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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기원
시라카와 시즈카 지음
중국 갑골문과 금문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시라카와 시즈카 박사가 1970년 펴낸 책이다. 그는 갑골문과 금문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삼천수백 년 이전에 살았던 고대인의 사유와 민속과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중국의 고대 국가인 은나라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갑골문은 대개 점을 친 내용인 복사(卜辭)를 기록하고 있는데, 시라카와 박사는 이 복사가 고대 중국인의 주술의례를 형상화한 상형문자라고 주장한다. 그는 고대의 말처럼 고대의 문자에도 신들과 소통했던 신화 세계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것이 한자가 주술적 종교적 의미를 가진 상형문자로 탄생한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말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문자의 역사는 삼천수백 년에 불과하다. 가장 오래된 문자로 알려져 있는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Egyptian hieroglyph: 신성문자)와 수메르의 설형문자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는 상형문자가 성립된 것은 기원전 3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불과 5000년 전의 일이다. 한자의 성립은 그보다 훨씬 늦다. 한자의 성립 추정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14세기경, 지금으로부터 약 3300~3400년 전의 일이다. 고대의 선진문화가 발달된 지역에서는 히에로글리프와 설형문자를 비롯해 많은 문자가 탄생했고 그 대부분은 상형문자였다. 여러 지역에서 탄생한 상형문자들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잇달아 소멸해버렸으나 오직 한자만은 불사조처럼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갑골문자는 출토된 지 10여년 만에 거의 다 해독된 셈인데, 이는 다른 고대 문자 해독의 역사에 비하면 놀랄 만큼 빠른 속도다. 한자는 성립한 이래 캘리그래피로서의 서체의 변천을 겪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구조의 변화는 없었으며, 글자의 용법 역시 동일했기 때문에 갑골문자와 한자는 동일한 체계를 지닌 문자였다. 한자는 원시시대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전해져 내려온 유일한 문자 체계인 것이다. 갑골문은 가장 오래된 한자의 자료이다. 한자는 점을 치기 위한 문자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대 중국에서는 말 속에 신령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해 말을 언령(言靈)으로 여겼다. 그러나 말은 언령에만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문자는 더욱 위대해진 왕의 신성한 능력을 증명하고 나타내기 위해서 언령이 지닌 주술적 능력을 더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고, 아울러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던 것이다. 곧, 문자는 그 안에 언령의 주술적 능력을 담아 지속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문자는 말의 주술적 능력을 받아들여 훗날까지 그것을 정착시키고 또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아울러 그를 통해 왕권의 신성화에 봉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했다. 신화를 버팀목으로 삼아 존속할 수 있었던 왕조의 권위가 현실에 실재하는 왕의 신성성 위로 옮겨졌을 때 비로소 문자가 필요해진 것이다.
모든 고대문자가 상형문자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한자를 상형문자라고 하는데 이 상형만으로는 문자 체계를 갖출 수 없다. 상형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글자는 대부분 형태가 있는 것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고대 문자는 대개 상형문자이지만 가차(假借)에 의한 표음적인 표기법의 발전, 즉 상형의 원리를 넘어선 곳에서 성립한 것이다. 형체가 있는 것은 도상(圖象), 즉 그림을 통해 나타낼 수 있고 어떤 동작이나 관계를 나타내는 것 또한 역시 상형이나 지사(指事) 혹은 그 조합으로 글자의 표현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관념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형식어 등은 표기할 수 없다. 상형문자가 문자로서 성립하려면 일정한 형태로 음과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곧 음과 뜻이 항상 일정한 형태로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이런 관계가 성립되면 거기에서 형태와 음만 끄집어내는 표음화가 가능해진다.
동(東)과 같이 방위를 나타내는 글자 역시 가차문자이다. 東은 아래위가 묶인 주머니를 본뜬 글자인데 음이 같기 때문에 東西를 가리키는 동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원래의 뜻은 잊혀지고 橐(전대 탁)이 주머니를 가리키는 글자가 되었다. 西는 대나무 그릇인 통의 모습을, 南은 남방 민족인 묘족(苗族)이 사용하는 남임(南任)이라고 하는 북의 모습이며, 北은 등 뒤라는 의미이다. 이중에 北만이 아직도 의미와의 연관성을 간직하고 있다.
상형으로 문자를 표기하는 방식은 애초에 한계를 안고 있었다. 상형적 방법 가운데 上下, 本末 등 관계를 뜻하는 것을 지사(指事)라고 하는데, <설문해자>에 수록되어 있는 지사문자는 700자도 채 안된다. 또 상형문자를 조합한 회의문자 역시 600자 정도이고, 그 외의 글자는 모두 음부(音符)를 가지고 있는 형성문자이다. <설문해자>에 수록되어 있는 9,353자 가운데 상형문자와 회의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14%에 지나지 않는다. 훗날 글자 수가 늘어나도 글자의 기본인 상형문자와 회의문자는 늘어나지 않으며, 전체에서 보면 이 글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오히려 낮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를 상형문자라고 하는 것은 음을 표기하는 방법이 본래의 음표(音標)문자에 의거하지 않고 여전히 원시 시대의 표의문자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文은 문신이라는 뜻의 글자로, 사람의 가슴에 문신을 그려 넣은 형상을 본뜬 형상문자다. 아마도 고대에는 시체를 신성하게 치장하는 의식으로서 문신을 새겼던 것 같다. 그러므로 文祖, 文考, 文母 등 조상을 가리키는 말에도 文을 붙였다. 문신에도 가입식이라는 의미가 있다. 예컨대 아이가 태어나면 서둘러 이마에 먹 등으로 문신을 새겼다. 産의 윗부분은 바로 이마에 새긴 문신을 뜻한다. 다 자란 사람, 곧 성인을 彦(선비 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신을 하는 부분인 얼굴을 顔이라고 썼다. 顔은 대체로 이마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産과 彦의 윗부분에 자리한 立처럼 생긴 부분은 원래 文의 형태로 표기했었다. 덧붙이자면 죽은 사람에게 문신을 새기는 것도 일종의 가입식으로 조상신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였다.
한자는 원래 해안 지역의 민족이었던 은나라 사람들이 성립한 문자이고, 은나라 문화권 고유의 문자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 태어나 자연이 베푸는 기후, 곧 풍기(風氣)의 영향을 받으며 풍속에 순종하면서 살았다. 그 모든 것은 '주어진 것'이었다. 풍기(사람의 기상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나 풍모, 풍격 등 사람의 인격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어떤 성격을 가리키는 말에도 모두 風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 것은 바람이 그 모든 것을 정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생명력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그 존재를 인간에게 말해준 것이 바로 바람이었고, 인간은 바람을 자연의 숨결, 신의 정령으로 여겼다.
이처럼 신화는 토속적인 신앙이 왕조의 지배 질서에 통합되면서 성립한 것이다. 풍신 가운데 가장 상위에 자리한 것은 황제의 사자이기도 한 봉황, 곧 大鵬이었다. 대붕은 태풍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졌는데, 먼 바다 위에서 일어나 계절마다 찾아오는 거칠기 짝이 없는 이 신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다. 대붕만큼 자연의 활동이 얼마나 거대하며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신도 없었다. 莊子가 <장자> 서두에서 대붕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묘사하며 대자연의 인격을 상징하려고 했던 것은 이와 같이 고대 이래 이어져온 전승을 사상적 내용으로 바꿔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중국에서는 인격이 최고로 완성된 상태를 聖이라고 한다. 유교의 궁극적인 이상으로 이 글자를 거론한 이래, 성인은 지극히 고매하고 이상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로 여겨져 왔다. 聖은 귀(耳), 입(口), 그리고 사람 인(人)이 서 있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聖은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말이 지닌 신통력에 대한 믿음은 원시 시대에는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이 시대에는 聖이나 聰 등의 글자처럼 귀가 밝은 사람을 신성하게 여긴 것이다.
伏은 개가 엎드려서 사람을 쳐다보는 형상을 본뜬 글자라고 풀이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실제와는 다르다. 伏은 원래 ‘묻을 예’를 나타내는 글자였다. 묻을 예는 埋牲, 즉 희생물을 묻는다는 의미이다. 진나라에서는 제사 지내는 곳을 伏詞라고 불렀다. <秦本紀> 德公 2년(BC 679)을 보면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개를 잡아 고를 물리쳤다. 初伏, 以狗禦蠱"라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의식은 계절별로 행해졌다. 오늘날 여름철의 절기를 가리키는 초복, 삼복이라는 말은 이러한 의례가 행해지던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 전해져 정착한 말이다.
은나라 왕의 능묘에 보이는 무사와 개를 희생물로 함께 사용하는 방식이 이른바 복예의 가장 오래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伏은 복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능묘 뿐 아니라 궁궐이나 사당의 중심 건물이나 문이 세워지는 자리에도 희생물을 파묻었다. 이 경우에도 희생물로는 개를 사용했으며 양이나 돼지 등의 희생물은 별도의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 이처럼 개를 희생 제물로 바친 그 목적은 희생이 아니라 저주를 막는 데 있었다. 땅 속 아무데나 돌아다닐 수 있는 고(蠱 독 고)를 방지하기 위해 후각에 예민한 개를 그곳에 파묻어 중요한 장소를 지키게 했던 것이다.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진 여성을 妾이라고 했다. 妾(계집종 첨, 첩 첩)은 여자의 몸에 바늘 (辛 매울 신)로 문신을 새긴 것을 형상화한 글자다. 명덕사상(明德思想)은 은나라를 지탱했던 신권 정치의 질서가 깨지고 주나라 사람들에 의해 천명사상(天命思想)이 발생하면서 탄생했다. 이때 賢哲이라는 말에도 천명사상을 배경으로 새로운 내용이 부여되었다. 賢과 哲의 원래 뜻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물 혹은 신을 섬기는 봉사자이다. 여전히 이 두 글자의 형태에 문자가 성립된 당시의 관념이 그대로 담겨 있기는 하지만 문자의 의미란 사회생활과 사상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속담은 주술적 언어였다. 속담은 선과 악 양쪽에 모두 쓰이지만 실제로는 저주에 가까운 말이다. 언어는 원래 주술적 말인데, 그 중에 言은 바늘을 뜻하는 辛과 祝告器 口로 형성된 글자로 자기 맹세를 뜻하는 말이며 語는 저주를 막는 방어적인 말이다. 가무에는 필연적으로 악기가 동반된다. 樂은 신을 맞이하면서 춤을 출 때 손에 들고 있는 방울(鈴)을 본뜬 글자로, 방울은 손에 들고 춤사위에 맞춰 흔드는 데 쓰였다. 樂은 신을 즐겁게 했다. 때문에 그 소리를 이용해 신령을 불러들이기도 하고 악령은 쫓아내기도 했다. 그 악기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가무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 제물의 부정을 씻어내기 위한 행위이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악기에 악령을 쫓아내고, 병을 낫게 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병 고칠 療는 옛날에 '병들어 기댈 녁' 글자 안에 樂을 넣은 글자였다. 樂은 치료, 즉 위로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탄생이라는 신비로운 사건을 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사람은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난다.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탄생이 영혼을 받는 일인 이상 영혼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났다 하더라도 영혼은 모습을 바꾸어 어딘가에 살아 있으며 또 새로운 육신을 빌려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영혼은 새의 모습이 되어 어딘가로 떠나간다는 사고방식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문신은 원래 중국의 해안 지방에 살던 민족, 즉 동이(東夷)족의 풍습이었다. 문헌 시대 이후에는 월나라의 단발문신(머리를 짧게 깎고 몸에 새기는 문신) 풍습이 기록으로 전해지지만, 이 풍습은 옛날에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동이계통의 여러 종족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남부 지방에는 이러한 풍습을 전하는 자료가 더욱 많으며, 묘족 계통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문신의 풍습이 남아 있다. 문신을 새기는 풍습은 한반도 남부를 비롯해 타이완과 홋카이도에도 그러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륙 지방으로 가면 문신의 풍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문신과 관련이 있는 문자가 동아시아권에서 성립된 문자임을 말해준다.
夫婦라는 글자는 남녀 모두 머리를 묶고 거기에 비녀를 꽃은 형태를 나타낸 것으로, 부부가 정장을 차려 입은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사당에서 무언가를 빌거나 기원하는 사람이 바로 兄이었다. 口兄(겁낼 형), 祝은 모두 兄에서 유래한 글자이다. 사람이 빌고 소원하는 일(祝告)에 대해 신령이 어렴풋이 반응을 보이는 상태가 바로 兌(기쁠 태) 이다. 兌자 윗부분의 八은 신이 나타날 조짐이라는 표시이다. 기쁨이란 뜻의 悅, 脫我狀態를 가리키는 脫은 모두 兌에서 유래한 글자들이다.
가부장 제도가 확립된 사회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父는 도끼를 손에 들고 있는 형태이고 母는 젖을 드러낸 여자의 모습이다. 이 두 글자의 형성에서 보듯 가족 윤리의 기본은 권위와 자애였다. 侖(둥글 륜)은 목간 같은 것을 둥글게 묶은 형태로 전체의 질서가 잘 갖추어진 아름다운 관계를 뜻하는 글자다. 倫(인륜 륜), 輪(바퀴 륜) 등은 모두 侖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옛 의미가 없어지고 德이 도덕적으로 바뀐 것은 사회생활의 변화에 따라 의식도 변했기 때문이다. 즉, 사회생활의 변화가 글자의 의미와 가치를 바꾼 것이다.
愛는 뒷걸음치는 사람의 모습에 心을 더한 형태다. 이 글자는 미련이 남는 사랑에 대한 소박한 표현이었다. 仁은 원래 사람이 돗자리 같은 것을 깔고 앉은 모습을 본뜬 글자인 것 같다. <설문해자>의 心部에는 心이 들어 있는 글자만 263자가 수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은 오래 전부터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형성문자다. 즉, 원래부터 있었던 글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이 풍부해짐에 따라 점차로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憂(근심할 우)는 신에게 애절한 호소를 담아 춤을 춘다는 뜻이었으며, 그런 춤을 추는 사람을 優(배우 우)라고 했다. 갑골문에서는 心이 붙은 글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에서 고작 20여 자 정도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사람이 신과 함께 살았던 시대에는 아직 심성에 관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보같은 시인도 노년의 애잔함을 떨치지 못해 "늙고 병들어 쪽배를 홀로 타고 있네" <登岳陽樓>라는 시만 남긴 채 고독 속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비록 가족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는 시대라 해도 노인들은 밀려오는 고독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나이 들어 고독한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다. 고대 사람들은 출생을 통해 새로운 육체가 깃들었던 영혼이 자신이 머물렀던 육체를 벗어나 다시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사람의 탄생은 육체에 영혼이 들어오는 것이었고, 죽음은 그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이었다. 때문에 고대인들은 영혼을 구름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혼(魂)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생관(死生觀)이 발전하여 장자가 말한 '생과 사는 하나'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 사상이 정립되었다.
고대의 중국 사람들은 영혼은 영원한 것이므로 다시 부활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죽으면 치르는 장례식의 기원은 바로 부활 의식이었다. 葬은 원래 풀숲에 시신을 묻는다는 의미의 글자이다. 고대에는 시신을 들판에 가져다 놓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장례법이 엇던 것이다. 문자는 그 탄생의 순간부터 신과 함께 했다. 왜냐하면 문자는 신과 교섭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문자가 신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사상의 수단이 되면서 문자의 세계는 종언을 고했다.
저자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는 1910년 후쿠이(福井) 현에서 태어났다. 국회의원 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상업학교 야간부에 다녔고 1933년 리쓰메이칸(立命館) 대학에 입학해 1935년 리쓰메이칸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44년 리쓰메이칸 대학 문학부 교수가 되었고 중국 문학사·갑골 금문학을 강의했다. 2006년 10월 30일 96세로 작고했으며 현대 일본의 마지막 석학으로 평가 받고 있다. 1984년부터 간행된 『자통(字統)』·『자훈(字訓)』·『자통(字通)』의 자서(字書) 삼부작은, 갑골문과 금문학의 성과를 집대성해 한자의 성립과 의미의 전개를 체계적으로 해설하고 고대 철학을 심도 깊게 다룬 대작으로 '시라카와 한자학'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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