 결국 그러한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네.”
박현호 과장은 자신의 마지막 말에서 힘겨움이 더해지고 있었다.
“김 경감의 그 일 이후 내사는 없던 일로 치부하고 김 경감의 명예를 지켜주는 선에서 마무리 짓게 되었고, 그럼에도 경찰청에서는 이하윤 소장과 김 경감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네. 나 역시 김 경감이 그와 관련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하윤 소장을 감시하라는 지시를 지금까지 거둬드리지 않고 있는 거라네.”
박현호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비틀 거리며 자신의 책상위에 있던 파일을 집어 슬하 앞에 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게 최근까지 이하윤 소장의 감찰 보고서이네.”
슬하는 아무런 말이 없이 자신 앞에 놓인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김 경감의 마지막으로 만나 사람은 이하윤 소장이네. 그리고 죽음을 마지하기 전 마지막 통화자도 이하윤 소장과 한 것이네.”
박현호 과장은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난 자네가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을 묵인해 주겠네. 경찰청에서는 형사 뿐 아니라 어떠한 다른 경찰 관계자들이 그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는 것 같지만 자네가 혹시나 있을지 모를 김 경감의 죽음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다면 그것까지는 만류하지 않겠네.”
“하지만”
박현호 과장은 평소처럼 권위적인 말투로 돌아오고 있었다.
“자네가 그 이상의 일에 대해 조사하려하거나 알아보는 일이 생긴다면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난 자네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네. 이건 자네에게 전하는 마지막 경고이네.”
슬하에게는 박현호 과장의 지금의 언급이 이전의 명령보다 더 힘 있게 전해지고 있었다.
슬하는 아무 말 없이 보고서를 집어 들었고 박현호 과장은 자리에 일어서려는 슬하에게 힘없이 질문을 했다.
“자네는 지금의 내 행동에 대해 예상하고 얼마 전에 내게 그러한 말을 한 것인가?”
박현호 과장의 뜻밖의 질문에 슬하는 침착하게 대답을 했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과장님의 김동욱 과장의 애착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에 파견된 첫 날 과장님의 단호한 목소리 속에서 참고 있는 떨림이 감지되었고, 당시에는 단순히 피로로 인해 충혈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던 과장님의 눈과, 자신의 후배이자 부하직원이 사망했고 전국의 경찰 간부들이 모인 장례식장에서 오랜 시간 볼 수 없었던 과장님의 행동으로 유추해 보았을 때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겨두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되어졌습니다.”
박현호 과장은 다시 목소리와 자세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자네는 김동욱 경감과 닮은 구석이 있어. 그 방식은 완전히 다르지만 말이야. 자넨 그에게 친한 후배였나?”
슬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학생 때 강연자로 몇 번 강연을 들은 것과 경찰 행사가 있을 때 멀리서 뵌 것 외엔 수사관이 되고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적은 없습니다.”
“의외이군. 김동욱 경감은 자네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박현호 과장은 옆으로 누워 잠이 들었고 슬하는 사무실을 나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마지막 박현호 과장의 말이 슬하의 여전히 머릿속을 남아 있었다. 슬하는 김동욱 경감과 인연이 안 되는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로 생각하고 있었다. 경찰 시험에 합격하고 프로파일러로 임명된 후에 후배들에게 신망이 높던 김동욱 경감과의 만남의 자리가 없었던 것과 자신이 수강 받을 교육관으로 내정된 수업이 취소되었던 것은 단지 인연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여 왔다. 그리고 자신이 과학수사대로 발령받는 동시에 다른 곳으로 전출된 김동욱 경감과의 타이밍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질긴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김동욱 경감이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은 지금까지의 슬하의 우연성 결부를 뒤집을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슬하는 박현호 과장의 말에서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났지만 현재로서는 그것을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대답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떠올려지고 있었다. 슬하는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기어 자신이 경찰서로 왔던 길을 되짚어 수사본부로 돌아가고 있었다.
슬하는 아침 회의를 마치고 법원으로 향했다. 이하윤 소장이 당일 건축법위반관련 재판이 있다는 최근의 감찰 보고서 내용을 확인하고 이하윤 소장에게 몇 가지 명확히 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슬하는 하윤이 재판을 받는 재판장으로 들어갔고 그곳에는 여러 사건의 재판이 시간차를 두고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재판장 참관인석은 아주 한가한 편은 아니었다. 슬하는 비어있는 의자에 조용히 앉았고 하윤은 맨 앞줄에서 자신의 변호사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자신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건의 재판이 끝나고 하윤의 차례가 돌아왔고 변호사 그리고 검찰이 이하윤 소장을 비롯해 다른 증인들로부터 진술을 받아내고 있었다. 슬하는 재판에 채택된 증거 자료 들과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재판 진행 과정으로 보았을 때 부실 설계와 그로인한 하자에 대한 혐의는 입증하기 힘들어 보였고 재판은 무난히 끝나가는 것 같았다. 슬하는 변호인석과 증인석에 오가는 하윤을 관찰하며 하윤에게 시선을 때지 않았다. 하윤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금은 긴장한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고, 판사가 선고심을 내릴 날짜를 정할 때까지 하윤의 긴장은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윤과 그의 변호사는 함께 재판장을 나섰고 슬하는 멀지 않은 곳에서 하윤과 변호사가 인사를 나눌 때까지 기다리었다. 그리고 하윤이 혼자 남게 되고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슬하가 하윤의 몇 발자국 앞에 두고 하윤은 슬하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뜻밖의 장소에서의 만남을 놀라워하며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밝은 모습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슬하와 하윤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었다.
법원 뒤편 한적한 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하윤과 슬하는 평일 낯 시간이라 한산한 공원 산책길을 따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곳에 오니까 살 것 같습니다.”
하윤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었다.
“법원 같은 곳은 올 때마다 적응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윤은 뒤로 보이는 법원 건물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법원에 자주 오십니까?”
“처음이긴 한데 예전에 비슷한 곳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슬하는 하윤의 말이 여러 가지로 앞뒤가 맞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 집요하게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저를 만나기 위해 법원에 오셨습니까?”
“네. 겸사겸사 오게 되었습니다.”
슬하는 하윤보다 반 발짝 뒤에 서서 걸어가며 하윤이 그 이상은 묻지 않기를 원하고 있었고 자신이 하윤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한 것 같지만 김동욱 경감님이 형사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이 저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까?”
슬하는 결국 의도와는 다르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슬하는 하윤과의 대화가 단절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다행히 하윤이 계속되는 말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슬하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김동욱 경감이 슬하 형사님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은 말해 주지 않았지만 슬하 형사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름이나, 성별은 슬하 형사님을 만나서야 알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윤은 슬하와 보조를 맞추며 이야기를 했다.
“김동욱 형사가 예전에 자신이 강의를 하던 시절에 어떤 한 학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 학생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듯 강의를 듣고 있었고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지만 어떤 질문이나 강연 내용에는 미세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자 김동욱 형사는 학생들과 담소를 나누게 되었고 그 학생은 자신이 다른 학생들과 대화를 하며 웃는 모습에 한동안 자신을 바라보고 멈추어 서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학생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고 그 시선을 느끼고 있던 김동욱 형사는 그 학생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냉철한 프로파일러라는 일반적 선입견 때문에 좋은 인상으로 다가가면 의외의 모습에 호감을 표시한다거나 긴장을 푸는 효과 등 좋은 쪽으로 영향을 주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학생은 자신의 웃음이 부자연스러운 행동이라 판단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방의 감정 표현을 공감함으로써 받아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분석하고 판단해 자신의 감정에 대입하고 나서야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것을 습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개인적인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것이라고도 말을 했습니다.”
하윤은 가벼운 발걸음과 달리 슬하의 몸은 어디인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이후로 그 학생을 강연에서 몇 번 더 마주쳤고 그때마다 자신을 관찰 대상, 판단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고, 머지않아 그 학생은 경찰이 되어 자신과 같은 프로파일러가 되었다는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슬하는 평소와 같이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불편함이 밖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만으로는 제가 그 학생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네. 맞습니다.”
차분히 대답하는 것과 달리 하윤은 불규칙한 슬하의 걸음걸이를 맞추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김동욱 형사는 단순히 학생시절 눈이 가는 학생에 대한 호기심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슬하 형사님이 경찰이 된 후에 프로파일러로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용의자나 범인도 인지 못하는 감정이나 무의식을 파악해 사건의 본질을 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났고, 특히 사람을 분별해내는 능력은 그 누구보다 탁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관찰을 잘해서, 기억력이 좋거나 판단력이 훌륭해서 아니라, 선천적 본능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범죄에 대한 지식과 그 패턴을 분석해 내는 것 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깊이를 이해하고 동조하는 것에서 그러한 능력이 발휘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슬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 대해 분석되어지는 것이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슬하의 안 좋은 표정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저 역시 김동욱 형사가 말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 슬하 형사님이 저를 찾아왔을 때 저의 말과 행동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이질감으로 다가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동조할 수 있는 매개체를 찾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를 만나기 위해 재판장을 찾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번엔 하윤이 슬하보다 한 발짝 앞서나갔다.
“그래서 그때서야 김동욱 형사가 말했던 그 학생이 최슬하 형사님인 것을 짐작 할 수 있었고 그 사람의 성별이 여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슬하 형사님을 처음 만남에서 한바탕 웃게 된 여러 이유들 중 하나인 것입니다.”
슬하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왠지 이 대화의 결말이 예상되어지고 있었다.
“저는 최근에 알게 된 몇 가지 이유로 김동욱 경감님은 저를 의도 적으로 피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장님은 그것에 대한 이유를 알고 있으십니까?”
슬하가 예상하는 결과는 슬하가 전혀 원치 않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짐작은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슬하와 하윤은 어느새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김동욱 형사가 슬하 형사님을 피했을 거라는 이유는 단순히 불편하거나, 혹은 자신에 의해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 자신 스스로가 그것을 알아내고 싶은 이유가 가장 컸을 것입니다. 김동욱 형사가 말한 슬하 형사님의 탁월한 본능적 통찰력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찾고 싶어 했을 것이라 짐작되어집니다. 슬하 형사님 본인도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섣불리 접근하게 되었을 때, 과연 그것이 슬하 형사님이나 김동욱 형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슬하 형사님을 의도적으로 피했고 그 대신 자신만의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을 것으로 판단되어집니다.”
슬하는 이야기의 끝이 거의 다다랐음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슬하 형사님이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슬하 형사님의 경찰지원서 자료를 기반으로 성장과 배경 그리고 교육과정과 학습능력에 대해 알아보았고, 슬하 형사님이 프로파일링하는 사건에 대해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김동욱 형사는 그 능력의 원천에 대해서도 자신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것 같았습니다.”
슬하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경직되어가고 있었다.
“김동욱 형사의 말로는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슬하 형사님의 잠재되어 있던 능력이 비약 적으로 상승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슬하 형사님의 능력은 어머니 그리고 어떠한 사건으로 인한 영향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하는 결론에 이르렀다고도 이야기했습니다. 김동욱 형사는 그것에 대해 자세한 말은 안했지만 슬하 형사님에게 그리 좋지 많은 아닌 것이라 짐작되어졌습니다.”
슬하는 이미 직감하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자신이 어떠한 행동을 보여야 할 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슬하는 하윤의 말을 직면한지 않기 위해 노력할수록 떠올리기 싫은 영상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슬하가 집 현관에 들어섰을 때는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전해지는 이상한 기운과 방 그리고 거실에 널려져있는 서랍들이 자신이 익숙했던 집과 사뭇 다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거실 커튼이 바람에 의해 날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이곳저곳에 흩어 뿌려진 핏자국 함께 거실 한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슬하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려 피가 흐르고 있는 어머니에게 달려갔고 어머니는 혼미한 정신 속에서 자신에게 달려온 슬하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이었다.
슬하는 자신이 원치 않았던 영상들을 한 차례 흘려보내고 나서야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고 하윤의 몇 발짝 뒤에서 멈추어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슬하는 괜찮냐는 하윤의 물음에 태연한척했지만 이미 감정의 균형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하윤과의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슬하가 힘겨워 하고 있을 때쯤 두 사람은 공원을 한 바퀴 돌아 처음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슬하는 하윤과 서둘러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있는 곳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무언가에 쫓기듯 도착한 차안에서 반복적으로 떠올려 지는 생각들로 한참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의 슬하는 더 이상 웃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울지 않아도 되었다. 슬하는 자신의 어머니 장례식에 아무런 표정 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서있었다. 슬하는 그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슬하가 큰 충격으로 아무런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며 위로를 해주고 안쓰러워했다. 장례절차가 끝나고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게 되었어도 슬하는 그러한 상태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리고 침묵하고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대신 그만큼의 상대방의 감정과 이성 그리고 무의식적 행동 대한 이해능력이 발달되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때 무렵부터 슬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추리소설, 범죄학에 관한 책을 보며 학창시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슬하의 과거를 아는 누군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한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는 말을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릴 적 충격으로 인한 정신 불안 증세중 하나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슬하는 그러한 말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자신에 대한 주변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고 아버지의 만류에도 경찰대학에 입학해 청소년기에 처음 접해 알게 된 이후부터 자신이 희망하던 프로파일러가 되었다.
“선배! 선배!”
창완은 잠시 넋이 나간 슬하를 부르고 있었다.
슬하의 눈은 아직 어딘가에서 반쯤은 돌아오지 않았고 창완에게 무엇 때문이냐며 힘없는 질문을 했다.
“뭐가 왜에요? SNS 분석 결과대로 각 회사에 자료요청을 하냐고요?”
슬하는 창완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며 그러라는 말을 했고 창완은 그런 슬하를 이상하다는 식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 어디아파요? 오늘 낮에 행방불명되더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아니. 아무 일 없었어.”
슬하의 말에는 맥아리가 없었고 창완은 슬하의 그런 이상행동을 눈치 채고 있었다.
“좀 들어가서 쉬어요. 선배 지금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아요.”
슬하는 창완의 성화에도 사무실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책상에 맡에서 자신의 머리를 얹으며 뒤죽박죽인 자신의 머릿속을 비워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슬하는 이러한 순간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찾아 올 것이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가 너무 늦어 자신이 어떠한 표정으로 어떠한 행동과 말로 그에 대응 할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예상한 범위를 넘은 충격에 아직 자신은 그러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슬하의 머릿속을 반쯤 비워지고 있을 때쯤 밖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슬하는 자신의 사무실을 나섰고 그 앞에는 우반장을 비롯한 형사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 그게.....”
우반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처음 사건 용의자 그러니까 존속 폭행 수사를 받고 있던 남자가 구치소에서 자살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현재 상태는 어떻습니까?”
우반장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있던 용의자에게 그러한 일이 생겨 난처해하고 있었다.
“생명에는 지장은 없다고 하고 지금 수술을 끝내고 회복실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숟가락을 갈아서 손목을 그었기 때문에 상처가 깊게 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백 형사를 병원에 가보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우반장은 옆에 서있던 백 형사에 눈치를 주었고 백 형사는 급히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슬하의 말에 우반장을 비롯해 다른 형사들도 의아한 얼굴로 슬하를 주목했고 슬하는 아무 말 없이 의자에 걸어둔 자신의 겉옷을 입고 나가려하고 있었다. 우반장은 다른 사람이 가도 된다는 말을 했지만 슬하는 병원 이름과 병실 호수만 물어보고 사무실 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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