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신미 대사의 한글 창제 뒷이야기
“어젯밤 임금님 앞에서 ‘전하, 우리 글자를 만드시옵소서’ 하는 너의 말에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허나 임금님께서 잠시 상념에 잠기시는 것을 보고 임금님과 너의 뜻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이 은선은 임금님께서 너를 격려하여 내린 특별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너는 우리 글자를 만들어야 하는 숙명을 떠안은 셈이다.”
어느 날 밤, 세종과 마주 앉은 신미가 우리 글자 만들기를 청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함허 스님은 그 광경을 보고 제자 신미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세종이라면 한글을 창제한 임금이고, 한글은 세종의 명을 받아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제안자가 스님이라니 어찌된 영문일까?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뿐, 사실 한글은 절에서 태어났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 창제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알려졌지만,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기록은 ‘세종실록’ 어디에도 없다. 조선왕조는 숭유억불을 표방했고, 따라서 세종 역시 유학을 숭상해 한자가 아닌 다른 글자는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상황에서 훈민정음을 드러내놓고 창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종은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의 도움을 받아 끝내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때 세종을 도운,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바로 신미 대사였다.
불교적 사유가 배어 있는 글쓰기로 오랜 기간 소설과 명상적 산문을 발표해온 작가 정찬주가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에서 당대 최고의 범어 전문가이자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임을 밝혔다.
작가는 정설로 굳어진 세종과 집현전의 한글 창제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조선왕조실록’ ‘사리영웅기’ 등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신미 대사를 새롭게 조명했다. 소설은 또 최근 발견된 ‘원각선종석보’가 신미 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는 결정적 단서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미 대사가 만든 훈민정음 언해본 ‘원각선종석보’의 발간 시기는 1438년으로, 세종이 한글창제를 반포한 1446년보다 8년이나 앞서고 있다. 훈민정음이 이미 8년 전에 비밀리에 만들어져 신미 대사와 수양, 안평 등에 의해서 실험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한글 창제와 관련된 유력한 설인 ‘범자 모방설’ 역시 신미의 한글 창제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태조 이성계 곁에 무학대사가 있었다면, 세종대왕 곁에는 신미대사가 있었다. ‘천강에 비친 달’은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 신미대사와 세종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여기에 조선 초 유학자 성현의 ‘용재총화’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언문이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밝히고 있고, ‘영산김씨세보’는 신미 대사를 학사로 임명해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 체계를 설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후 문자 보급을 위해 유교 경전이 아닌 불경을 언해하기 시작한 것도 신미 대사의 요청 때문이었으며, 이를 통해 불교와 한글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고증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통해 범어를 통달한 신미 대사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탄생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설은 수수께끼로 가득 찬 한글 창제의 진실을 야사가 아닌 정사, 즉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낱낱이 풀어냈다. 따라서 책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한 픽션의 재미를 넘어, 역사적 진실에 새롭게 눈뜨게 하는 놀라운 지적 감동을 선사해준다. 소설가 조정래가 “‘천강에 비친 달’은 소설적 허구가 아닌 역사적 진실의 올곧은 복원”이라고 극찬한 이유다.
‘천강에 비친 달’은 이처럼 방대한 지식과 예리한 역사의식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 역사적 현장에 직접 들어온 듯 생생하게 한글 창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덕분에 천 개의 강에 비친 달빛 너울 그 자체인 한글이 자유와 평등을 품은 불교 사상의 한 유산이라는 점까지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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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제야 맥락이 맞아갑니다. 산그크리트어와의 연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