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선생님이 알아챈 것은 석대와 저 아이들이 시험지를 바꾸어 공정한 채점을 방해한 것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넉넉하지 못하다. 우리 반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릇된 지난날
부터 정리돼야 한다. 내 짐작으로는 그 밖에도 석대가 한 나쁜 짓들이 많이 있을 것디다. 이제 1번부터 차
례로 자신이 알고 있는 석대의 잘못이나 석대에게 당한 괴로운 일들을 있는 대로 모두 얘기해 주기 바란다.」
이번에도 시작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다시 눈을 흡뜨고 쏘아보는 석대의 눈길에 흠칫해진 아
이들이 머뭇거리자 그 목소리에는 이내 날이 섰다.
「5학년때 담임 선생님께 작년에 있었던 일을 얘기 들었다. 그분의 말씀으로는 그때 아무도 석대의 잘
못을 써내 주지 않아 이 학급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줄 알고 계속해 석대를 믿게 되었다고 하셨다. 오늘 나
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이 석대의 딴 잘못들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이제 시험지 바꾼 일의 벌은 끝났으니 나
머지는 지금까지 지내온 대로 다시 석대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좋겠나? 1번 우선 너부터 말해봐.」
그 말은 금세 효과를 냈다. 실은 아이들도 내가 늘 얕봤던 것처럼 맹탕은 아니었다. 다만 서로 힘을
합칠 줄 몰랐을 뿐, 마음 속에서 불태우던 분노와 굴욕감은 한참 석대와 맞서고 있을 때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 분명했다. 변혁에 대한 열렬한 기대도, 그리하여 이제 문턱까지 이른 변혁이 다시 뒷걸음질치려 하자
용기를 짜서 거기 매달렸다.
「석대는 내 연필깎기를 빌려가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단속 주간이 아닌데도 쇠다마(구슬)를 뺏어가고......」
1번 아이가 그렇게 입을 열자 2번 3번도 아는 대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석대의 비행(非行)은 끝없이 이어졌다.
여자애들의 치마를 들추게 시켰다든가, 비누를 바른 손으로 수음(手淫)을
하게 했다는 따위 성적(性的)인 것도 있었으며 장삿집 애들은 매주
얼마씩 돈을 바치게 하고, 농사짓는 집 아이들에게는 과일이나 곡식을, 대장간 아이에게는 엿으로
바꿀 철물을 가져오게 하는 따위 경제적인 수탈도 있었다. 돈 백 환을 받고 분단장을 시켜 준 일이며,
환경 정리를 한다고 비품 구입비를 거두어 일부를 빼돌린 게 밝혀지고, 그 전해 한 학기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도 나를 괴롭힌 과정도 대강은 드러났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한 것은 그런 것을 고발하는 아이들의 태도였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선생님만 쳐다보
고 머뭇머뭇 밝히다가 한 번호 한 번도 뒤로 물릴수록 차츰 목소리가 커지면서 눈을 번쩍이며 쏘아보는 석대
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임마' '새끼' 같은 전에는 감히 입 끝에 올려 보지도 못한 엄청
난 욕들을 섞어 선생님께 고발한다기보다는 석대에게 바로 퍼대는 것이었다.
이윽고 39번 내 차례가 왔다.
「저는 잘 모릅니다.」
내가 선생님을 쳐다보고 그렇게 말하자 일순 교실 안은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담임 선생님보다 먼저 아이들이 와 하고 내게 덤겨들었다.
「너 정말 몰라?」
「저새끼, 순 석대 꼬붕이.......」
「넌 임아, 쓸개도 없어?」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만 없으면 그대로 내게 덮칠 듯한 기세로 퍼부어 댔다. 나는 그들이 뿜어 대는 살
기와도 같은 훙맹한 기운에 섬뜩했으나 그대로 버텼다.
「정말로 모릅니다. 전학온 지 얼마 안돼서......」
내가 그들 쪽은 보지도 않고 선생님만 바라보며 그렇게 되뇌이자 아이들은 한층 험한 기세로 나를 몰아
세웠다. 그대 알 수 없는 눈길로 나를 가만히 살피던 선생님이 그런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알겠어. 다음, 40번.」
내가 석대의 비행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한 것은 오직 진심과 오기가 반반 섞인 것이었다. 내가 마지막
서너 달을 석대와 유난히 가깝게 지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때도 그는 어찌된 셈인지 자신의 치부만은 애써
감추었다. 첫 한 학기 그에게서 받는 피해도 모두 간접적인 것이어서 내게는 증거가 없었으며 ― 또 대강은
이미 딴 아이들의 입으로 들추어진 터였다. 거기다가 5학년 한 해 학급에서의 내 위치 자체가 구석구석 숨
겨진 석대의 비행을 알아내기에는 묘하게 불리했다. 그 한 해의 절반은 내가 석대의 유일한 적대자였기 때
문에, 그리고 다른 절반은 내가 그의 한 팔처럼 되었기 때문에 속을 터놓고 지낼 친구들을 얻을 수가 없었
고, 그래서 어디엔가 불의(不義)가 존재한다는 막연한 느낀뿐, 교실 구석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일들은 잘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기는 그날 내 앞까지의 아이들이 석대를 고발하는 태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석대의 나쁜 짓을 까
발리고 들춰 내는 데 가장 열성적이고 공격적인 아이들은 대개 두 부류였다. 하나는 간절히 석대의 총애를
받기 원했으나, 이런저런 까닭으로 끝내는 실패한 부류였고, 다른 하나는 그날 아침까지도 석대 곁에 붙어
그 숱한 나쁜 짓에 그의 손발 노릇을 하던 부류였다. 한 인간이 회개하는 데 꼭 긴 세월이 필요한 것은 아
니며, 백정도 칼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느닷없는 그들의 정의감이 미덥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갑작스레 개종자(改宗者)나 극적인 적향 인사(轉向人士)는 믿지 못하고 있다. 특히 그
들이 남 앞에 나서 설쳐 대면 설쳐 댈수록. 내가 굳이 석대를 고발하려 들면 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
지만, 그날 끝내 입을 다문 것은 아마도 그런 아이들에 대한 반발로 오기가 생긴 때문이었다. 내 눈에는 그
애들이 석대가 쓰러진 걸 보고서야 덤벼들어 등을 밟아 대는 교활하고도 비열한 변절자로밖에 비춰지지 않았
다. -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중에서
첫댓글 평소에도 엄석대같은 사람들 주변에있음.. 답도 없고 ...
나 중학교 다닐 때 엄석대같은 여자애 있었어 ㅋㅋㅋ근데 씁쓸한게 그 엄석대가 무너진게 고등학교가서 엄석대보다 더 큰 엄석대를 만나서 굴복했기 때문ㅋ...그리고 중학교때 엄석대 따까리 하던 애들은 아직도 그러고 사는듯ㅋㅋㅋㅋㅋ이 소설보다 훨씬 심각해 저항조차도 못하고 살고 있음
젤 시러.. 대놓고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부류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4호 이문열 편 읽어보면 왜 이런 소설을 썼는지 답을 얻을 수 있음. 이문열 선생님 가정사(사회주의 아버지가 월북하는 바람에 계속해서 집안이 감시를 당했음)를 이 매거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매거진 속 인터뷰를 보면 작가가 쓴 작품이랑 정치성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더라고!
이야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