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목왕후는 명돈녕부사의 딸로서 1602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46세까지 살면서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어야 했다.
광해군이 세자로 있는 상항에서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가 소생이 없이
46세로 승하하자 선조는 3년상을 치른후 계비를 맞이 했는데, 이 여인이 바로
운명의 여인 인목왕후다. 그녀의 나이 19세 선조의 나이는 51세 무려 32살 나이
차이가 났다. 당시 선조의 아들 광해군은 29세 그러니까 아들보다 10살이 어렸고
왕비에 간택되었으니 아버지벌의 선조를 보필하는 자리에 10살 연상인 아들과 함께
궁궐에서 살아야 하는 숙명의 길을 가야했다. 그녀는 성품이 어질고 검소하여 사치
를 싫어했다고한다. 이런성품을 좋아한 선조는 중전의 몸에서 왕자가 태어나면 보위
를 물려주려는 생각으로 광해군의 문안인사도 안받아 궁안의 상황은 심각했다고한다.
그 즈음 영창대군이 태어났으니 왕위계승으로 먹구름이 뒤덮였다. 11살이나 어린 시어
머니가 아들을 낳았으니 세자빈이 바라보는 시선을 좋을리가 없었다. 항상 시기 질투에
혹시라도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왕위계승을 놓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로 왕살은
두갈래로 갈리었다. 그러던중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이 즉위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하
던 소북파는 몰락하고 인목왕후도 대비가 되었지만 살해 위기까지 왔다가 대신의 저지
로 겨우 목숨을 보존했다, 그러나 대북파의 모략으로 친정아버지도 사사 되고 아들 영창
대군도 강화도로 끌려가 이듬해 죽음을 당했다. 이 엄청난 아픔을 당해야 했던 인목대비
는 폐모정청론이 대두대어 서궁에 유폐되었으며 살해위기에 시달리며 가시밭길을 살아
야 했다. 1622년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과 대북일파를 몰아냄으로써 그녀
는 대왕대비가 되고 반정을 승인함으로써 왕실 최고 어른 자리에 오른다.
인조의 보살핌으로 노년을 보내던 인목대비는 인경궁 흠명전에서 46세의 일기로 파라만장
한 생을 마쳤다. 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자리 목릉에 잠들어 있다.
이미 세자 자리에 오른 아들은 적자가 아니고 후궁아들인 이유로 선조는 미워했고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지만 않았더라면 광해군도 푹군으로 전략하지 않고 파벌도
없었고 인목대비도 평범한 삶을 살지않았을까.
어쩌면 선조가 어린아내를 맞아들인게 광해군도 인목대비도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않았을
까. 생각이든다.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의 손자가 바로 선조임금이다.)
(흐르는곡은 이수미가 부른 인목대비이다.)
첫댓글 음ㅇ악이 참으로 애닯프네요.
멋진 자료 좋음 악악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수미 노래 오랫만에 들어 보네요^^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인목대비...
노래도 애닮프네요^^
처음 들어보내요 노래 이수미가 불렀군요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