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6. 18 육군본부 인사명령 제202호에 의거 전남 광주에서 창설(창설 기념일은 9. 18)
- 초대 사단장 : 이형석 소장
- 구호 :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순수 한국어 구호이자 3음절인 "이기자"이다.
- 주된 임무 : 강원도 화천 전방지역 일대를 수색 및 경계하며 남침에 대비한다.
- 표어 : 중부전선의 수호자 , 조국 통일의 선봉장
- 이기자의 의미 " 무적필승 / 선승구전 이란 표어를 이겨놓고 싸운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1965년 1월 10일 :비둘기 부대 창설(101경비대대)
- 주요 지휘관 : 제3대 김계원 준장
제34대 전인범 소장
어느 전역 장병의 "추억록 헌장"
1. 우리 말년은 추억록 작성에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2. 추억록이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30개월 이상 필한자에게만 작성 권한을 부여한다.
3. 30개월 이라하 쫄병은 고참 추억록 작성에 적극 호응한다.
4. 본 추억록 열람은 현역병과 만기제대한 향토예비군에 한하여 열람을 허용한다.
5. 본 추억록 보존기간은 영구 보존한다재미있는 추억록 헌장입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제대 삼일 앞 둔 말년에 군장지고 뺑뱅이 돌았다.
낙엽도 피해 간다는 말년에 휴양지에서 쉬고 있는데 친한 소대원들이 신참들에게 정비를 맡기고 비밀창고에 있는 술을 들고 온것이다.
하필 그 시간에 인사계님이 본 것이다.
군 지휘 종합검열이 내일인데 내가 봐도 군기교육대 감이다.
모든 정비를 끝내고 마지막이 될 이기자 77연대 전투지원중대 연병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제대 하는 날 인사계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노 병장이 마지막 구세대 병장인 것 같네" 사회에 나가서 군 생활 처럼 잘하게!
그 당시 나이도 많으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보병 제27사단 이기자 부대 77연대 전투지원중대에서 군 생활을 마쳤다는 사실이 난 자랑스럽다.
재작년 부대방문을 했을 때 후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활과 환경이 많이 변했지만, 결국 군 생활이란! 형태와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걸어온 사람이나 걸어가는 사람이나 걸어갈 사람이나 시간과 젊음은 똑같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전인범 소장 생각하면 가슴이 짠합니다 어머니님 외교관이라 아마도 우리나라 지휘관중에서는 제일 영어 실력이 좋을듯합니다 특전사령관을 마지막으로 전역하고 부인 심화진 여사의 성심재단 사건으로 모든 직에서 내려놓는 장면을 보면서 그 사건이 아니였으면 아마도 지금쯤 군 요직에서 한자리를 하셨을듯 합니다 우리 아들 녀석이 27사단 출신이라 감회가 새롭네요
저는 1971년도 2월초에 27사단 전차중대로 자대배치 받고 근무했습니다. 당시 윤흥정소장이 사단장이었는데 27사단 소속 모두가 화천을 중심으로 있었는데 저희 전차중대만 멀리 떨어진 춘천(당시에는 춘성군) 신포리에 있어서 사단의 텃치가 없고 중대장이 모든 권한 다 가지고 있어서 거의 항상이다 싶이 가족적인 분위기로 재미있는 군생활이었지요.
특과병이라고 항상 특식이 나왔고 평소에도 특과병이라고 부식이 좋았지요. 더구나 중간에서 빼먹는 군간부들이 없어서 지급된 부식과 특식이 그대로 나왔지요. 1972년도 10월에 수기사 창설멤버로 전출 가서 근무하다가 1973년도 8월2일에 만기전역 했습니다.
이기자부대에서 최근에 복무하신분 계시나요? 1971년 6월에 보 전 포 (보병 전차 포병) 훈련을 화천 전방에서 했었는데 당시 사단의 훈련 책임장교의 잘못으로 저하고 절친한 전우 두사람이 순직 했습니다.
저의 중대가 모두 간것은 아니고 우리 1소대만 가서 우리측에서는 소대장이 책임자였는데 그당시에 장맛비가 계속 와서 땅이 물러진 상태라서 지금 탱크는 기동하면 사고 날 위험이 있어서 탱크는 움직일수 없다고 하는데도 사단의 훈련책임 장교가 소대장보다는 하늘같이 높은 계급으로 지시하니 어쩔수 없이 탱크를 기동 시켜서 훈련중에 물러있는 흙이 주저앉으면서 탱크가 꺼꾸로 넘어지는 바람에 전우 두사람이 순직했습니다.
그중 한전우는 전우애가 깊고 사명감이 투철하다고 사단 사령부앞에 있는 다리를 새로 튼튼하게 신설하면서 그친구의 이름인 일광교라고 다리 이름을 적었었답니다. 지금도 일광교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이름으로 바뀌었는지 궁금하네요.
6월6일 현충일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있는 두 전우의 묘소에 참배하고는 한답니다. 그리고 지금도 40년이 지나고 거의 50년이 되어 가는데도 몇사람의 당시 전우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저희때는 6171부대가 이기자 부대였는데 안바뀌었나요? 당시 편지가 아직 저에게 있어서 가끔 추억을 되새겨 봅니다
첫댓글 추억록의 내용이 엄청 재미있습니다.
비록 국방의 의무로 군 복무 했지만,
이런 아름다운 추억도 많이 있습니다.
결코 헛되지 않았기에
이렇게 대한민국은 님 들 때문에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기자 부대에서 복무하신 카페 친구여러분!
이 청춘방에서 마음껏 추억담을 이야기 하며 즐거눈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맹호
전인범 소장 생각하면 가슴이 짠합니다 어머니님 외교관이라 아마도 우리나라 지휘관중에서는
제일 영어 실력이 좋을듯합니다 특전사령관을 마지막으로 전역하고 부인 심화진 여사의
성심재단 사건으로 모든 직에서 내려놓는 장면을 보면서 그 사건이 아니였으면 아마도
지금쯤 군 요직에서 한자리를 하셨을듯 합니다 우리 아들 녀석이 27사단 출신이라
감회가 새롭네요
진시몬 님! 안녕하세요.
얼마 전 만 하더라도 사상 유례없이 덥더니만, 조석으로 시원한 초가을의 날입니다.
어젠 도봉산엘 다녀왔는데 골바람 능선바람이 맑은 하늘과 함께 시원한 쥬수 역활을 하더군요.
아들이 이기자에서 근무했군요. 대견한 아들입니다.
욱체적으로 어느 전방 사단보다 힘든 부대라고 소문이 많이 나 있더군요.
이동 백운계곡을 넘으면 광덕리에서 조금 더 가면 부대가 있죠.
전인범 사단장은 메스컴에도 많이 오를 만큼 훌륭한 장군이더군요.
삼성 장군까지 했으니 능력의 장군입니다.
지난 번 엄기학 전 3군 사령관과 육사 동기더군요.
전우회 활동하면서 가끔 만났던 엄 장군과 함께 동기생들도 출중하구요. 맹호
저는 1971년도 2월초에 27사단 전차중대로 자대배치 받고 근무했습니다.
당시 윤흥정소장이 사단장이었는데 27사단 소속 모두가 화천을 중심으로 있었는데
저희 전차중대만 멀리 떨어진 춘천(당시에는 춘성군) 신포리에 있어서
사단의 텃치가 없고 중대장이 모든 권한 다 가지고 있어서
거의 항상이다 싶이 가족적인 분위기로 재미있는 군생활이었지요.
특과병이라고 항상 특식이 나왔고 평소에도 특과병이라고 부식이 좋았지요.
더구나 중간에서 빼먹는 군간부들이 없어서 지급된 부식과 특식이 그대로 나왔지요.
1972년도 10월에 수기사 창설멤버로 전출 가서 근무하다가
1973년도 8월2일에 만기전역 했습니다.
이기자부대에서 최근에 복무하신분 계시나요?
1971년 6월에 보 전 포 (보병 전차 포병) 훈련을 화천 전방에서 했었는데
당시 사단의 훈련 책임장교의 잘못으로 저하고 절친한 전우 두사람이 순직 했습니다.
저의 중대가 모두 간것은 아니고 우리 1소대만 가서 우리측에서는 소대장이 책임자였는데
그당시에 장맛비가 계속 와서 땅이 물러진 상태라서 지금 탱크는 기동하면 사고 날
위험이 있어서 탱크는 움직일수 없다고 하는데도 사단의 훈련책임 장교가 소대장보다는
하늘같이 높은 계급으로 지시하니 어쩔수 없이 탱크를 기동 시켜서 훈련중에
물러있는 흙이 주저앉으면서 탱크가 꺼꾸로 넘어지는 바람에 전우 두사람이 순직했습니다.
그중 한전우는 전우애가 깊고 사명감이 투철하다고 사단 사령부앞에 있는 다리를
새로 튼튼하게 신설하면서 그친구의 이름인 일광교라고 다리 이름을 적었었답니다.
지금도 일광교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이름으로 바뀌었는지 궁금하네요.
6월6일 현충일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있는 두 전우의 묘소에 참배하고는 한답니다.
그리고 지금도 40년이 지나고 거의 50년이 되어 가는데도
몇사람의 당시 전우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저희때는 6171부대가 이기자 부대였는데 안바뀌었나요?
당시 편지가 아직 저에게 있어서 가끔 추억을 되새겨 봅니다
경운산 님.
하세요

일리에 주둔 합니다. 기호는 모르구요.

거운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맹호

`
요즘은 조석으로 날씨가 시원해 살 맛 나는 날이 계속 이어지고 있네요.
군대에서는 알게 모르게 여러 사고가 많이 나는군요.
작전과 교육 받다가도 나고, 안전사고도 많이 나죠.
아까운 전우 두 분을 잃으셨군요.
지금은 광독고개 넘어 화천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