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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3章 希言(희언)
希言自然.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飄-회오리바람 표)
직역(直譯);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그러함이다. 회오리바람은 아침내 불 수 없고, 소낙비는 하루 종일 내릴 수 없다. 이리하는 것이 천지다. 천지도 이런 것이 오래 가지 않는 것을 높이 사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주(註); 이 장(章)은 제10장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번역(飜譯)이 거의 불가능했던 장(章)이다. 번역(飜譯)이라고 하기는 해왔으나 그 번역(飜譯)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希言自然(희언자연)부터 而況於人乎(이황어인호)까지는 그런 대로 뜻이 통하는데, 그 다음 구절(句節)들은 의미가 통하지도 않을 뿐더러 앞에 한 말들과 도저히 연결이 안 되는 소리들뿐이었다. 왜 그럴까? 노자(老子)는 왜 이렇게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들을 해놓은 것일까? 그것은 역시 노자(老子)의 잘못이 아니라 사고의 틀이 굳어진 사람들의 악벽(惡癖) 때문이었다. 노자(老子)의 말을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 자신들의 생각에 맞추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老子)의 사고(思考)는 그것들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는 선입관을 자주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사고(思考)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장면을 여러 군데서 보게 된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이 장(章)이다. 이 장(章)을 번역(飜譯)하고 노자(老子)의 뜻을 바로 알아봄으로써 왜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이 노자(老子)의 말을 잘 못 이해해 왔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장(章)에서 종래의 번역가(翻譯家)들이 해왔던 실수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도덕경(道德經)이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의 일단을 얻을 수 있다. 우선은 그런 대로 이해 가능한 번역(飜譯)이 되어지는 앞부분을 먼저 살펴보고 다음 구절(句節)을 보도록 하자.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올바른 의미는 ‘있는 그대로(무위(無爲)), 스스로 그러함(자연(自然))’이다. 여기서 무위(無爲)는 유위(有爲)와 상대하여 존재하는 개념이고, 자연(自然)은 타의(他意)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즉 무위(無爲)는 만물(萬物)의 내면적인 본성(本性)이며, 자연(自然)은 외부에 보이고 인식되어지는 만물(萬物)의 외면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무위(無爲)는 자기의 본성(本性)에 어떤 조작과 위장을 했느냐 하는 자기 행위의 결과이고, 자연(自然)은 남의 평가나 인식이 만물의 실제 그러한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느냐 하는 외부 인식의 경향이다. 무위(無爲)가 유위(有爲) 없이 홀로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자연(自然)이란 개념도 타의(他意)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자연(自然)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타(他)의 시선(視線)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을 보아주는 다른 어떤 존재의 시선이 전제되지 않으면 ‘스스로 그러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은 ‘남이 무어라고 보거나 말하거나 간에 관계없이~’라는 전제의 생략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전제가 부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스스로 그러함’이다. 타자(他者)의 시선(視線)을 전제로 하여 성립되는 개념이지만 타자(他者)의 시선을 부정함으로써 증명되는 것이 바로 자연(自然)인 것이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희언(希言) 즉 말이 필요 없는 것(희언(希言))이 스스로 그러함(자연(自然))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은 ‘스스로 그러한 것’을 타자(他者)에 대해 인정받고 주지시키기 위한 것인데, ‘스스로 그러한 본성(本性)’은 남이 어떻게 보거나 말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성립된다는 점에서 말로 떠들거나 전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곧은 것은 곧다고 우기지 않아도 곧은 것이고, 둥근 것은 말로 주장하지 않아도 둥근 것이며, 검은 것은 말로 증명하지 않아도 검은 것이다. 또한 세상이 굽었다고 말하여도 곧은 것이 굽은 것이 되지 않으며, 온 천하가 모나다고 주장하여도 둥근 것을 스스로 둥근 것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만인이 검다고 우겨도 흰 것이 검은 것으로 바뀌지는 않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정직한 사람은 자기가 정직하다고 말로 떠들어 인정받지 않아도 정직한 것이고, 덕(德)이 있는 자는 덕(德)을 자랑하지 않아도 덕(德)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말로 떠들어 자랑하거나 말로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일수록 그 본성(本性)은 말과 다르다는 것이 노자(老子)가 줄곧 해온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 그러함’을 요란하고 시끄럽게 내보이는 것을 회오리바람과 소나기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광풍이 불거나 소낙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천지(天地)는 그런 요란한 짓거리가 오래 계속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사람들은 더욱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시끄럽게 떠들거나 눈에 두드러지는 행위나 말은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리 오래 속지 않는다는 말이며, 그것이 오래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진실로 오래 가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본성(本性)이며, 그것은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번역(飜譯)이 그리 어렵지 않으며 번역(飜譯)되어진 말도 이해 가능한 범주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다음부터다. 같이 보도록 하자.
故從事於道者, 道者同於道. 德者同於德, 失者同於失.
주(註); 순서상 직역(直譯)이 나올 차례지만 그 전에 원문(原文)을 같이 봐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번역문(飜譯文)은 잠시 뒤에 싣기로 한다. 우선 이 문장(文章)에 대해 지금까지 어떻게 번역(飜譯)해 왔는지를 먼저 보자. 고금(古今)의 노자(老子) 연구가(硏究家)들이 이 구절(句節)들을 풀어 생각하기를 다음과 같이 해왔다.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故從事於道者(고종사어도자); 그러므로 도(道)에 종사하는 자는
道者同於道(도자동어도); 도(道)가 있는 자에게는 도(道)와 같아지고
德者同於德(덕자동어덕); 덕(德)이 있는 자에게는 덕(德)과 같아지고
失者同於失(실자동어실); 실(失)이 있는 자에게는 실(失)과 같아진다.
약간씩 어미(語尾)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이 이와 비슷한 뜻으로 풀어왔다. 독자들이 원문(原文)을 찬찬히 보면서 번역문(飜譯文)을 봐주기 바란다. 원문(原文)의 의미가 제대로 옮겨졌다고 생각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면 지금까지 이 책을 읽어온 보람이 있는 것이다. 암만 봐도 더 이상의 번역(飜譯)은 곤란하다고 생각된다면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읽어주기 바란다.
첫 구절(句節)을 하나하나 뜯어보자. 기존의 학자들은 故從事於道者(고종사어도자)의 띄어 읽기에서부터 틀리고 있다. 故(고), 從事於道(종사어도) 者(자)로 띄어 읽으면 위의 번역문(飜譯文)처럼 옮기는 것이 틀리지 않다. 그러나 노자(老子)는 다음 구절(句節)에서 도자(道者)를 하나의 단어(單語)로 사용하고 있지 도(道)와 사람(자(者))으로 나누어 쓰고 있지 않다. 도자(道者)나 덕자(德者), 실자(失者)는 모두 하나의 단어(單語)이지 자(者)를 떼어놓을 수 없는 구조(構造)다. 그러나 ‘도(道)에 종사하는 자(者)’가 되려면 從事於道(종사어도)와 者(자)가 나누어져야 한다. 즉 종사(從事)의 목적어(目的語)가 도(道)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老子)는 한 장(章) 내(內)에서 사용하는 단어(單語)는 끝까지 같은 구조(構造)의 반복으로 쓰지 앞 구절(句節)에서는 도(道), 자(者)로 쓰고, 다음 구절(句節)에서는 도자(道者)로 쓰는 식의 마구잡이식 문장(文章)을 결코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다. 때문에 이 구절(句節)에서 종사(從事)의 목적어(目的語)는 도(道)가 아니라 도자(道者)이다. 그래서 올바른 띄어 읽기는 從事(종사) 於道者어도자)이다. 따라서 올바른 번역(飜譯)은 도(道)에 종사(從事)하는 자(者)가 아니라 도자(道者)를 좇는 일(종사(從事))인 것이다. 이제 첫 번째 구절(句節)은 바로 풀었다.
故從事於道者(고종사어도자); 그러므로 도자(道者)를 쫓는 일은, 여기서 도자(道者)는 도(道)를 깨쳤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다. 현대적인 단어로 바꾸면 바로 도사(道士)들이다. 이런 도자(道者)들의 ‘스스로 그러한’ 본연이 도자(道者)이든, 아니면 세상에 알려진 허명(虛名)으로서의 도자(道者)이든 관계없이 하여간 세상이 도자(道者)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을 숭상하여 좇는 일을 노자(老子)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무엇인지 함께 보자.
道者同於道(도자동어도); 이 말은 도자(道者)를 도(道)와 같이 본다는 말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중을 불법(佛法)이라고 착각하여 존경하고, 목사(牧師)를 하나님인 것처럼 추종하는 것이다.
德者同於德(덕자동어덕); 이 말도 마찬가지다. 덕자(德者)를 덕(德)과 같이 본다는 말이다. 결코 이 말들이 도자(道者)가 도(道)와 같고 덕자(德者)가 바로 덕(德)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렇게 알아들으면 노자(老子)의 가르침이 허무맹랑한 소리가 되어버린다. 만약에 도자(道者)가 바로 도(道)라면 노자(老子)의 사상(思想)은 도사(道士)들을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가 되어버린다. 그것을 염려하여 노자(老子)는 여기서 분명히 그러지 말라고 못 박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2천5백 년 동안 우리는 노자(老子)의 말을 거꾸로 알아들어 온 것이다. 노자(老子)는 도(道)를 얻었다고 말로 떠들어 자랑하거나 신통력을 내세워 도자(道者)로 인정받으려 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아침을 못 넘기는 회오리바람과 하루를 못 가는 소낙비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들의 의미를 혹 사람들이 잘못 알아들을까 염려하여 노자(老子)가 한 줄 더 넣어놓은 것이 바로 뒤따라 나오는 구절이다.
失者同於失(실자동어실); 직역하면 ‘실자(失者)는 실(失)과 같다.’ 이다. 여기서 실(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분분(紛紛)하다. 누구도 딱 부러지게 실(失)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해서(註解書)가 이 글자를 풀지 못하고 그냥 실(失)이라고만 옮기고 있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실(失)을 도(道)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서 덕(德)과 동격(同格)의 어떤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失)을 설명하기 위하여 억지로 덕(德)에 실(失)과 반대되는 ‘얻음’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우기기도 하는 것이다. 공연히 실(失) 때문에 덕(德)의 의미가 득(得)으로 바뀌어버리는 촌극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말로 실(失)이란 글자를 사용했다면 노자(老子)는 반드시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부연이나 그에 관련된 다른 문장(文章)들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도덕경(道德經) 전체를 통하여 실(失)이라는 것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실(失)이란 것이 자의(字意)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때문에 이 실(失)은 그냥 ‘잃을 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아야만 이 문장(文章)들이 명료하게 풀릴 수가 있는 것이다. ‘잃은 자는 잃은 것과 같다.’ 이다. 노자(老子)가 이 구절(句節)을 넣어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이 장(章)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도자(道者)가 도(道)와 같고, 덕자(德者)가 덕(德) 그 자체라면 그런 것들을 잃은 사람은 잃음과 같은 것이겠느냐’ 하는 소리다. 도(道)와 덕(德)을 얻은 사람이 도(道)와 덕(德)이라면 도(道)와 덕(德)을 잃게 되면 그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잃었다 하여 잃음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도(道)나 덕(德)을 얻었다 하여 도(道)나 덕(德)과 같아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도(道)나 덕(德)을 얻었다, 구했다 하는 것이야말로 짧은 회오리바람이요, 금방 그칠 소낙비와 같이 허망한 것이라는 게 노자(老子)가 하고 싶은 말이다. 얻었다고 말하여 존경을 받건 잃었다고 여겨져서 비난을 받건 관계없이 그 자신은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연(自然)이고 ‘스스로 그러함’ 이다. 도자(道者)다, 아니다 하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과는 관계없는 허울이며 얻은 이름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허울과 이름을 말로 떠들어 자랑하지 않는 것이 바로 희언(希言)이다. 노자(老子)는 자기가 도(道)를 밝혀 말하면서 그것으로 해서 훗날에 도(道)를 얻었다는 자(도자(道者))들이 생겨 도(道)를 떠들고 다니면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할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노자(老子)가 관(關)을 빠져나가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 줄의 가르침도 남기지 않고 도(道)를 소리 내어 천하에 알리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도(道)를 좇되 도자(道者)를 좇지 말라는 중요한 가르침이 바로 이 장(章)의 핵심(核心)이다. 여기까지의 번역(飜譯)을 이제 정리해서 읽어보자.
직역(直譯); 그러므로, 도자(道者)를 쫓는 일은 도자(道者)가 도(道)와 같고, 덕자(德者)가 덕(德)과 같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잃은 자(者)는 잃음과 같을 것이다.
同於道者, 道亦樂得之. 同於德者, 德亦樂得之. 同於失者, 失亦樂得之. 信不足, 有不信焉.
주(註); 여기도 직역(直譯)을 싣기에 앞서 주(註)를 먼저 붙인다. 이것은 독자(讀者)들이 번역(飜譯)을 보기 전에 원문(原文)을 보고 먼저 생각해보기를 권하는 때문이다. 원문(原文)을 보고 어떤 내용이 머릿속에 잡히는가? 일반적인 번역태(飜譯態)가 어떤 것이었는지 먼저 소개를 하면 다음과 같다.
同於道者(동어도자), 道亦樂得之(도역락득지); 도(道)와 같아지면 도(道)가 있는 자도 또한 이를 얻어서 즐거워하고
同於德者(동어덕자), 德亦樂得之(덕역락득지); 덕(德)과 같아지면 덕(德)이 있는 자도 또한 이를 얻어서 즐거워하니
同於失者(동어실자), 失亦樂得之(실역락득지); 실(失)과 같아지면 실(失)도 또한 이를 얻어서 즐거워하니
信不足(신부족), 有不信焉(유불신언); 신실함이 부족하면 신뢰받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번역 한 가지를 더 보자.
同於道者(동어도자), 道亦樂得之(도역락득지); 도(道)와 같아지는 자는, 도(道)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며
同於德者(동어덕자), 德亦樂得之(덕역락득지); 얻음과 같아지는 자는, 얻음 또한 그를 즐거이 얻는다.
同於失者(동어실자), 失亦樂得之(실역락득지); 잃음과 같아지는 자는, 잃음 또한 그를 즐거이 얻는다.
信不足(신부족), 有不信焉(유불신언); 믿음이 부족한 곳에는, 반드시 불신이 있게 마련이다.
어느 번역(飜譯)이든 모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크게 세 가지 문제인데, 첫 번째는 이런 내용의 말들이 서두에서 나온 希言自然(희언자연)이나 ‘회오리바람이 아침을 마칠 수 없고, 소낙비가 하루를 갈 수 없다.’는 말들과 의미와 문맥상(文脈上) 전혀 연결이 안 된다는 점이고, 마지막 종언(終言)인 信不足(신부족), 有不信焉(유불신언)과도 동떨어진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가 마지막 구절은 착간(錯簡)으로서 제17장에 들어 있던 것이 여기에 잘 못 끼어든 것이라고 단정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서두의 말들도 잘못 끼어들기는 마찬가지다. 회오리바람과 소낙비가 나머지 구절(句節)들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문제는 논리적인 연결이나 수미상관은 차치하고 이 말들이 도무지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도(道)와 같아지는 자를 도(道)가 역시 즐거이 얻는다는 게 무슨 말일까? 이 말이 이해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도자(道者)일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이해가 안 되어야 정상이다. 왜냐하면 노자(老子)가 이해 안 되는 말을 일부러 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리에 안 맞는 말을 해놓은 것을 사리에 맞는 말로 옮겨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니 원래 이게 납득이 되는 소리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생각도 못해온 것이다. 읽는 사람을 위한 노자(老子)의 세심한 배려가 아무 보람이 없었던 것은 여기뿐만이 아니었다. 한자(漢字)가 워낙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가 없는 그림문자인 탓에 그 부족한 문자(文字)의 표현 한계 내에서 가급적 오해가 없도록 뜻을 전달하기 위해 옛 선인들이 얼마나 고심에 고심을 했을까를 생각하면 읽으면서 마음이 아플 정도다. 그런 선인들의 고심과 정성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의 고전(古典)을 대하는 자세는 너무나 안일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글인데도 그저 대충대충 읽고 그런 뜻이겠지 하고 넘어가는 데다 한 번 앞사람이 그렇다 하면 그것이 그냥 2천년 동안 이어져 온다는 것이다. 그저 배운 대로 가르치고 그것을 그대로 또 다음 세대에 가르치다 보니 노자사상(老子思想)이라는 것이 앞뒤가 하나도 안 맞고, 한 장(章) 내(內)에서도 수미(首尾)와 몸통이 따로 노는 유치하고 난삽한 문집이 되어온 것이다. 여기서 노자(老子)의 말뜻은 이런 것이다. ‘만약에 도자(道者)가 도(道)와 같다면 도(道) 역시 도자(道者)를 얻는 것을 즐거워할 것이고, 덕자(德者)가 덕(德)과 같을 수 있다면 덕(德) 역시 덕자(德者)를 얻어 즐거워할 것인데, 그렇다면 잃은 자가 잃음과 같다면 잃음 역시 잃은 사람을 얻어 즐거워하겠느냐?’ 하는 소리다. 마지막의 실(失)에 이 말을 알아듣는 키가 있다. 어떤 것들을 죽 나열하여 말한 다음 ‘이와 같은 것들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과 같다.’ 라 해버리면 앞에 나열한 것들은 한꺼번에 모두 부정이 되는 것이다. 노자(老子)가 실(失)을 말한 것은 앞에 말한 것들을 ‘있을 수 없는 일’ 또는 ‘아닌 것’으로 부정하는 표현법이다. 이 실(失)이 있기 때문에 노자(老子)의 말은 오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함에도 2천5백 년 동안 사람들은 이 실(失)의 의미를 억지로 만들어내면서까지 노자(老子)의 뜻을 왜곡(歪曲)하여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는 ‘믿음이 부족하면 불신이 생긴다.’는 말까지 착간(錯簡)이라고 우겨온 것이다. 다른 곳에 들어갈 구절(句節)이 잘못 들어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말은 서두의 希言自然(희언자연)에 상응하는 결론으로 빠져서는 안 되는 말이며, 오히려 이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하여 노자(老子)는 이 장(章)을 쓴 것이다. 노자(老子)는 같은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계속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버릇이 있다. 도덕경(道德經) 전체가 따지고 보면 몇 가지 안 되는 말의 반복 또 반복이다. 그것을 요약하면 ‘남과 싸우지 마라, 나서지 마라, 말로 떠들지 마라, 죽은 듯이 조용히 몸이나 잘 보존하고 살아라.’ 이다. 이게 다다. 그것을 무려 5천 자나 되는 잔소리로 골백번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경(道德經)의 가치는 그 잔소리 하나하나가 진실로 아름다운 소리들이며, 살아가는 데 가슴에 담아야 할 소중한 격언(格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치로운 것은 그 문학적(文學的) 표현(表現)들이다. 도덕경(道德經)에서 노자(老子)가 보여준 표현법과 수사(修辭)의 미학적(美學的)인 아름다움은 한자(漢字) 문화(文化)의 백미(白眉)다. 5천 글자 모두가 아름다운 시(詩)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원문(原文)을 직접 읽고 음미(吟味)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남이 번역(飜譯)해 놓은 도덕경(道德經)은 아무리 읽어봐야 얻을 게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사람에게서 요리의 맛을 말로 전해 듣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장(章)의 번역(飜譯)을 같이 보자.
직역(直譯); (만약에) 도자(道者)가 도(道)와 같다면, 도(道) 역시 그 얻음을 기뻐하고, 덕자(德者)가 덕(德)과 같다면 덕(德) 역시 그를 얻어 기뻐할 것인데, (그렇다면) 잃은 사람이 잃음과 같다면 잃음이 역시 그를 얻어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럴 수는 없다.) 믿음이 부족하면 불신이 생긴다.
주(註); 同於道者(동어도자)는 道者同於道(도자동어도)의 줄임이다. 앞에 나온 말이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고, 같은 말의 반복을 피하기 위한 서술법이기도 하다.
도자(道者)를 도(道)라고 착각하면 결국은 완전할 수 없는 도자(道者)로 해서 완전한 도(道)에 대한 불신이 생길 것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오늘날 모든 종교와 교단에 다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종교가 지향하는 본질적 근원이 아니라 성직자나 목회자들 개인에 대한 우상화나 신격화가 조장되어 목자(牧者)가 양 떼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초원과 물을 창조해내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둔갑하는 가치의 전도(顚倒)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고 있다. 성직자들의 자질적(資質的) 결함과 신도들의 맹신(盲信)으로 해서 종교 자체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지고 결국 불신이 생기는 것은 세계의 종교에 예외가 없다. 결코 성(聖)이 될 수 없는 자들이 성(聖)을 팔고 다니기 때문에 성(聖)이 더렵혀지는 것이다. 그것을 염려하여 노자(老子)는 오로지 ‘희언(希言)하라’ 가르치는 것이다. 도자(道者)라 하는 자들을 도(道)와 같은 것으로 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로 가치로운 한마디가 아닐 수 없다. 장자(莊子)의 지북유편(知北遊篇)에 도(道)가 사람이 얻어 소유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이 부분은 순(舜)임금이 물은 데 대하여 승(丞)이란 사람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 대화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장자(莊子)에 실린 것이 아니라 장자(莊子)의 픽션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내용 자체가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이 장(章)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