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6년 다해 10월30일 주일 [(녹) 연중 제31주일]
[수도회] 자존심을 버리고 거룩한 자존감을 되찾을 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지혜 11,22─12,2
○ 제2독서 2테살 1,11─2,2
† 복음 루카 19,1-10
죄인 취급을 받던 세관장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고 가진
재산을 나눕니다. 지혜서 저자의 고백이 화답처럼 들립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탈선하는 자들을 조금씩
꾸짖으시고, 그들이 무엇으로 죄를 지었는지 상기시키며 훈계하시어,
그들이 악에서 벗어나 당신을 믿게 하십니다.”
◈ 오늘의 묵상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자캐오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며 마침내 완성하고자 하시는 구원 업적의 예표와도 같이
묘사됩니다. 유다인들의 선민의식은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율법 규정에 따라 철저하게 지켜지고 강조되었습니다.
율법에 어긋나는 삶을 살거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아예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하느님의 구원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자캐오가
로마의 지배하에 세금 징수 업무를 위임받아 제국의 압제자 노릇을
했다는 것만으로 그가 받은 멸시와 비난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민족에게서 외면당한 자캐오라고 해서 위대한 예언자, 메시아로
칭송받던 예수님을 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먹고살려고 지배
세력에 협력하고 있지만, 그 불편한 마음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냥
예수님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무화과나무에 올라 자신을 쳐다보는 자캐오의 속마음을
읽어 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내려오라’는 말 속에는 그의
욕심, 자책감, 상처를 버리라는 요청이 들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금기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머물기까지 하십니다.
구원은 바로 이런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했듯이, 그토록 소중한 재산을
내어놓겠다고 선언하는 자캐오의 마음에는 주님의 ‘불멸의 영’이
살아 있었고, 그 영을 일으켜 주신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오늘’ 구원을 선포하고,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선언하십니다.
자비는 이렇게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넘어선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예수님을 만나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2016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1주일
제1독서
"주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십니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1,22─12,2
제2독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2서 말씀입니다. 1,11─2,2
복음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10
경영학을 전공한 어떤 청년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백화점을 지원해서
얼마 뒤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정말로 들어가고
싶었던 백화점이었거든요. 그리고 첫 출근 날이 되었습니다. 경영학을
전공했으니 당연히 경영부서에 보직을 받을 줄 알았는데, 글쎄 승강기
안내를 맡으라는 것입니다.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승강기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곳이 아닙니까? 따라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겨우 이런 일을 하려고 대학을 졸업했냐는 이야기를 들을 것만
같아서 창피할 것만 같았습니다. 실제로 같이 승강기 안내를 맡은
사람은 곧바로 이따위 일은 할 수 없다면서 그만두었습니다.
이 청년은 고민하다가 이 일을 기꺼이 감당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긍정적인 부분만을 생각했던 것이지요. 안내를 하면 고객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구매 심리를 직접 현장에서 파악할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이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얻고 있다는 생각에 고객을 왕으로 섬길
정도로 더욱 더 친절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객들에게
인정받은 이 청년은 얼마 안 가서 부서 책임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이
백화점의 최고 경영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백화점 왕
페니(JC Penny)의 이야기였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사업가이자 투자가로 불리는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성공이
빗나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일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일 안에서 의미와 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찾을 수 없다면 아무리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일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의미와 비전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일, 고통과 시련을 느끼는 순간 역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중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세관장 마태오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국노라는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세금을 걷어서 당시 지배를 하고 있었던 로마에 바치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소식을 듣고 한 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내주지 않습니다. 작은 키는 군중들
너머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볼 수도 또 만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캐오가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세관장까지 올랐으면 나이도 꽤 되었을
텐데, 그는 체면 불구하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오릅니다. 그리고 이
행동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 구원의 영광을 얻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한계에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노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자신의
체면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만나는 것에 의미와
비전을 두었으니 힘들고 부끄러워도 기꺼이 행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얼마나 의미와 비전을
담으면서 살고 있었을까요? 주님을 도저히 가까이 하기 힘들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주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의미를 두지 않았던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신념과 인내는 성공의 계단이다(JC. 페니).
자캐오가 올라갔다는 돌무화과나무
너무 고르지 말자(‘따뜻한 하루’ 중에서)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 중에는 결혼을 앞둔 여성들에게 이색적인
행사를 하는 부족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참가 여성들이 각각 옥수수
밭에 한 고랑씩을 맡아 그 고랑에서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를 따가지고
오는 여성이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사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한번 지나친 옥수수 밭의 옥수수는 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거다.” 싶을 때 옥수수를 따가지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땄으면 도중에 좋은 것이 있다고 해서 바꿀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신중했을까요?
이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옥수수 밭에서 여성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여성들이 들고 나온 옥수수는 얼마나 크고 좋은
것일까요? 하지만 그녀들은 아주 풀이 죽은 모습으로 작고 형편없는
옥수수만을 들고 있더랍니다.
왜 크고 좋은 옥수수를 가지고 오지 못했을까요? 더 좋은 것이 눈에
보여서 차마 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좋은 것이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앞으로 가다보니 결국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완벽함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후회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내 사람을 찾고, 내 일을 찾으면서 우리들은
완벽함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 완벽함은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의미와 비전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완벽한 내
사람을 그리고 완벽한 내 일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갑곶성지 팜플렛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자존심을 버리고 거룩한 자존감을 되찾을 때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1주일 루카 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자존심을 버리고 거룩한 자존감을 되찾을 때
오늘 복음은 자캐오가 예리코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입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는 부와 권세를 누렸기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 권세와 재물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견고히
쌓아왔기에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듯 했겠지요. 키가 작은(19,3)
자캐오는 자기 기준으로 키우고 지켜온 자존심은 컸지만 하느님
앞에서의 '거룩한 자존감'은 매우 낮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저 깊은데서부터 거룩함의 빛을 갈망하게 되어 예수님께로 다가갑니다.
사실 자존심과 자존감 둘 다 자신을 좋게 평가하고 사랑하는
마음이지요. 그러나 자존심은 남과의 경쟁 속에서 얻는 긍정적
평가나 의식이기에 패배하면 한없이 곤두박질 칩니다. 한편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한 확고한 사랑과 믿음이기에 상황에 따라
급변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거룩한 자존감'은 하느님 때문에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주님의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있기에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모두를 소중히 여기심'(지혜 11,26; 12,1)을 늘
기억해야겠지요. 아마도 그것을 망각한 채 살아오던 자캐오는 깊은
번뇌와 불안 속에 살아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던 그가 "지나가시던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19,4) 벌써 그는 자존심을 벗어던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체면도 권세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보는 것에 몰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머물겠다 하시니 그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맞아들입니다."(19,6) 자기 중심의 자존심을 버리고
주님을 영접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존감을 회복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오로 사도와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주시기를"(2테살 1,11)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자캐오처럼 이기적인 자존심을 버리고 거룩한
자존감을 회복할 때 비로소 주님과 일치하고 영적 통합이 이루어지며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관념적으로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린 것이 아니라 세관장 시절의
어두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남의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함으로써(19,8) 정의를
실현한 자캐오를 본받아야겠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 가득한
눈길을 떠올리며 사랑과 정의를 실행함으로써 자존감을 회복하도록
해야겠지요.
참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거든 현세의 것들을 이용해 자기 품위를
들어높이고, 남이 나를 인정해주고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자캐오처럼 주님께 눈길을 돌림으로써 자신이
참으로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거룩한
자존감을 회복하여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주님 안에서 거룩한 자존감을
회복하는 기쁘고 복된 날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그분으로 인해 찬란한 봄날이
2016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1주일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그분으로 인해 찬란한 봄날이
혹시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출구 없는 막장 끝에 서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돌아보니 저는 젊은 시절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그런 진한 체험을 했던 기억이 아프지만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보아도 어망에 갇힌 물고기처럼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딴에 자존심은 강하가지고 그 누구에도 도움의
손길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한없이 약해진 제 모습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갔습니다.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짙은 회색빛이었습니다. 아침이 오는 것이
그리도 싫었습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아침은 밝아오고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살아야하나? 오늘 하루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어디로
숨어야하나?’ 걱정하는 것이 하루의 주된 일과였습니다. 그렇게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없이 하루하루를 소진해가던 제게 누군가가
기적처럼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드냐? 얼마나 아프냐?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다면 아프다고 이야기를 하라고!”
저는 그때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의 목소리는 바로 주님을
대신한 목소리였다고. 그때 저를 찾아와주신 분은 바로 주님이셨다고.
저는 그 고마운 분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깊은 무덤으로부터 벗어나는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자존심상하고 부끄러운
사생활인데 밝히는 이유는 이런 사랑의 스토리가 우리 사이에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들 난다 긴다 하지만 너나할 것 없이 우리는 나약하고 측은한
존재들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기를 쓰고 자신을 포장하고
과대평가하지만 돌아서면 허전해서 눈물 흘리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필요한 것이 누군가를 죽음의 구렁에서 건져내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한마디입니다 진심어린 위로의 몸짓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 역시 유사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작음’이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 기를 쓰고 발버둥친 결과가
어둠의 세상 가장 끝에 서게 되었습니다. 반역자, 매국노,
고리대금업자의 대명사 세관장! 하는 일은 뻔했습니다. 로마에
정기적으로 할당액을 상납하려다보니 말단 세리들에게 눈을 부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갖은 협박과 권모술수를 통한 착취의 전문가가
되어 이 바닥에 이름난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돈을 갈퀴로
낙엽 끌어 모으듯이 모았습니다. 현찰보유액이나 부동산 소유
면적으로 따지면 유다 고관대작 못지않았습니다. 물질적으로 아무런
아쉬움 없이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에겐 친구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물론 다들
앞에서는 굽신굽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러나 뒤돌아서서는
‘저런 천하의 난봉꾼,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 제일 먼저 지옥 불에
떨어질 놈.’하며 수군거렸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상흔처럼 온 몸과
마음에 새겨진 제 깊은 콤플렉스, 엄청난 부자가 되면 해결되겠지
생각했습니다. 이 참혹한 열등감, 깊이를 알 수 없는 욕구불만,
억만장자가 되면 충족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돈은 물론이고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참으로 혹독하고 비루한 삶,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대체 뭔가...
하며 깊은 좌절에 빠져있던 그의 눈앞에 정말이지 꿈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분’께서 자캐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꿈에도
기대하지 않던 뜻밖의 선물이 그의 손에 쥐어졌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분으로 인해 찬란한 봄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동안 이
세상 그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로 도둑놈,
매국노, 난장이. ‘저 인간’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황홀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셨습니다. “자캐오야!”
스산했던 자캐오의 계절이 지나가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따뜻한
봄날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이렇게
다짐합니다. “저를 찾아와주신 주님, 이제부터 저는 새 삶을 살렵니다.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복음 19장 9~10절)
진정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뿐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상담심리의 대가셨던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꿰뚫고 계셨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한 사람, 다정한 친구 한명이
필요했습니다. 별명이 아니라,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욕설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자캐오 사건은 정녕 희망의 복음입니다. 자캐오 못지않게 숱한 죄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희망과 새로운 기대감을 안겨주는 기쁨의
복음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를 부르듯이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비록 우리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그분의 자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31주일
2016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1주일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안경을 새로 했습니다. 멀리 있는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길가의 도로 표시도, 상점의 가게도 잘 보입니다. 마치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컴퓨터 모니터의 글자 크기를
100에서 125로 바꾸었습니다. 모니터의 글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훨씬 편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경의 도수를 바꾸고, 모니터의
글자 크기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선명하게 볼 수 있고, 컴퓨터
작업도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책을 통해서 새로운 이치를 깨닫는 사람, 새로운 과학의 법칙을
발견한 사람, 신앙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은 사람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울까요? 사람은 독수리처럼 높이 날지 못합니다. 곰처럼
힘이 세지 못합니다. 고래처럼 물속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생각을 할 수 있고, 이치를 깨달을 수 있고, 법칙을 통해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비행기로 독수리보다 더 높이
날게 되었습니다. 포클레인으로 곰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더 먼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작은 능력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키가 작았던 자캐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노력과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꺼운 마음으로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만일 자캐오가 키가 작다는 현실 앞에서 포기하거나, 좌절했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집과 가족은
구원을 받았다.’라는 축복의 말씀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은
‘키가 작았다.’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단순히 키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점, 장애, 나쁜 습관, 열등감,
두려움입니다.
유대인들은 키가 작고, 돈이 많았던 세리 자캐오를 죄인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조롱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돈은 많지만 그것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크기가 작아서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직 ‘돈, 명예, 권력’이라는
불꽃으로 날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캐오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주님을 만난
자캐오는 삶의 태도가 변했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으며 이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었으며, 자신이 빚진 것을 갚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진정한 삶의 태도입니다.
자캐오는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첫째
그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의 열망은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졌습니다. 둘째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집에 하루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자캐오는
이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자신의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었습니다. 자신이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이웃을 위해서 절반을 나누겠다고 하였습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서 하루 지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매일 미사를 통해서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기 때문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성서공부를 하고, 매일 주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자신의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연말이 되면 이웃을 위해서
가진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기 때문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신앙생활의 3박자를 모두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자캐오의 신앙은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열망이 바로 기도입니다. 자캐오의
신앙은 주님의 말씀으로 자라나고, 굳어졌습니다. 자캐오의 신앙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눔으로써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위한 3박자 신앙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때가
언제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의 삶에 충실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비참을 찾으시는 주님
2016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1주일
<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복음: 루카 19,1-10
과거의 잊혀진 기억을 되짚어가는 영화 ‘백트랙’의 줄거리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잠깐 눈을 판 사이 딸이 교통사고로 죽은 아픔을
겪고 있는 신경쇄약증이 조금 있는 정신과 의사 피터입니다. 자신을
찾아와 상담을 받는 환자들은 모두 따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1987년의 오랜 과거만을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상담 받던 한 우울증 걸린 여자가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야!”라고 하며 자기를
공격하려 덤벼드는 꿈을 꾸게 됩니다. 이에 갑자기 자신 환자들의
기록을 살펴보니 모두가 1987년 7월 12일 피터의 고향에서 발생했던
기차사고의 희생자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죽은 이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피터는 고향으로 내려가 당시의 일을 기억 해보려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잊혀진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사춘기 때 자신과 친구가 산
속 자동차에서 남녀가 둘이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그
장소로 갔을 때였습니다. 그들이 자전거를 기찻길에 세워 놓았었는데
그만 기차가 그 자전거를 밟고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마치 유령처럼 자신에게 살아있는 감정을 주지
못했던 이유는 당시 그 죽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잊어보려고
하며 살아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옆을 보니 열차 선로를 바꾸는 작은 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또 하나의 기억. 기차가 전복되고 난 후 그 작은 집 안을
보았더니 경찰이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한 고등학생 여자아이를
폭행하고 있었고 그 아이가 살려달라며 몸부림치다가 선로를 바꾸는
레버를 당겼던 것입니다. 기차는 피터와 친구의 자전거 때문에 전복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가 한 여자아이를 폭행하다가 생긴
사고였던 것입니다. 피터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기억을
지우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결국 그에게 나타났던 혼령들이 이 모든
일의 책임이 피터가 아니라 아버지였음을 알게 되고 그를 징벌하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현대 신앙인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 ‘왜 뜨겁지 못한
걸까?’를 생각하다가 찾아낸 해답은 바로 ‘자신의 비참함을 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피터는 자신의 비참함을
보려하지 않고 이웃을 대하니 행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 굉장한 부자가 망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재산이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싼 가격에
사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경매를 담당하던 사람은 값이 가장 안
나가는 것부터 경매에 내놓기 위해 부자의 물건들을 뒤졌습니다.
마침내 한 구석에 먼지가 쌓은 낡은 바이올린 케이스가 보였습니다.
먼지를 털고 안을 열어보니 있어야 할 것은 다 있었습니다. 가격을
5만원부터 불렀습니다. 아무도 사려하지 않았습니다. 4만원. 3만원.
2만원. 만원으로 내려갔는데도 그것을 원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그 바이올린을 가만히 지켜보던 한 백발노인이 앞으로
나오더니 그 바이올린의 선을 조이고 음을 조율한 다음 정말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를 시작하였습니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버려진
바이올린에게서 그런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결국 그 바이올린은 그 값을 인정받아 5백만 원에
팔렸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십니다. 어떤 것이 그 값이 치러지지 않는 것을 볼 때
당신이 나서시어 그 합당한 값이 치러지도록 도와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그분의 도우심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만함을 지닐 위험성이
가장 많은 이들이 모태신앙들입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강요로 큰 죄를 지어본 적이 없습니다. 성당이라도 빠지면 매우 큰
벌을 받습니다. 5백 원짜리 과자를 훔치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5만원어치보다 더 크게 혼이 납니다. 그래서 그런 삶을 사는
이들은 특별히 큰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작은 죄도 충분히 보속을 했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이 나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겉으로는 안 그럴지라도 속으로는
예수님은 죄를 많이 짓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주님 앞에서 합당한 사람으로 설 수 있다고 믿기에
주님은 그 사람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비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는 돈을 쫓는 사람의 대명사인 세리였습니다.
돈이 자신을 이 세상에서 무언가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꼈다면 그가 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을
보려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에서
비참을 발견하였습니다. 돈과 쾌락에 신물이 납니다. 자신이 쫓던
모든 것들이 자신을 배신하여 더 이상 꿈쩍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아니면 그 비참함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시는 이유는 그 비참함을 쉽게
발견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돌아온 탕자에서 큰아들처럼 죄를
짓지 않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죄를 지어보고 그 죄의 노예생활에서
제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 비참함을 발견한
동생이 주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비참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마치
아버지처럼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 바로 내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뱀이, 그 자아가 나를 세상에 집착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고통을 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벗어날
힘이 없음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비참함을 온전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바오로는 자신의 비참함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3-24)
이렇게 자신의 비참함을 토로하는 이에게 주님께서 참 위로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비참함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없애주시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내 안에
그 비참함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 영영 문을 열어주지 못하게 됩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대화를 하던 사마이라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시며 그 여자가 남편에게서 행복을 발견하려고 했지만 결국 다
허사였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처럼 비참은 주님을 만나기 위한 지참금처럼 소중한 보물이
됩니다. 이렇게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접근불가의 무엇이 되십니다. 자캐오는 키도 작고 주님께도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의 비참함을 주님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으로
표현했고 예수님을 당신으로 그 비참함을 벗어나라는 자캐오의 마음을
본 것입니다. 이에 바오로도 이렇게 주님을 찬미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내 비참함을 모르면 감사도 나올 수 없습니다. 나를
어디에서 구했는지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나의 비참함을
더 크게 깨닫고 주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는 시간입니다. 이에
의로우면서도 모든 고통을 받고 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의로워지기 위해 반드시 우리가 잊고 있었던 비참함을
절실하게 느끼려는 노력을 해야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제가 유죄라면 저에게는 불행이고 무죄라 해도 머리를 들 수 없을
것입니다. 수치로 가득한 저는 저의 비참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욥 10,15)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