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靑山道)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 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 버린 하늘과, 아른 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 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해>(1949)-
해설
[개관 정리]
◆ 성격 : 산문적, 상징적, 서경적, 감각적
◆ 표현
* 자연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긍정적 시어와 비관적 현실의 부정적 시어들이 대조됨.
* 의성어와 의태어의 구사, 반복되는 어구
* 유장한 산문적 율조
◆ 중요 시어 및 시구풀이
* 청산 → 아름답고 풍요로운 생명력의 표상
* 우뚝 솟은 푸른 산,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
→ 푸른 색채로 강렬히 다가오는 푸른 산의 모습을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게 표현한
구절들
* 금빛 기름진 햇살 → 생명력 있는 건강한 햇살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표현
*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 비관적 현실 인식의 한 단면, 임의 부재에서 오는 고독한 분위기
* 2연 → 청산의 생명력과 함께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제시해 줌.
* 줄줄줄 → 물소리와 함께 눈물 흐르는 소리를 동시에 표현
* 만나도질 → 만날지도 모르는
* 볼이 고운 사람
→ 비관적인 현실세계에서 찾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 동경의 대상
서정적 자아의 고독감을 유발하는 소재
"무엇인가가 포괄적, 근원적인 면에서 민족과 인류를 구원할 수 있고,
현재와 미래를 평화롭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존재"
* 티끌부는 세상, 벌레같은 세상 → 혼탁하고 어두운 시대상황에 대한 비유적 표현
* 달가고 밤가고 눈물가고 → 어둠의 세계가 지나가고
*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 서정적 자아가 꿈꾸는 밝은 미래
*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 아우성 쳐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
→ 어지럽고 혼탁한 해방 이후의 세계가 반영된 표현으로 '탁류'에 비유됨.
* 철도 없이 → 혼란의 시대가 가고 평온한 시대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의
서정적 자아의 기다림
화자의 행동이나 기다림의 허망함이 엿보이는 구절
* 너만 그리노라 → 동경의 확고한 의지가 나타남.
◆ 주제 ⇒ 청산에서 맑고 순수한 임을 애타게 그리워함.
(밝고 건강하고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기다림)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청산의 생명력 넘치는 정경과 적막한 분위기
◆ 2연 : 청산에서 임(볼이 고운 사람)을 애타게 그리워 함
◆ 3연 : 청산에서 임을 간절히 기다림
◆ 4연 : 혼탁한 세상속에서 임을 기다리는 화자의 의지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의 화자는 청자인 '청산'에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호소하고 있다. 그 대상인 청산은 화자가 꿈꾸는 순수한 세계이지만, 한편으로는 고운 사람을 그리워하고 슬픔을 호소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연을 통해 순수한 평화와 광명의 세계를 노래하던 시인의 현실 인식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이 시가 해방 직후 쓰여진 점을 감안할 때, 해방의 신선한 희망을 담았던 <해>의 세계를 대신한 <청산>의 세계는 해방의 혼란한 물결 속에서 티끌과 벌레가 들끓는 혼탁한 산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밝은 햇살'과 '맑고 고운 사람'의 미래를 믿으며 위안을 가진다.
제1연은 이상적 공간으로서의 청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생명력으로 가득한 산의 모습과 밝게 내리쬐는 햇살, 그리고 푸른 하늘, 고즈넉이 들려오는 뻐꾸리 울음소리, 이것들은 모두 서정적 자아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세계의 표상이다. 특히 산은 정서의 객관적 상관물로 설정된 것이며, 그것을 통해 지고한 대상(볼이 고운 사람)에 대한 내적 지향 및 호소가 표출되고 있다.
제2연은 신선한 생명력으로 가득한 청산 속에서 과거에 잃어 버린 순수한 사랑과 그 사랑의 대상인 임을 떠올리면서 가슴 아파하는 심경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만나볼 수 있기를 간구하고 있다.
제3연은 임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의 표출로 감정의 고조를 보이고 있는 연이다. 티끌불고 벌레같은 세상에서 눈물짓고 있던 임에 대한 상념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눈물로 가득한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하늘의 빛나는 아침이 되면 아름다운 청산으로 달려올 임을 애타게 그리고 있다.
제4연은 자연과 인간의 대비 속에 오직 임만을 그리워하고 있는 시적 자아의 의지적 자세가 나타나 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연(청산), 그리고 아귀다툼하며 살아가는 인간세상, 이 상반된 질서 사이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메시아'로서의 임을 영원히 기다리고 그리워할 것임을 다짐하고 있다.
[작가소개]
박두진 : 시인
출생 : 1916. 3. 10. 경기도 안성
사망 : 1998. 9. 16.
데뷔 : 1939년 문장 등단
수상 : 1993년 제15회 외솔상, 1989년 제1회 정지용문학상, 1988년 인촌상
작품 : 도서 60건
호는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시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등을 발표하였다.
이화여대, 연세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1998년 타계하였다. 『청록집[공저]』(1946), 『오도(午禱)』(1953),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하얀 날개』(1967), 『고산식물』(1973), 『사도행전』(1973), 『수석열전』(1973), 『야생대』(1981), 『포옹무한』(1981) 등의 시집을 발간하였고, 1984년에는 범조사에서 『박두진 전집』을 간행하였다. 이외에도 수상집으로 『생각하는 갈대』(1970), 『언덕에 이는 바람』(1973), 『그래도 해는 뜬다』(1986)와 시론서 『한국현대시론』(1970),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1976) 등이 있다.
아시아자유문학상(1956), 서울시문화상(1962), 3‧1문화상(1970), 예술원상(1976) 등을 수상하였다. 박목월‧조지훈과의 공저인 『청록집』은 일제 말기 한국인의 겨레 인식과 저항적 자세를 주로 자연을 제재로 하여 시화하고 있다. 「향현」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침묵 속에 지내온 산에서 힘차게 치솟아 오를 저항과 창조의 불길을 예기하는 시상을 드러내어 일제 치하의 암울함을 의기(意氣)로써 이겨내는 분노의 서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의식은 일제에 의해 민족주체성이 훼손되었다는 인식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저항 의식에 기반한 것이다. 「묘지송」에서도 죽음의 의식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예견하는 햇빛을 노래하여 조국의 미래를 소생케 하는 늠연한 기상을 종교적 의미까지 함축하면서 드러내었다. 또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부정적 힘에 대한 정면 대결의 시상을 펼쳐보여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평화 공존을 형상화한다.
박두진의 초기시는 이처럼 전통적인 여성적 정한(情恨)에서 벗어나 남성적인 기개(氣槪)를 시화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작품에 수용된 자연은 근원적으로는 순응과 화합의 지혜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창조적 결단성이나 생성의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 해방 후에 쓰여진 「해」는 신생 한국의 창조적 의지를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후 『하얀 날개』에 이르기까지 박두진은 시대의 부정적 가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다루면서, 이념적으로는 절대적 가치의 추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가치 추구의 정신을 바탕으로 그의 후기 시편들에서는 세속적 삶을 순화하며 혁신하는 자세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즉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야생대』, 『포옹 무한』 등에 걸쳐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며 그것을 희생적으로 극복해 가는 시적 자아의 의기와 함께 구도적 정신의 높은 표적을 향한 시심의 심화를 보게 된다.
<경력사항>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연세대학교 교수
<수상내역> 1956년 아시아 자유문학상, 1962년 서울시문화상, 1970년 3‧1문화상,
1976년 예술원상
<작품목록>
청록집, 해, 현대시집 Ⅲ, 오도, 박두진시선, 시와 사랑-자작시 해설,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 한국현대시론,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속‧수석열전,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
야생대, 예레미야의 노래, 포옹 무한, 해, 박두진전집, 해, 박두진 시집,
박두진-한국현대시문학대계 20, 박두진 전집, 그래도 해는 뜬다, 별들의 여름, 돌과의 사랑
돌의 노래, 불사조의 노래, 성고독, 일어서는 바다, 가시면류관, 들의 노래, , 서한체
빙벽을 깬다, 폭양에 무릎 꿇고, 고향에 다시 갔더니, 숲에는 새 소리가,
시적 번뇌와 시적 목마름, 한국 현대시 감상, 낙엽송, 도봉, 청산도, 향현, 묘지송, 비
[네이버 지식백과] 박두진 [朴斗鎭]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첫댓글 산마루 골짜기 푸른 언덕 흐르는 물결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기온이 30도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가을이 오고 있네요.
오늘도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