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울고 간다 / 문태준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러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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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미당문학상〉
..제5회 수상작품집(문예중앙)에서
저녁이 올 때 / 문태준
내가 들어서는 여기는
옛 석굴의 내부 같아요
나는 희미해져요
나는 사라져요
나는 풀벌레 무리 속에
나는 모래알, 잎새
나는 이제 구름, 애가哀歌, 빗방울
산 그림자가 물가의 물처럼 움직여요
나무의 한 가지 한 가지에 새들이 앉아 있어요
새들은 나뭇가지를 서로 바꿔 가며 날아 앉아요
새들이 날아가도록 허공은 왼쪽을 크게 비워 놓았어요
모두가
흐르는 물의 일부가 된 것처럼
서쪽 하늘로 가는 돛배처럼
그사이에 / 문태준
오늘 감꽃 필 때 만났으니
감꽃질 때다시 만나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어요
감나무 감꽃 목걸이가 다 마르려면
오늘의 초저녁 이틀 나흘 닷새 아니면 석 달 아니면 네철
하나의 물결이 우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더라도
암벽에 새긴 마애불이 모두 닿아 없어지더라도
나의 쪽으로 새는 / 문태준
나의 가늘은 가지 위에 새 두 마리가 와서 울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창을 조금 더 열어놓았습니다
새의 울음은 나의 밥상과 신발과 펼친 책과 갈라진 벽의 틈과 내가 사랑했던 여인의 뺨 위에 눈부시게 떨어져 내렸습니다
나는 능소화가 핀 것을 보고 있었고 새는 능소화의 웃음 속으로 날아갔습니다
날아가더니 마른 길을 끌고 오고 돌풍을 몰고 오고 소리를 잃은 아이를 데려오고 가지꽃을 꺾어 오고 그늘을 깎아 오고 늙은 얼굴과 함께 오고 상여를 메고 왔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것들은 하나의 유원지처럼 환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하나의 고음(高音)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크고 무거운 것들을 아득한 옛날로부터 물고 오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들과 함께 와서도 나의 가늘은 가지 위에 가만히 올라앉아 있었습니다
나의 쪽으로 새는 흔들리는 가늘은 가지를 물결을 밀어 보내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구조 / 문태준
달이 연못을 밟는다
맑고 깨끗하고 조용한 은막 위를
달빛이, 야생의 흰 코끼리가 연못을 밟는다
온순하고 낙천적인 투명 유리를 깨트리면서
호수 / 문태준
당신의 호수에 무슨 끝이 있나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한 바퀴 또 두 바퀴
호수에는 호숫가로 밀려 스러지는 연약한 잔물결
물위에서 어루만진 미로
이것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서로에게 / 문태준
우리는 서로에게
환한 등불
남을 온기
움직이는 별
멀리 가는 날개
여러 계절 가꾼 정원
뿌리에게는 부드러운 토양
풀에게는 풀여치
가을에게는 갈잎
귀엣말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저녁
서로의 바다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파도
고통의 구체적인 원인
날마다 석양
너무 큰 외투
우리는 서로에게
절반
그러나 이만큼은 다른 입장
엎드린 개처럼/문태준
배를 깔고 턱을 땅에 대고 한껏 졸고 있는 한 마리 개처럼
이 세계의 정오를 지나가요
나의 꿈은 근심없이 햇빛의 바닥을 기어가요
목에 쇠사슬이 묶인 줄을 잊고
쇠사슬도 느슨하게 정오를 지나가요
원하는 것은 없어요
백일홍이 핀 것을 내 눈 속에서 보아요
눈은 반쯤 감아요, 벌레처럼
나는 정오의 세계를 엎드린 개처럼 지나가요
이 세계의 바닥이 식기 전에
나의 꿈이 싸늘히 식기 전에
우산의 은유 / 문태준
너는 다행히 우산을 잘 받쳐 드는군
샘이 잘 받쳐 드는 숫물과도 같이
산이 잘 받쳐 드는 산 그림자와도 같이
모래 해변이 잘 받쳐 드는 바다의 푸른 노래와도 같이
너의 얼굴이 잘 받쳐 드는 눈웃음과도 같이
서릿기러기가 잘 받쳐 드는 북쪽과도 같이
우산은 그리하여 딱히 물건이 아니라
펼쳐 짐작되는 것
모질게 헤어져 돌아왔을 때에는
우산이라도 거기
두어 밤 받쳐 두고 올 것을
이별이 오면 / 문태준
이별이 오면 누구든 나에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후련하게 들려주었으면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면서
바지락과 바지락을 맞비며 치대듯이 우악스럽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들려주었으면
그러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틀어막고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겠지
가장 아픈 데가 깔깔하고 깔깔한 그 바지락 씻는 소리를 마지막까지 듣겠지
오늘은 누가 나에게 이별이 되고 나는 또 개흙눈이 되어서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 문태준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몰랐지
늦가을을 제일로 숨겨 놓은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살아도 살아갈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과일은 다 가져가고
비로소 그 다음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혼자서 다 바라보는 저곳이 영리가 사는 곳
살아도 못 살아본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살았지
물끄러미 / 문태준
한낮에 덩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이 뾰족한 들쥐가 마른 덩굴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갈잎들은 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다
오늘은 일기(日記)에 기록할 것이 없었다
헐거워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다
나는 식은 재를 손바닥 가득 들어 올려보았다
그늘의 발달 / 문태준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감나무가 너무 웃자라
감나무 그늘이 지붕을 덮는다고
김나무 베는 아버지여
그늘이 지붕이 되면 어떤가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어요
우리 집 지붕에는 폐렴 같은 구름
우리 집 식탁에는 매끼 묵은 밥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
한 몸의 그늘
그늘의 발달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눈물은 웃음을 젖게 하고
그늘은 또 펼쳐 보이고
나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
밤을 다 감고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
나의 일기(日記)에는 잠시 꿔온 빛
아무 까닭도 없이 / 문태준
돌담을 지나가고 있었다
귀뚜라미가 돌담 속에서 울고 있었다
구렁이가 살던 곳이라고 했다
돌담을 돌아도 돌담이 이어졌다
귀뚜라미가 따라오며 울었다
집으로 얼른 돌아와
목침을 베고 누웠다
빈방에 가만히 있었다
귀뚜라미가 따라와
목침 속에서 울었다
방이 어두워지자
밤이 밤의 뜻으로 깊어지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 까닭도 없이
한송이 꽃 곁에 온 / 문태준
눈이 멀어 사방이 멀어지면
귀가 대신 가
세상의 물건을 받아 오리
꽃이 피었다고
어치가 와서 우네
벌떼가 와서 우네
한 송이 꽃 곁에 온
반짝이는 비늘들
소리가 골물처럼 몰리는 곳
한 송이 꽃을 귀로 보네
내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당신의 은밀한 농담들,
소리의 침실들, 그러나
끝이 있는 사랑의 악보들
의자를 꽃 가운데 놓고
내 몸에 수의를 입히듯
나 먼저,
오래 쓴 눈을 감네
늪 / 문태준
나는 가슴에 이걸 넣어두었지
허파라고 여기면서
상가라고 여기면서
그곳엘 드나들었지
내 몸의 헐렁한 주머니들
가장 귀한 하느님의 선물
너의 입에 처음 들어온
불은 젖
눈물을 잊은 적이 없는 눈동자
아주 겸손한 잔치를
꽃의 생기와 낙엽의 미래
그 시간들에 있는 막연한 짐작들
심폐 소생으로 살아난
나의 몸
나의 봄
아침을 기리는 노래 / 문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