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갑작스런 폭우에 비 피해는 없으셨나요?
예보는 있었지만, 이렇게 무진장 쏟아질 줄은 몰랐습니다.
한여름 소나기마냥 내리는 비를 보면서
자연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사는 지구를 생각하는 이번 한 주간, 자연의 놀라움과
그 이면에 놓여있는 하느님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시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고별사가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기 전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보호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보호자 성령님께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분명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면에 놓인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히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그분을 믿고 그분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여는 것임을 받아들이면, 많은 것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죄라는 것이 더 이상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님을 알게 되고,
잘잘못을 따지는 세상의 의로움이 아니라, 정의를 실천하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은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해줍니다.
이곳에서의 삶을 끝내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저 하늘로 향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의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을 닮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삶의 목적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닮아 우리가 사는 이 지구를 잘 가꾸는 것도 우리의 몫이지요.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찬미받으소서 주간’ 강론집을 요약해왔습니다.
오늘은 작은형제회 김종화 신부님의 강론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김종화 신부
1.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원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중세 이탈리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통합 생태론을 전개하고 계십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연 보호,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 사회적 헌신,
내적 평화가 어떠한 불가분의 유대를 맺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셨습니다(「찬미받으소서」, 10항).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프란치스코 교종은
‘하느님의 사랑’과 ‘선(좋음)’이라는 주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성인은 형제들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습니다.
“모든 선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립시다. 모든 선이 그분에게서 흘러나옵니다.”
성인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세상의 피조물은 하느님의 선하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가장 좋으신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역할은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깨달으신 참된 복음적 가난의 태도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 또한 “하느님께서는 선하시며 사랑이시다.”라는 주제에 집중하고 계십니다.
교종은 창조를 묘사하시면서,
“창조는 사랑의 질서입니다.”라고 표현하십니다(「찬미받으소서」, 77항).
2.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찬미받으소서」, 17-61항)
인간은 피조물과의 관계 안에서
“그곳을 일구고 돌보는”(창세 2,15) 청지기의 역할을 부여받았지만,
이 땅을 “지배”(창세 1,28)하는 의미로 왜곡하여 자연을 파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산업화를 통한 경제 성장은 일부 국가들에게 엄청난 부유함을 제공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대규모의 자연재해, 기후 난민의 증가,
경제 양극화, 새로운 바이러스의 창궐 등 수많은 위험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3.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수많은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적 선행의 총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협력망을 통하여 해결해야 합니다. …
여기에는 결집된 힘과 일치된 노력이 필요합니다.”(「찬미받으소서」, 219항).
정부와 기업 그리고 언론에서는 환경 문제와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서
개인의 행동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의 행동만을 강조할 수 없는 긴급한 상황입니다.
온실가스를 다량으로 배출하는 기업들은 신재생 에너지 사용으로 전환해 나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도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깨닫고, 강론과 교리교육을 통하여
정기적인 생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나가야 합니다.
교회 건물도 신재생 에너지(태양광, 태양열 에너지 등)로 전환하고,
기후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화석연료 기업에 대한
‘투자 철회 운동’(divestment)에 동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환경을 위해 개인적으로 열심히 실천하더라도
화석연료 기업과 금융에 투자하는 자산을 멈추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기후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화석연료 기업이 문제라면
그러한 기업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투자도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통해 저의 소비는 어떠한가 성찰해보았습니다.
별 생각 없이 살고 있더라고요.
이번 기회를 통해 투자 철회 운동에 대해 알아보니 눈에 띄는 두 단체가 등장했습니다.
국제인권 단체인 앰네스티와 환경단체인 그린피스였습니다.
국제 앰네스티는 환경과 인권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기후변화가 취약계층의 인권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화석연료 기업에 대한 투자철회를 선언했습니다.
그린피스는 에넬과 에스콤이라는 발전회사의 예를 들며
재생에너지 사업의 비전을 제시하고 한국의 화력발전에 대한 변화를 촉구했죠.
절약,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함께 모여서 목소리를 낼 때, 그들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너무 어렵고 부담스럽다면, 우리를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는
인권단체나 환경단체를 후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도 이참에 후원액수를 조금 늘려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