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동은 어디가고 깡깡이예술마을이 웬말이냐!
조선수리업의 일번지였던 대평동이 깡깡이예술마을로 재생할려는 몸부림을 태동하고있다.
영도섬과 뭍은 일제강점기때 영도다리를 놓고나서 연결되었다. 영도다리를 건너면 영도구 대교동이고, 영도경찰서가있다. 영도경찰서 길건너 공터는 멋진 호텔이 들어섯고, 선창은 지난 날과 같이 소형선박들로 빽빽하다.
선착장에 해상임검소와 사체부검실있던 자리는 영도해상유물들을 전시한 길다란 건축물이 서있고 어둠살이 질
때면 영업을 개시하던 포장마차들이 아직도 장사를 하는 거같다. 경찰서 청사뒤편 중소형 어선과 바지선들의 정
박한 수변 물량장을 따라 대평동으로 걸었다.
영도 대평동은 오래전에는 대풍포구라 했고 일제강점기때 포구해안을 매립하면서 대평동이라는 법정동이 생겨났다. 매립지에는 크고작은 선박수리업체들이 들어섰고, 그 수리업체들이 우리나라의 근대조선업의 근간이 되었
다. 매립지로 조성된 대평동과 남항동해안은 남태평양에서 태풍이 올라와도 영도섬이 큰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는 방파제역활을 하여 배를 정박시켜 수리하기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라, 한국(조선)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인 다나카조선소가 대평동에 들어서면서 선박수리업으로 활성화 된 마을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강선(철선)을 건조했던 대한조선공사는 한참후 청학동연안에 설립되었다. 대평동에 근래까지 대표적 선박수리업체로 남아있던 대동조선이 진해로 떠나고 중국으로 일감이 옮겨가면서 조선수리업은 침체기를 맞아 대평동의 활기는 예전만 못하다.
1994년경 영도에 부임했을때 대교동큰길에서 대평동마을 중심 대평동사거리로 들어오는 도로는 그때까지도 확
장이 되지않아 조선소로 운반되는 물품들은 차량보다 배편이 더 편리해 작은 통선들이 많이 운항되었고, 대평동
과 자갈치를 이어주던 도선장이 자갈치와 마주보는 수변에 있었다. 자갈치나 남포동방면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마을버스로 영도다리를 건너는 것보다 직선거리로 다니는 도선이 시간도 절약되고 배삯이 저렴해서 많이 이용했으나 해상과 어업관련 종사자가 줄어들고 길이 좋아지면서 이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자 운항을 중단하였다.
영도는 조선수리업과 해상산업이 활황일때 경제가 잘 돌아갔던 동내였기에 대평동인근에 선원양성소가 있었고,
청학동산비탈에 선원학교가 세워졌으며, 동삼동에는 해양대학교가 있다. 경찰서사무실에서 원양으로 출항하는
어선들을 내려다 볼때가 있었다. 원양으로 고기잡이 나가는 배들은 뱃머리에 풍어를 기약하는 만국기와 형형색색
의 풍어기를 나붓끼며 출항의 뱃고동을 길게 울리고 만선을 기약하며 남항앞바다를 떠나 남지나, 아프리카, 북태
평양해역의 먼바다로 향하였다.
대교동수변길을 따라가다가 대동아파트를 지나면 대평동바닷가에 뭍에 올려 수리중인 배들이 보인다. 수리조선
소 사이길 담장에 우리나라 조선업의 역사를 알리는 사진을 보면서 해안을 따라간다. 영도다리와 남항대교가 잘
보이는 방파제아래쪽에 용신당 굿당이 있다. 굿당은 영도다리를 만들때 사고로 죽은 인부들을 위로하던 신당이며
일제강점기때 부터 있었다.
남항방파제를 끼고 쭉따라 걸으면 충무동 해안에서 삐져나온 하얀등대와 마주보고 서있는 홍등대가 보이고, 수변
에 매립지가 확장되어 새로 지은 선원양성소가 있다. 사거리신호대를 건너면 대평동으로 들어서는 길목인데, 길
양쪽은 선구점과 선박관련 공구상 엔진수리업소 고철상들이 쭉 이어져있다. 지난 날은 업체마다 납품기일을 맞추
느라 바삐움직이는 일손들이 활기가넘쳤고, 수리조선소 담장안에는 깡깡이 아저매들이 선체의 철판에 열기가 그
대로 전달되는 날에도 밧줄에 의지하여 선체에 부식된 녹과 바닥에 달라붙은 조개껍데기들을 털어내는 깡깡이 작
업을하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지금도 깡깡이아저매들이 조선소에서 같은 일을 하는지 몰라도 노동강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일품을 받고 열심히
일하던 현장은 먼미래에도 잊혀지지않도록 깡깡이예술마을이 활성화되었으면한다. 깡깡이아저매들은 영도의 오
지 신선동 청학동 동삼동 등 봉래산 중복도로 주변에 살면서 오랜기간 깡깡이질 소음으로 청각장애와 속병을 앓아가며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이다.
그때 원양과 연근해 어선들이 출선하면 어획량이 좋았고, 수리조선소에 일거리가 많았던 시절이라 음식점과 다
방, 주점들도 돈벌이가 좋았던 동내였다. 돈벌러 항구로 찾아든 사람이나, 탄광촌에서 막장일하는 탄부이거나 이들에게도 외로움을 달래는 해방구가 필요했을 것이라, 그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있는 곳이 다방 술집 등 접객업
소였다. 힘든 일에 종사하는 사람일 수록 성격들이 단순해서 실비집에 여급이나, 특히 다방아가씨들의 친절에 잘
속아 넘어갔다. 몇달간 먼 바다에서 거친파도와 싸우고 외로움을 견디며 힘들게 번돈을 접객업소 여성들의 달콤
한 스킨쉽에 녹아 술값 몸값 화대로 날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것은 해상에서 예측불가한 일들이 닥치면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허망감, 바다로 나가전에 받은 전도
금이 주머니에 들어있는 경우, 여가받은 시간을 특별히 소일 할데가 없는 선원들은 주로 다방에서 죽치다가 티켓 아가씨와 회포를 푸는데 돈을 쓰버리기도 하고, 다방레지와 계약동거를 하며 기둥서방 노릇하다가 모아둔 돈을
어느날 아가씨가 훔쳐 도망가는 날에는 빈털털이 신세가 되어 바다로 나가게 되는데, 그때 대책없이 선원생활을
한 사람들은 가정잃고 몸은 몸대로 골병들어 나이들자 선원생활도 못하게되면 쪽방에서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어렵게 살아가게된다. 남항동에 부산항나이트가 성업했고, 대평동 남항동 대교동에 섬다방 항구다방 수다방 항남다방 양다방 등 한집건너 다방이고 주점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폐업했고 시설을 새로꾸며 카페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는 찻집들이 눈에 띈다.
길거리에 아메리카노를 빨고 다니는 것이 보편화되다 보니, 주택가 골목안까지 커피가게가 들어섰다. 구멍가게
보다 커피점이 더 많아 보인다. 커피전문점은 체인점끼리 브랜드 경쟁이 불붙었고, 과거에 다방이나 커피숍을 요
즘은 카페라하여 대형창고나 생산시설을 개조하여 카페영업을 하고, 거금을 투자하여 보다 더 크게 보다 더 화려하게 짓는 추세로 지난 날 칙칙한 다방이미지를 탈피했다. 중년들도 곗날 밥먹고 2차로 차마시며 잡담하고 노닥 이는 장소가 카페이며, 젊은이들이 노트북을 펼쳐 두고 학업에 몰두하는 장소가 카페같다. 젊은 여성들이 기술을
배우거나 생산현장에 취업해서 직장에 다니기를 멀리하고 테이크아웃에 서서 커피장사나 하는 모습을 보면 어려
운 시절을 극복하고 살아온 어른들의 눈에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커피숍이 카페라는 이름으로 대형화 고급화 추세라해도, 지난 날 향수가 묻어나는 오래된 다방이 그리울때가 있
다. 내외부를 손대지 않고 그자리 그모습으로 존재한다면 문화제급 대우를 받기도 하는데, 부산시내에 그런 다방
을 찾기가 쉽지않다. 다행히 대평동 양다방이 그자리에 그모습 그대로 영업하고있다. 지난 날이 생각나서 안에 들어가보았다. 주인은 몇번 바꼈고 주인마담 이여사가 10년전 서울에서 내려와 다방을 인수하고는 여력이 없어 인
수할때 시설그대로 영업을 하면서 6~70년대 영화포스터와 근대유물들을 수집해서 전시해둔 것이라 하는데 카운
터에 시커먼 전화기와 여러장의 레코드음반을 보니 추억의 음악다방 분위기가난다.
쌍화차를 권하기에 시켰더니 7000원이다. 비싼듯 했지만 보약 한사발을 마시는 기분이다. 아메리카노 커피값은
2000원이며 토요일 일요일이면 관광객들이 들어와 여러명이 차를 시키지만 쌍화차주문은 잘 안하다고 씁씁래
하며 웃는다. 평일은 유동인구가 없어 영업이 잘 안되나 깡깡이예술마을이 조금씩 알려져 소문듣고 찾아오는 손
님들 덕에 영업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어떻게던 다방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내부를 바꿀여력도 없지만 현상태가 좋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뜻을 따르겠다고 한다.
대평동 안동내 사거리 마을버스회차지점에 일제 강점기때 개소한 대평파출소가 있었다. 2층으로 지어진 일본식
목조건물로 2층 숙직실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은 낡아서 삐긋삐긋소리가 났다. 1999년경 영도관내 파출소가 통폐
합되면서 폐소되었고 도로를 확장때 건물은 철거되었는데, 남해출신으로 경남고를 졸업한 정년이 가까웠던 파출
소장이 장기간 역임했다. 건강이 안좋았던 그소장은 시내가까이 집을 두고도 출퇴근하기가 불편했던지 소장실에
주로 있었다. 밥보다 라면을 즐긴다고 소문이 났었고 정년을 채우고 얼마 안되어 돌아 가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때 순시(점검)를 가면 본서에서 나왔다고 참으로 친절하게 안내하셨고, 파출소 바로옆에 양다방에 차를 시켰
다. 그때 양다방이 그대로 있다. 낮시간 슬슬 걸어서 지난 날 재직때 눈에 익었던 대평동의 여기저기를 살피며 돌
아 다니다 보니 어느듯 저녁모임에 갈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