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본인이 옥타비오 파스가 지은 『활과 리라』라는 시작이론서를 읽고 나서 인터넷 검색으로 우연히 오르페우스님의 블로그에서 『활과 리라』에 대한 해설글을 보고나서 시창작에 도움이 될 것 같이 퍼 담아 와서 여기에 올립니다.
책의 제목 『활과 리라』는 리라라는 악기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해 활을 사용해야 하고 서로의 긴장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옥타비오 파스가 책에서 말했듯이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치명적 도약’의 길”을 나타내는 말인 것 같기도 합니다.(최창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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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치명적 도약’의 길.
옥타비오 파스는 언어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시창작의 비밀을 찾으려고 했다. 시는 언어로 언어 너머를 표현한다. 옥타비오 파스가 말했듯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활과 리라 28페이지)” 언어는 어떻게 언어를 넘어서는 것일까? 시인은 이미지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길을 찾는다. 이미지는 감각과 어울린다, 감각은 이성(理性)으로 통제할 수 없는 사물의 감각을 가리킨다.
시인은 사물이 내보이는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무모한 일을 벌이는 존재이다. 언어로 사물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언어는 사물의 의미를 정확하게 드러낼 수 없다. 사물에 언어를 붙이면 사물은 이미 저 멀리로 도망가 버린다. 언어란 안간들의 약속체계일 뿐이지 않는가. 인간이 만든 언어로는 사물의 본질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시작(詩作)은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이루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이미지가 됨으로서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체계를 뛰어 넘는다. 시편(詩篇)은 말이고 역사이면서 역사를 초월한다.(활과 리라 29페이지)”고 주장한다. 시인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다. 이 땅을 벗어난 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땅에만 머물러 있으면 시인은 결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이 땅에 발을 디딘 시인은 이 땅을 넘어서는 모험에 나섬으로서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사물의 본질을 엿보는 존재가 된다.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를 사용하려면 시인은 벼랑에서 한 걸음 더 내 딛는 ‘치명적(致命的) 도약(跳躍)을 거쳐야 한다. 일상적인 자아를 넘어서는 자리에서 시인이 탄생한다. 치명적 도약을 거친 시인은 사물을 보는 시선부터 일반인과 다르다. 일반인이 볼 수 없는 것을 시인은 보고 일반인이 들을 수 없는 것을 시인은 듣는다. 그래서 시인은 말 그대로 세상을 열어젖히는 창조자인 것이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리듬 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우주적 상응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상응이 다름 아닌 리듬의 나타남이다.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재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포함한다. 즉 역으로 아날로지의 원리를 택하는 것은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의주의 시작(詩作)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활과 리라 94페이지).”
일상 언어와 시 언어는 리듬에서 분명히 차이를 보인다. 언어는 리듬으로 표현된다. 언어는 언제나 사람들의 일상과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물마다 독특한 리듬이 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리듬이 있고 돌에게는 돌의 리듬이 있다. 당연히 꽃의 리듬도 있고 비(雨)의 리듬도 있다. 시인은 저마다의 사물이 내보이는 리듬을 시 언어로 구현한다. 옥타비오 파스가 “리듬에 따르는 작시(作詩)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라고 주장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물의 리듬을 시인은 아날로지로 표현한다. 이육사의 ‘광야’에는 “가난한 노래의 씨”라는 시구가 나온다. 시인은 식민지시대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내놓는다. 가난한 노래의 씨는 자신을 희생하는 ‘씨’의 리듬과 이어져 있다. 땅속에 심은 씨는 자신을 죽임으로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 이육사는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을 ‘씨’라는 사물에 실어(아날로지. 비유, 유추) 새로운 삶의 리듬을 생성하고 있는 셈이다.
주]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