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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묵상글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병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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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14 03:22
-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병을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어제 복음은 백 마리 양 가운데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인데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를 타이름으로써 그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라고 하시고,
그래도 안 되면 둘이 타이르고 최종적으로는 교회에 알려서 고쳐주라 하십니다.
어제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서라도 한 마리를 찾으라고 하심과 같이
한 사람을 구하는 데 온 공동체가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한 사람이 잘못하면 저의 누나들 모두를 혼내셨답니다.
특히 동생이 잘못했을 때 애꿎게 언니들이 같이 혼났는데 그것은
언니가 되어 가지고 동생의 잘못을 막지 않은 것 때문이었답니다.
이것은 저의 아버지만 그러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거의 모두 이렇게 자녀를 교육했지요.
예를 들어 동생이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데
그것을 본 형이 그런 동생을 놔두고 저 혼자 돌아왔다면
그 얘기를 들은 어느 부모가 그런 놈을 가만 놔두겠습니까?
제가 아버지라도 그런 놈은 무지막지하게 혼쭐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육을 제대로 받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 모르는 체할 형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 만약 모르는 체한다면
그것은 무관심하기에 어떻게 되든 관심 없거나
미움, 질투, 시기 등으로 형제가 잘못되기를 바라거나
아무튼 사랑하지 않기에 모르는 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영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입니다.
육체적이나 경제적으로 형제가 잘못되었을 경우 그러니까
형제가 병들거나 부도가 나서 쫄딱 망하게 되었을 경우는
그것을 딱하게 여기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데
죄를 지을 경우,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을 경우,
이 경우에는 이상하게도 연민을 가지기보다는 분노하고 미워합니다.
사실 육신이 병든 것보다 영혼이 병든 것이 더 불쌍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죄를 지은 것,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을
영혼의 병이라고 생각지 않기에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병인 죄를 육신의 병보다 더 안타깝게 생각하고,
더 고쳐주려고 해야 하고 어떻게든 그러니까 혼자 안 되면
둘이서, 둘이서도 안 되면 공동체적으로 고쳐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합니다.
죄도 병입니다.
아니 죄가 더 안타까운 병이고,
죄야말로 신자인 우리가 더 고쳐줘야 할 병입니다.
나한테 죄지은 것이 영혼의 병 때문이라고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다면
그의 죄 때문에 같이 미워하고 분노하기보다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害)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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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직무를 맡는 도중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직무에서 오는 열정과 성취감을 잃어버리는 증상, 곧 정신적 탈진을 소위 ‘번 아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번 아웃을 가장 많이 겪는 직업군 1순위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는 서비스업 종사자일까요? 아니면 잠도 자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는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일까요? 또 일의 강도가 심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사람일까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전업주부라고 합니다.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전업주부는 자기가 일의 강도와 시간을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번 아웃은 일의 강도와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노동량에 따른 보상 정도에 따라 번 아웃이 온다는 것입니다. 주부는 노동량 대비 보상이 가장 적은 집단이었습니다.
보상은 단순히 급여의 많고 적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을 때, 일에서의 느끼는 보람을 느낄 때 보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 삶에서 누군가에게 충분히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을 통해 얼마든지 힘이 되어 주고, 이에 따라 자기 역시 다른 이에게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로운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했을까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사랑을 거둬들이고,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해서 단절을 해버리고, 나보다 뛰어나다면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힘을 쓰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구원되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형제자매를 고쳐 주려고 서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올바르고 지혜롭게 그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보다 둘이나 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음을 합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잘못했다고 거부하는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하는 사랑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외로운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우리의 결정이고, 또 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완벽한 사랑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큰 박수로 응원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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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음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진실된 사랑은 없다(조지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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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형제간의 교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혹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고쳐주어야 하는가?” 하는 교정방법과 절차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을 네 단계로 제시해 줍니다.
<첫째>는 혼자 단독으로 하는 교정이여, <둘째>는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교정이요, <셋째>는 교회를 통한 교정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을 통한 교정입니다.
이를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규칙> 23장~30장에서 이렇게 다룹니다.
“우리 주님의 명령에 따라(마태 18,16-17), 그의 장로들이 한두 번 그를 남몰래 훈계할 것이다. 그래도 고치지 않거든 모든 이들 앞에서 공적으로 책벌할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해서도 고치지 않거든, 파문이 어떤 벌인지를 아는 경우에는 파문에 처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고 둔한 자일 경우에는 육체의 벌에 처할 것이다.”(수도규칙 23,2-5)
<복음>이나 <베네딕도 규칙서>에서 다 같이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잘못한 형제에 대한 형식적인 교정방법이나 절차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곧 서로를 형제요,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마음이요, 타인을 ‘남’이라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에서 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정’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이거나 처벌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형제적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 그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그의 [규칙서](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한 형제를 고쳐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살인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잘못한 형제는 마치 독 있는 뱀에 물린 상태와 같은데,
그 독을 빼내어주지 않고 그대로 나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한 형제의 ‘교정’이 지극한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적 사랑 때문에, 사랑으로 형제의 잘못을 꾸짖고 교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형제를 꾸짖거나 교정할 때는 사랑이 아니면 차라리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직 사랑과 신뢰, 그리고 하느님께 의탁해서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섯 번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네 번째>까지 이르게 되면, 자포자기 하거나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가 잘못한 형제를 위해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사랑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마태 18,19)입니다.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 풀릴 것이기 때문’(마태 18,18)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먼저 ‘마음을 모으는 일’이요, 다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로 청하는 일’입니다. 스스로가 해결사가 되려고 하지 말고, 아버지께 신뢰로 의탁하는 일입니다. 성 베네딕도도 [수도규칙]에서 “(잘못한 형제들에게) 사랑을 더 베풀 것이며, 또 모든 이는 그를 위해 기도할 것”(규칙서 27,4)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있는 공동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니,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마태 18,20)
그러니 결코 포기하거나 무관심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혹 잘못한 내 형제에 대해서 포기하고 무관심하고 있지는 않는지? 혹 사랑이 없어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주님!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고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이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제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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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향기입니다. 아무리 숨겨도 멀리까지 퍼져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황홀하게 합니다”(이규경). 황홀한 사랑에로 열려있기를 바랍니다.
성무일도 기도에 보면, “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빛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그것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바른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충고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칭찬은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쓰지만 약이 되는 바른 충고를 해 줄 수 있고 또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더더욱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으니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성녀 안젤라 메리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남을 충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생각해 보십시오”(프란치스코 교황). 공자께서도 “충언은 사람을 바로 서게 한다.”하였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백옥같이 희게 만드시길 기도하면 주님은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쓴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로 듣기를 희망합니다.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제일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내 기대와 상대의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혹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진심을 주고받기까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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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에 있을 때입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은 구독자를 늘리는 거였습니다.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서 본당을 찾아가서 홍보하였습니다. 홍보하면서 교우들에게 창세기의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고 했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하느님 저 도시에 선한 사람이 50명만 있어도 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50명만 있어도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50명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점점 숫자를 줄여서 이야기 했습니다.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10명을 봐서라도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신문 구독자가 50명만 넘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습니다. 정 어려우면 40명만 넘어도 좋겠다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신문 구독자가 있으면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실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우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 기쁘게 구독신청을 하였고, 기부금도 내 주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유일한 가톨릭 신문이라고 하면서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5년 동안 팬데믹도 있었지만 그래도 임기를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10월에 신문홍보를 위해서 온다고 합니다. 저도 50명은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밀밭에 가라지가 자라듯이, 이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악’이 들어왔습니다. 교회는 그 악을 죄의 뿌리라고 합니다. 죄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려고 하는 성향입니다. 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의 결과입니다. 자유의지는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문화, 문명, 예술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쟁, 폭력, 야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 세상을 벌하지 않으시는 것은 선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살신성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몰로카이의 다미안 신부님은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본인도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자신을 저격한 청년을 찾아가서 용서하였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삶을 기록한 ‘울지마 톤즈’는 씨앗이 되어 많은 학생이 사제의 길을 가도록 이끌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콜베 신부님은 죽어야 할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포로수용소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 희망을 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셨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이 별이 되셨습니다. 신부님은 이웃을 위해서 대신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콜베 신부님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욕망이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그런 열쇠로 세상의 문은 열 수 있겠지만 천국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생명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가는 지구에서는 인간 역시 병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계획한 것들, 생각한 것들을 실천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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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이런 말 자주 쓰십니까? ‘에이 밥맛없어.’
‘밥맛없다.’라는 이 말이 정말 밥맛이 없어서 그런 건가요? 아니지요. 함께 있는 사람이 나와 불편한 관계에 있게 되었을 때 하는 말이지요. 심기가 불편한데 밥이 넘어가겠습니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관계가 좋지 않으면 밥까지도 맛이 없어진다는 말이지요. 또 한 가지는 밥이나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세상살이에서 가장 힘든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사람과 편안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충고할 때 조용히 둘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진심을 담아서 둘이, 다른 이들이 모르게 하라는 말입니다. 참 쉽지요. 그런데 이 쉬운 것을 우리는 잘 못 지킬 때가 많습니다.
이 사람의 허물을 저 사람에게 저 사람의 허물을 이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리고 그 말은 돌고 돌아 당사자에게 들어가고 관계는 악화합니다. 믿음은 깨지고 불신이 자라납니다. 그렇게 밥맛이 뚝 떨어집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런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은 지키기 매우 어려운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포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평화로워지려면, 이웃들과 화목하여지려면, 우리 본당이 형제애로 가득하여지려면 꼭 이루어야 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밥맛도 없는데 얼굴 보고 기도할 맛이 나겠습니까? 점점 가정에서 기도의 소리는 사라질 것입니다. 이웃과 함께 어울려 웃는 웃음도 사라질 것이고 본당에서는 신뢰와 서로의 헌신으로 본당을 꾸려가야 하는데 불신이 만연하게 될 것입니다.
서로에게 서로가 믿음이 되어 주십시오. 신뢰할 수 있는, 사랑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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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쿨?
운동을 하다가 다쳤나 봅니다.
팔꿈치가 욱신거립니다.
비상약이 들어 있는 서랍을 열어 봅니다.
핫파스가 보이고 그 옆에 쿨파스가 보입니다.
핫파스 봉투에 그려진 그림을 보니 너무 뜨거워 보입니다.
그래서 쿨파스를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명 쿨파스인데 시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사기당한 기분입니다. 분명 쿨파스 즉, 시원한 파스라고 쓰여 있는데 말입니다.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게 쿨파스면 핫파스는 도대체 얼마나 뜨거운 거야!
우리 마음에도 분명 상처라는 것이 생깁니다. 마음 쓰다가 오히려 다치기도 합니다. 그때는 ‘파스’가 딱입니다.
마음에 붙이는 파스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핫, 쿨 관계없이 마음 잘 낫는 파스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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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스승
“그리스도 주 예수님”
“찬양하라, 주님을 섬기는 자들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찬미하라, 주의 이름”(시편113,1-2)
오늘 역시 옛 어른의 말씀부터 소개합니다.
“배움이란 눈으로 읽어 머리에 채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전해 받아 삶에 새기는 것이다.”<다산>
“스승의 가르침에 제자는 공손한 태도와 겸허한 마음으로 극진하게 배워야 한다. 선한 것을 보면 따르고 의로운 일을 들으면 실행해야 한다.”<관자>
우리의 평생 삶에 보고 배울 스승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평생 스승이자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저역시 날마다 평생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겸손히 배우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자 스승이신 주님이신 예수님은 그날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십니다. 평생교육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고 유익한 수행은 없다는 것이 우리 가톨릭신자들의 자랑입니다.
또 우리가 배울 분들은 무궁무진 합니다.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을 따르고 배웠던 교회 역사상 모든 성인들 역시 우리의 스승이 됩니다. 평생 영원한 스승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이정표가 되고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또 깨어 눈만 열리면 삶의 스승은 곳곳에서 만납니다. 저에게는 요즘 저녁부터 밤새 피었다 다음날 오전 해뜰 때 까지 만개한 들꽃 달맞이꽃들도 삶의 스승이 됩니다.
“밤새 깨어 님 기다리던 달맞이꽃 청초한 사랑!
축복인사 받으시고 오늘도 힘내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른 새벽 수도원 산책하며 기도중 찍은 활짝 핀 달맞이꽃 사진과 함께 지인에게 보낸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밤에도 깨어 살라는 가르침을 주는 달맞이꽃들입니다. 아주 오래전 써놨던 시 두편도 떠오릅니다.
“당신께 맺혀있는 이슬방울되어
영롱하게 깨어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지는 인생이고 싶다”<2000.8.6.>
“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며 잠못 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2000.10.1.>
24년전 여기 수도원 산책중 깨달음과 더불어 선물처럼 주어진 시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자연도 저에게는 참 좋은 삶의 스승이 됩니다. 오늘은 1941년 8월14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한, 만47세로 삶을 마감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기념일입니다. 생전에 “성모승천대축일이 죽고 싶다.”라고 말했던 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죄수번호 16670 숫자가 적힌 죄수복을 입은 그의 순교 직전의 일화는 늘 들어도 감동입니다. 한명의 죄수가 탈출함으로 이에 대한 벌로 차출되어 죽게 되자 폴란드 출신의 병사 ‘프란치셰코 가조우니체크’는 “내 아내, 내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 울부짖을 때 콜베 사제가 나선 것입니다.
“나는 가톨릭 사제이다. 나는 그사람을 위해 죽고 싶다. 나는 늙었다; 그는 부인과 아이들이 있다.”
젊은 병사를 대신하여 성인은 순교했고, 기사 회생한 가조우니체크는 1995년 3월 13일 사망합니다. 그러니까 콜베 성인이 순교후 53년 동안 살다가 95세 천수를 누리고 산 것입니다. 그는 살아서 1982년 10월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한 성인의 시성식에 참석하였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해집니다.
“나는 폐에 숨이 붙어있는 한, 막시밀리안 콜베의 영웅적 사랑의 행위에 대해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기고 살아 왔고 또 그렇게 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제1독서 에제키엘서 9장과 10장은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9장이 우상숭배자들의 비참한 죽음을 소개하는 반면 10장은 주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환시를 통해 본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죄중에 살아갈 때 주님의 영광도 떠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떠난, 희망도 빛도 평화도 사라진 그 자리는 그대로 지옥일 것입니다.
새삼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기도와 회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기도와 회개는 끝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기도와 회개의 삶입니다. 혼자서의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요즘 시찰을 앞둔 설문지만 봐도 담박 들어납니다. “1.공동체 생활, 2.공동체의 리더쉽, 3.공동체의 일, 4.공동체의 미래”에 따른 모든 항목들마다 공동체가 반드시 붙습니다. 새삼 우리의 삶은 ‘더불어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할 때 제일 안전하고 튼튼하며 또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고마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공동체일 때 앞서 복음에서처럼 죄를 지은 형제의 교정도 훨씬 수월해 질 것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었을 경우 공동체의 배려가 참 섬세합니다. 끝까지 화해와 치유를 위해 온갖 최선의 노력을 다 할 수 있음도 공동기도의 위력임을 봅니다.
아주 예전 ‘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라는 장상의 말도 있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땅의 공동체는 하늘에 그대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너희’가 가리키는 바 교회 공동체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늘과 땅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땅의 교회 공동체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고, 땅의 교회 공동체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하니 한마음으로 땅에서 바치는 교회 공동체의 기도가 공동체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하늘과 땅의 소통에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사실 이런 공동 전례기도은총없이 교회공동체의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 교회 공동체요 우리 각자의 인생입니다.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시편11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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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와 나 그리고 그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그대
나를 보듯
나
그대를 봅니다
나
그대를 보듯
그대
나를 봅니다
그대와 나
그분을 보지 못해도
그분
그대와 나를 보십니다
그분
그대와 나를 보시듯
그대와 나
그분을 봅니다
그대와 나
둘처럼 보일지라도
그대와 나 그리고 그분
늘 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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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마태 18,16)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지 알고 바로잡으라
누가 여러분에게 해를 입혀 여러분이 고통을 받았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끼? 여러분은 오늘 성경 밀씀에서 이마 그 답을 들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 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혔습니다. 남에게 해를 입힘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에게 심한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형제의 상처를 못 본 척하실 겁니까?
그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입니까? 그의 곤경을 못 본 척하실 겁니까? 그렇다면 가만히 있는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른 그 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니 누가 우리한테 죄를 짓거든, 단지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그를 잘 보살핍시다. 자신의 상처를 잊어 버리는 것은 훌륭힌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상처는 제쳐 놓으십시오.
그러나 형제의 상처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그러니 그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하면서 그를 바로잡기 위해,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티이르십시오. 그가 자신이 공격받는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기 시작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를 여러분이 바로잡으려 하는 그 행동으로 더욱 몰아 붙이는 셈이 됩니다.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리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15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그를 타이르지 않았다면, 그는 파멸의 길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하느님은 그물이고, 우리는 그 그물 속에 들어 있는 피조물이다. 하느님을 가장 진실하게 아는 사람은 만물 속에서 똑같이 하느님올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피조물과 하느님을 제대로 보려면 그 그물을 보아야 한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사람이 그 그물 속에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 그물 속에 있음을 의식하고, 이 인식을 항상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넓어져서, 우리의 신성에 대한 자각으로 그물을 가득 채워야 한다.
하느님은 영혼이 넓어지기를 바란다. 하느님은 영혼에게 많은 것을 받을 기회를 준다. 그렇게 해야만 몸소 많은 것을 줄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넓어짐 혹은 확장이야말로 인간의 자각과 의지의 특징이다.
그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우리가 깨달으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누구에게서나 하느님을 발견하고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보다 더 밝고 즐겁고 기쁜 삶은 결코 없다.(220)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6절: 청빈운동, 이단과 이단 신문
이단 신문:
인노첸시오 3세 때에 교회의 소송법에서 이단 신문 절차가 만들어졌다. 이에 따르면 당국은 어떤 경우에 직무상 죄인이나 범죄자에 대하여 행동을 먼저 취해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당국은 범인이 고소될 때까지 - 고발 소송 - 기다려서는 안되고, 자진하여 또 직무상 - 판사로서의 직권상 - 범인을 색출하여 법정에 인도해야만 하였다. 이단자에 대한 이와 같은 방법의 적용은 1231년에 이단 혐의자를 추적해야 하는 교황청 이단 신문관이 임명되게 하였다. 1224년에 그레고리오 9세와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하여 공동으로 롬바르디아 지방에 이단자법이 반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세속 당국은 주교가 인도한 이단자를 감금하고,
만약 그가 이단을 계속 고집하면 그를 처형해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속권으로의 인도는 필연적으로 처벌을 가져왔다. 만약 인도시에 세속의 권력이 유죄선고자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는 청이 표명되었다면, 그것은 “무서운 형식주의요 순전한 허구”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속의 법정이 그 집행을 거부할 경우에는 그 법정 자체가 이단의 용의자로 기소되었다. 인노첸시오 4세는 1252년에 이단 신문관들에게 필요할 경우에는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리하여 교회사에서 가장 슬픈 장이 시작되었다. 잔인한 고문자의 비인간적인 행위에는 이미 어떠한 한계도 없었다. 많은 무고한 피들을 흘렸고, 과도한 잔인함과 슬픔이 인류 위에 떨어졌다. 이러한 “무서운 제도”가 후에 명백히 망상인 무의미한 마녀 신앙에까지 실행되었을 때, 그것은 최하점에 도달하였다. 한없는 고통이 맹목적인 광신자에 의해 산상의 설교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한 자비로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류 위에 초래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깊은 부끄러움과 당황함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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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을 것이다.” (18,15)
모든 개별 인간, 물론 인간들로 구성된 정당, 교회 그리고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들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실패도 하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실패하고 잘못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잘못을 지적받기도 하고 지적하기도 하면서 살아가길 마련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입니다.
아르헨티나는 1976년 3월부터 1979년 9월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추악한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시민 약 3만 명이 쿠데타 세력에게 목숨을 잃거나 납치되어 행방불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르헨티나 주교 80여 명이 모여, ‘침묵으로 상황을 주시한다’라는 결정으로 아르헨티나 주교단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잘못된 결정과 오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2000년 9월 아르헨티나 주교단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현 프란치스코 교황님) 주도하에 군사정권 시절 교회 인사들의 죄를 고백하는 문헌 「내 죄」를 발표했으며, 그 주된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자유와 인권을 해친 사람들에게 너무나 너그러웠습니다. (중략) 책임 있는 사람들(=주교단)의 침묵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정치적 충돌, 자유의 말살, 고문과 감시, 정치적 박해와 사상적 강요에 참여한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합니다.』 (* 시사 IN 361호에서 퍼옴) 결국 과거사에 대한 교회의 반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과오는 바로 아르헨티나 주교단의 결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침묵입니다. 군사 정권하에 아르헨티나 주교단의 침묵은 결국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 침묵했기에 반성한 것입니다. 자기 삶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약함을 처절하게 깨달으신 교황님께서 자신이 말해야 할 때 강론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화해와 평화를 강조하신 것이라 저는 느낍니다.
더욱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파수꾼으로 내세워진 참된 예언자의 소명이란 하느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하느님을 대신하여 악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만일 경고의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함으로써 발생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예언자에게 묻겠다는 것입니다. 불의와 부정 및 부패를 보고도 경고의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할 때 말하는 몫이 바로 예언자적인 소명으로 불린 우리 그리스도인이며 그중에서도 책임 있는 자리에 계신 분들에겐 더욱더 큰 책임이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타인의 잘못을 보고 침묵하기보다는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참된 지혜를 요구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만이 노골적으로 비판한다’라는 격언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타인의 작은 실수는 그 사람 스스로 알고 느끼도록 조금은 미루어 두는,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함께 살아가는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기다려주고 감싸주고 있다고 느낄 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간에 신뢰와 서로를 향한 배려가 생겨나서 공동체 내에 활력이 넘치리라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와 자매가 잘못했음에도 스스로 깨닫지 않을 경우, 더욱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접근하고 처신해야 하리라 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형제적 충고를 해야 할 경우, 먼저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단둘이 만나서 타일러 주라는 의도는 결국 형제적 충고의 목적이 바로 그 형제의 죄와 잘못의 지적이나 추궁에 있지 않고 그 형제 자체 곧 그 형제에 대한 사랑 어린 관심과 배려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 있잖아요.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둘째로 개인적인 따뜻한 형제적 충고를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그 형제를 충고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표현의 바탕은 바로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마태18,16)라는 형제적 권고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그러기에 개인적인 감정이나 견해가 아닌, 보다 더 확고하고 객관적인 증거나 사실을 바탕으로 형제적 권고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책임자로 있을 때 저는 이 방법을 즐겨 사용했는데,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더군요. 세 번째 권고는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8,17)라는 권고입니다. 이상한 일은 공동체는 잘못한 그 사람보다 때론 오히려 그 잘못을 해결하려고 하는 책임자를 더 부정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당신은 힘이 있으니까요!’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이랍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8, 17) 이는 가장 극단적인 경우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네 삶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이나 세리들을 백안시하고 관계를 갖지 않은 것을 참조하면 되는데 이 표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런 사람들과는 절교하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내쫓으라는 표현입니다. 물론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용서와 사랑에 반하는 행동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이 표현의 강조점은 절교나 파문이 아니라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공동체는 잘못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그 공동체가 참된 공동체인가 아닌가를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덕은 바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자신에게 향한 형제들의 형제적 권고를 기꺼이 듣고 자발적으로 자기 잘못과 죄를 인정할 수 있는 능력 여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형제의 잘못을 기꺼이 충고할 수 있는 성숙하고 따뜻한 사람과 그런 지적에 쿨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냐에 따라 그 공동체 사랑의 관계와 영성의 깊이를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함께 더불어 하느님께로 나아가면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엎어질 때마다 가까이 다가와서 사랑 어린 충고를 하는데 인색하지 않도록 합시다. 혼자 하느님께 나아가려 하지 말고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 형제에게 대한 사랑에서 기꺼이 충고하는 것을 게으르지 않도록 합시다. 이런 점에서 서로에게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사랑하는 데 서로 주춤거리지 말고 사랑의 빚을 지우도록 합시다. 형제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사랑 어린 말 한마디가 형제가 잘못 했을 때 일어설 수 있는 큰 지팡이 노릇이 될 것입니다. 형제 하나를 얻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또한 형제 하나를 잃는 일도 쉽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에서 나온 충고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사랑의 의무이지만, 다른 사람의 지적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의 의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나약한 본성에서 저지른 잘못과 실수를 볼 때마다 때론 기다려주는 의미에서 침묵해야 하지만 형제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할 때 기꺼이 사랑으로 충고하게 하여 주시고, 나 또한 누군가가 저에게 사랑 어린 충고를 해 줄 때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과 그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길 바랍니다. 주님 당신과 형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여주시고 저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오늘 축일을 기억하는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순교 사제는 오늘 우리가 살아야 할 용서를 실제로 실천하시고 타인(=아무도 기억하지도 않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이름 없는 사람, 곧 숫자로만 기억되어질 사형수)을 위해 순교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증거하신 분이 바로 콜베 신부님이십니다. 폴랜드의 아우슈비치를 방문했을 때. 저는 그분이 마지막 삶을 사셨던 방에 잠시 머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점은 콜베 신부의 “제가 이 사람을 대신해도 좋겠습니까?”라고 하셨던 말마디가 제 가슴에서 요동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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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용서와 애정을 쏟는다면 /
박윤식 [big-llight] 240813 21:59 ㅣNo.175013
“네 형제가 너에게 죄짓거든, 단둘이 만나 타일러라.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고 말을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말 들으려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너희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하면,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둘 또는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할 게다.”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말은 곧 공동체의 특성을 가리키는 말일게다. 이 공동체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바로 서로간의 사랑이란다. 우리는 예수님 이름으로, 또 그분 정신으로 모인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공동선을 해치는 어떤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공동체로 돌아오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모아 주님께 기도해야 할 게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조건을 알려 주신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아름다운 성당을 지어 바치는 곳에 당신도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장소가 아닌 함께 한 공동체의 수다. 혹 주님 이름으로 다른 이를 비방하거나 상처 준 일은 없는지, 또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주님 사랑‘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죄 지은 이를 어떻게 대할지 가르치신다. 함부로 단죄할 것이 아니라 몇 단계의 신중한 처신을 요구하신다.
첫 번째는 죄 지은 이와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라신다. 그러지 않으면 죄지은 이가 자신의 잘못도 깨닫지 못한 채 죄인으로 다루어질 수 있기에 말이다. 두 번째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분별 있는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 다시 그 죄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라신다. 세 번째로는 두 번의 타이름으로도 그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여러 사람 앞에서 잘잘못을 따지라신다. 그 이가 객관적으로 자신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이끌라는 거다.
마지막으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를 더 이상 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지 말라신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이가 잘못했을 때 처음부터 그를 단죄하지 않기를 간곡히 바라셨단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런 만남과 설득의 단계를 아예 생략한 채, 처음부터 여럿이 앞에서 그의 행동을 고발하고 그를 단죄하곤 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죄지은 이를 끝까지 사랑하려면 그의 잘못을 분명히 깨우쳐 주어야만 할게다. 한 사람이 죄를 짓고 형제를 모욕할 때, 처음에는 단둘이, 그 다음에는 둘이나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에는 공동체 전체의 도움을 받아, 서로 간의 친교를 회복하고 주님의 현존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신다. 참으로 대단히 신중하게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라고 권고하신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잘못한 이를 타일러 주라신다. 그리 쉽지는 않을 게다. 애정 없이는 결코 할 수도 없다. 자칫 마음을 상할 수도 있기에. 상대는 물론, 본인도 상처 받을 수도. 그런데도 그렇게 하라신다. 힘이 약하면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라도 설득하라나. 둘이나 셋은 결코 숫자가 아니다.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이와 마음 통하는 사이가 되라는 거라. 기도는 만남이다. 애정으로 시작하면 애정을 만나고, 사랑으로 출발하면 사랑을 만날게다. ‘주님 이끄심’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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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독서에서는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나와”(에제 10,18) 떠납니다.
바빌론에 유배 가 있던 에제키엘이 본 환시이고, 예루살렘의 함락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서, 심지어는 성전 안에서도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선고하시고, 그 선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때 결국 하느님께서는 성전을 떠나가시고 성전은 파괴됩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형제가 잘못할 때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그가 “교회의 말도”(요한 18,17)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는 그를 더 이상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에서 교회는 푸는 권한만이 아니라 매는 권한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풀기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복음에서 내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 읽는 것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 그것이 차이를 가져옵니다.
예언자를 보내시어 경고하시고, 형제를 통하여 일깨우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 버릴 때, 남은 길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 심각한 경우도 있습니다. 듣지 않을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아예 경고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면, 분명 다른 사람도 나에게 그렇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에, 귀를 막아 버린 나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잘못을 알려 줄 때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돌아봅시다.
이것은 나를 회심의 길로 이끌거나, 아니면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길로 이끌 것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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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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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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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 사람 대신 제가 가겠습니다!
교도소나 구치소에 갈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운 일이 한가지 있는데, 재소자들의 가슴에는 하나같이 이름 대신 번호가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민영 소년 교도소 설립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만일 꿈이 이루어진다면, 아이들의 가슴에 번호 대신 이름을 달아주고 이름을 불러주자는 안을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16670번,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의 번호였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콜베 신부님의 삶과 죽음은 한마디로 무죄한 어린양의 삶과 죽음, 속죄양으로서의 삶과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로 악명 높았던 나찌 수용소 안에서 콜베 신부님은 동료 수감자들에게 마지막 희망이자 위로였습니다.
한 포로가 죽음의 방으로 끌려가며 외쳤습니다.
“내 불쌍한 아내! 내 아이들!”
당시 연병장 내에는 수많은 운동장에 포로들이 서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말라깽이가 걸어 나오며 외쳤습니다.
“저 사람 대신에 제가 가겠습니다!”
그 한 마디로 인해 콜베 신부는 깊은 지하 감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열 명의 수감자가 함께 갇혀 있었는데, 물 한잔도 빵 한 조각도 없이 죽음의 순간만을 기다려야만 했던 그곳에서 콜베 신부님의 성덕은 더욱 발휘됩니다.
가장 허약했던 콜베 신부님은 의외로 가장 오래 견딥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인 동료 수감자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던 동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 병약했던 콜베 신부님이었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기도와 위로 속에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나서 자신도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기적과도 같은 일이 생깁니다.
평소에 배급이라고 받던 빵 조각들도 늘 남들에게 양보해서 가장 체력이 바닥나 있던 콜베 신부님이었지만, 15일간이나 굶주림을 견디면서 동료들의 눈을 모두 감겨줍니다.
끝까지 생존해있는 콜베 신부님을 확인한 나찌들은 신부님에게 탄산 주사를 맞힙니다.
콜베 신부님, 살아 생전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과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한 투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신부님의 그러한 신심은 하루하루 피 말리는 수용소 생활 안에서 활짝 꽃피어났습니다.
그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수용소 생활 가운데서도 수감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콜베 신부님을 통해서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곤 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던 그들에게 끊임없이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었던 것입니다.
동료 수사들과 함께 나치에 체포된 후 수용소로 향하는 트럭 안에서의 일입니다.
숨 쉴 틈도 없이 끌려가는 사람들로 빽빽했던 트럭 안에서 동료 수사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기약도 없는 미래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 콜베 신부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죽으러 가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차까지 타면서 가니 이 얼마나 커다란 행운입니까?
여러분, 이제 우리는 가능한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성모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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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래서 고통스러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힘으로써 자기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이제 우리의 상처보다도 형제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 그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가 비난받는다고 느끼면 잘못해서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충고한다면서 몰아붙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충고할 때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 된다. 그러나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불러 타일러야 한다. 공동체가 한 사람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가 해결하도록 하라고 하신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이교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처럼 대하라는 말씀이다. 그래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단죄를 받으면, 이것은 하늘에 계신 어떤 분이 무효로 해 주시지 않는 한, 그는 매인 채로 있다. 훈계를 받아들이고 공동체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면 그때는 풀리는 것이다. 매이는 사람은 충고를 한 사람이 아니라,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랑의 일치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무엇을 청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참으로 일치하지 못했거나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탓이다. 하느님께서는 형제들의 평화와 일치와 화합보다 기뻐하시는 것은 없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세 가지 있다. 형제들끼리 일치하고 이웃과 우정을 나누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이다.”(집회 25,1) 주님께서 둘이나 셋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기도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신심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크기에 달려있다.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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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면죄부와 대사는 어떻게 다른가?
오늘 복음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마태오 복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하늘 나라는 죄와 벌이 모두 사해져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교회에서 파문당하면 하늘 나라에서도 파문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개신교는 그러나 교회의 이 죄사함과 벌까지 면해주는 권한을 교회에 주었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며 가톨릭은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해 준다는 뜻의 ‘면죄부’를 팔아 바티칸 베드로 성당을 지었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교회에 죄와 벌의 모든 용서의 권한이 주어졌음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며
그 치유가 죄의 용서의 권한이 사람에게 주어졌음을 보여주는 표라고 하신 복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영화 ‘나라야마 무사시코’에서는 고려장과 같이 70세가 넘으면 먹을 것을 줄이기 위해 부모를 산에 버리는 옛 일본 풍습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이 주저하는 것을 보고 일부러 몰래 튼튼한 앞니를 부러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머니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둘째 아들이 첫 경험을 하는 날 큰아들의 지게에 실려서 산에
오릅니다.
새로 태어나면 누군가 죽어야 하는 상징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한 일본의 전설에서는 자기 아내를 살리기 위해 노모의 간을 빼서 달리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혼령이 나타나 “천천히 가라. 넘어질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하느님도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나라야마 무사시코에서는 어머니를 버리고 왔더니 슬퍼하는 기색 전혀 없이 어머니의 옷을 이미 나누어 걸치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낳으셨고 교회를 통해 구원의 백성이 탄생하기를 원하셨다면 ‘다’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면죄부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면죄부는 죄를 사해준다는 뜻인데, 죄사함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는데 그 은총을 죄인에게 돈을 받고 팔 수는 없는 일과 같습니다.
죄와 벌은 개인의 몫이기 때문에 돈을 받고 죄를 사해준다는 식의 ‘면죄부’라는 말은 가톨릭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고 개신교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그들이 면죄부라고 말하는 단어는 라틴어 ‘은총의 문서’(Litterae indulgentiales)의 번역입니다.
이는 분명 ‘대사’(Indulgentia)와 차이가 있습니다.
대사는 본래 ‘은혜, 자비’의 뜻으로 로마 제국 시대 특별한 날에 이뤄지는 형벌의 사면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입니다.
대사는 죄의 용서와는 관계없고 일정한 전제조건(기도와 회개, 성지순례, 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 등)을 채울 때 죄에 대한 보속을 감면하거나 전부 없애주는 은총입니다.
대사는 교회가 죽은 이들의 잠벌을 없애주려는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의 신심의 발전에 있습니다.
16세기에는 대사 관행이 널리 퍼졌고 종종 남용되었습니다.
일부 성직자, 특히 독일의 요한 테첼(Johann Tetzel)과 같은 인물은 베드로 성전 재건을 명목으로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사거나 미래의 죄에 대한 용서를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면죄부를 판매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방침이 아닌 당시 돈으로 잘못을 되갚는 게르만족의 전통과 결합한 잘못된 관행이었습니다.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공식적으로 은총의 문서 판매를 금지하였고 1570년에는 대사를 거래하고자 하는 자들을 파문시킨다는 조항을 추가하였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느님께서는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벌을 없애주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죄와 벌을 함께 용서해 주지 않는 이유는 죄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느껴봐야 죄의 무거움을 느끼고 다시는 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다윗이 병적조사를 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흑사병이 들게 하시는 벌은 주셨습니다. 교회가 벌을 사해주는 대사 제도를 시행하는데 은총은 돈을 주고 사고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제도는 결국 신자들의 신심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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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공동체에서는 내 몸이든 형제의 몸이든 모두 내 몸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5-20).”
1) 이 말씀은, ‘공동체의 형제애 실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이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2,14.18.26).”
몸의 일부가 병들었다면, 그것은 몸이 병든 것입니다.
손가락도 내 몸이고, 발가락도 내 몸입니다.
어느 지체가 무슨 병에 걸렸든지, 어떻게 얼마나
다쳤든지 간에 그것은 내 몸이 병들거나 다친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애를 실천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로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이든 형제의 몸이든, 공동체에서는 모두 내 몸이고,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 자신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내 몸에 병이 들었거나 어딘가를 다쳤다면, 가장 먼저 나 자신이 치료를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라는 계명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계명은 “네 이웃은 너 자신이니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입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네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네가 알았거든”입니다.
<죄는 하느님께 짓는 것입니다.
만일에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는 일은 나의 권한이 되어버리는데, 우리에게는 용서할 의무만 있을 뿐이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 권한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네 형제가 주님께 죄를 지은 것을 네가 알았거든”으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단둘이 만나든지,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만나든지 간에,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르는 것은, “나는 의인이고, 그는 죄인이니까, 의인으로서 죄인을 타이른다.” 라는 생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입니다.>
3)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라는 말씀은, 개인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노력해도 성과가 없다면, 공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서 자기 몸을 치료하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어서 병원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일의 경중에 관한 문제입니다.
작은 상처라면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반드시 병원에 가야 하는 큰 부상이나 큰 병이 있습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파문’은 ‘최종 선고’가 아닙니다.
파문은, 영구 추방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따라서 파문당한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교회는 그를 다시 받아주게 됩니다.
4) ‘공동체’, 또는 ‘형제애’ 라는 말 때문에 무의식중에 ‘남의 일’로 여길 때가 많은데, 만일에 죄를 지은 그 사람이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나의 부모’ 라면?
또는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나의 자녀’ 라면?
그러면, 예수님 말씀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나의 부모나 자녀나 연인이 죄를 지어서
주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는 것을 본다면?
그런 일을 보면서, 죄인의 심판이 이루어짐으로써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기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을 크게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나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나라 자체는 ‘지극히 행복한 나라’인데,
그 나라에 함께 들어오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슬퍼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극히 슬픈 나라’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금의 나를 보면서, 또 우리를 보면서, 하늘나라의 성인 성녀들과 가족들이 몹시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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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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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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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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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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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
<2024.8.14> 아침을 여는 묵상 (렘 50:1~10절)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
❚ 온 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힘쓰는 삶이어야 합니다.
✔ 어떠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 하나님을 경외하는 언약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1~3절).
열방에 대한 심판 예언 가운데 그 마지막으로 바벨론에 대한 예언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바벨론이 심판의 대상이 된 사실은 그동안 그들이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절).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없이 공포하여 이르라...’는 바벨론의 멸망을 주변 민족들에게 소리 높여 외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선포의 내용은 바벨론이 함락 될 것이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바벨론의 우상들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2절). ‘벨’은 바벨론의 신입니다. 즉, ‘한 나라’에 의해 바벨론이 점령을 당하고 황폐하게 될 때에 바벨론의 수호신인 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3절). ‘한 나라’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고레스 왕의 바사 제국을 가리킵니다.
인간에게 주신 모든 것 그리고 인간이 자랑하는 힘과 권세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만든 우상은 단지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결국 바벨론의 몰락은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시며 통치자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심판만이 남아 있음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 주인 되시고, 삶의 진정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온전히 경외하는 약속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과 연합하는 언약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4~5절).
바벨론의 멸망을 통하여 바벨론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선민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이 귀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울며 와서 하나님 여호와를 찾을 것이고, 그들이 시온으로 가는 길을 물으며 그곳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들은 시온으로 돌아와 서로를 격려하면서 영원한 언약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고자 할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강해 보이는 바벨론도 하나님의 손이 떠나면 비참하게 멸망당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극히 작고 연약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도우신다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사탄의 수하에 있기를 즐기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그의 백성으로 거듭났지만, 옛 성품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범죄 하기를 즐기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순간순간 회개하는 삶을 통해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품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세상과 벗하지 말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만 신뢰하는 언약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6~10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며, ‘잃어 버린 양 떼로다...’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목자를 잃은 양 떼처럼 유리하는 것을 보셨습니다(6절). 그들을 만나는 자들은 그들을 삼키며 그의 대적이 말합니다. “...우리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저 백성이 그들의 참된 쉴 곳이신 여호와, 그 조상들이 의지하던 여호와께 죄를 지었다...”(7절,쉬운성경)고 자신들의 행위가 무죄라는 사실을 합리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죄 주장은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바벨론이 멸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될 때 앞다투어 신속하게 고향 땅으로 도망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8절). “내가 큰 민족의 무리를 북쪽에서 올라오게 하여 바벨론을 대항하게 하리니...”.. ‘이 큰 민족의 무리는’ 자신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화살은...허공을 치지 아니하리라...”(9절).. 바벨론은 약탈하는 자들이 모두 만족할 만큼 충분히, 그리고 철저하게 약탈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10절). 즉 약탈을 행하던 바벨론이 이제 하나님의 심판으로 약탈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바벨론의 멸망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큰 민족의 무리’ 역시 심판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추구하는 상징적인 곳으로 불 수 있습니다. 롯이 소돔에서 급하게 도망쳐 나온 것처럼 우리 역시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모든 죄악의 소굴인 영적인 바벨론에서 신속하게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것들에게서 미련을 단호하게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영적인 바벨론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점검하고 말씀으로 새롭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 이 땅에 소망을 둔 자가 아니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자답게 주위를 곁눈질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유혹이 많고, 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승리의 삶을 위해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시며 통치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하나님만을 온전히 경외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달콤함을 가져다 주는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과감한 결단과 함께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힘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50:1~1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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