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33:20]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치지 아니할 것이며..."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그 줄이 하나도 끊이지 아니할 것이며 - 결코 정복되지 않는 도성 예루살렘은 그곳에서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축제(절기)의 성읍'(키르아트 모아테누)이라 불린다.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란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루살렘에 성소가 고정되기 전, 즉 광야를 떠들며 대적과 싸우던 불안정한 시절에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장막'이라는 협소하고 유동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장막은 본래 하나님의 거주하심을 상징하는 처소로 세워졌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거주하심'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거주한다'는 말은 성경적 의미에서 '친밀하게 연합함을 뜻한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는 자력으로는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제사드리는 행위를 통하여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과 백성의 참교제는 그런 연후에라야 허락되었다. 이 경우 성막은 동물의 피를 뿌려 백성의 만남이 실현되는 '친교의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성막은 언제나 12지파의 한 가운데 위치하였으며 그들과 더불어 진퇴를 같이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며, 와으로서 그들을 다스리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막은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의 모형론적인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새것이 옛것을 대신하고 실재가 그림자를 대신하는 그때에는 응당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시는
미래의 그날에는 '임마누엘의 원리'(21절)와 '신정의 이상'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구현될 것이다.
[사 33:21]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같을 것이라....."
여호와께서는...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거싱니라 - 참으로 '권능 있는자'는 예루살렌을 위협하는 앗수르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도성을 지키시는 여호와이시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면 그 도성은 큰 강이 빙 둘러서 아무라도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천혜의 요새들처럼 그 영구한 안전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
선지자는 아마도 유브라데 강에 둘러싸인 바벨론이나 나일 강에 둘렀인 애굽의 테베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사 33: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대저 여호와께서는 우리 재판장이시요...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권능으로써 도성을 방비하시는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거의 동일한 뜻을 가진 세 가지 칭호로 불려진다. (1)그는 우리의 재판장이시다. 그는 공의에 입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준열하게 판단하신다.
(2)그는 우리의 율법 수여자이시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따라야만 되는 삶의 규범을 제정해 주신다. (3)그는 우리의 왕이시다(말루케누). 그는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 그에게 현대적 의미의 입법권, 사법권, 행전권이 모두 속해 있다. 이는 그분만이 인생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전한 분이시며, 우리의 참된 주관자이시며, 우리의 유일 무이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사 33:23]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었고 돛을 달지 못하였었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 옛주석가들은 물론 현대의 많은 주석들까지도 21절의 '배'.앗수르를 가리킴의 표상이 본문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데는 큰 난점이 따르니, 다른 데서 앗수르가 항상 남성형으로 취급되는 반면, 본문의 '하발라이크의 어미는 여성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앗수르가 아니라 유다가 언급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낫겠다. 앞에서 승리자로 묘사되었던 유다가, 여기서는 정비조차 제대로 안 된 낙후한 배로 묘사된다. 그러나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뒤바뀐다. 유다의 결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앗수르에게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간명하다 : 승리는 외적인 조건에 달려 있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달려 있다.
[사 33:24]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