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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제 19장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은 끝나고 이제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수난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주간에 발생한 사건들이 수록되어 있다. 본장은 예루살렘 입성 직전의 사건과 교훈이며 더불어 고난 주간의 첫째 날 월요일에 일어난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지상 생애는 그 자체가 고난과 수고로 점철되었지만 그 중에도 마지막 한 주간은 고난과 수가가 최절정에 이른 결정적 순간이었다. 이 기간의 예수의 사역은 공적 사역, 제자들에 대한 사역, 단독 사역으로 나눈다.
첫째, 공적 사역이다. (19:28-21:38절)
특징은 대적들과 논쟁인데 일요일은 예루살렘 입성이며, 월요일은 성전 숙정,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이고, 화요일은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한 논쟁, 부활에 대한 논쟁, 감람산 강화 등이다.
둘째, 제자들에 대한 사역이다. (22:7-53절)
특징은 유월절 예식과 체포를 다루는데 수요일은 침묵하셨고, 목요일에 유월절 예식 제정, 성만찬, 자신의 체포와 베드로의 부인 예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마지막 이적 등이다.
셋째, 단독 사역이다. (22:54-23:49절)
특징은 고난과 십자가 사건이다. 금요일에 매를 맞으시고, 공회에서 심문 받으시고, 빌라도에게 심문 받으시고, 헤롯에게 심문 받으시고, 빌라도에게 다시 심문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다.
1. 삭개오를 만나심 (19:1-10절)
삭개오를 만나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사건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중에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찾아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열정적인 사랑과, 사람의 조롱과 멸시를 무릅쓰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죄인의 간절한 열망을 보여 준다. 삭개오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일어난 마지막 회심자이다.
‘삭개오’는 전통적인 유대인 이름이며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 사람은 여리고 성의 세리장으로서 여리고는 베레아 지방으로부터 요단강을 건너가는 길목에 위치한 세관이 있었다. 이 세관은 주로 길르앗의 향료 등 여러 상품에 대해 통행세를 징수한 것으로 보인다. 삭개오는 세관의 책임자였으며 로마의 막강한 공권력을 이용하여 의도에 따라 자율적으로 세금을 부과했을 것이며 자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누가는 이 사람을 소개하며 ’부자‘라고 하였다. 마침 예수께서 여리고 성에 들어가 성 내를 지나가셨다. 삭개오가 예수를 보고자 한 이유는 여리고 밖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소문을 듣고 그를 따르는 군중을 보면서 예수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를 볼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근접할 수 없었고, 둘째는 키가 너무 작아서 군중 속에 파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를 만나는데 방해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예수 만나기를 포기해야 한다.
삭개오는 한 가지 방법을 간구했는데 군중들 앞으로 달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 삭개오는 예수의 일행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앞질러 가서 먼저 기다리려고 한 것이다. 이는 예수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두 요인을 극복하려는 삭개오의 의지가 나타나 있다.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는 잎은 뽕나무이지만 열매는 무화과가 열리는 나무로서 ‘무화과 뽕나무’라 불리는데 가지가 널리 퍼지고 단단하여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삭개오는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방향을 정확히 분석하고 사람이 많은 것은 피하기 위하여 그들을 앞질러 달려갔고, 키가 작은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높은 곳을 선점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러 삭개오를 쳐다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나무 위에 있는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셨는데 삭개오의 이름을 어떻게 아셨는지 알 수 없고, 제자들 외에는 이름을 부르신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를 지목하여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은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신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인격적 초대는 단순한 부름에 그치지 않고 삭개오의 집에 함께 머무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하여 지혜를 동원하여 한계점을 극복했던 열정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예수께서는 주권적인 초대에 이어 그의 집을 방문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초청에 삭개오의 응답은 전격적이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다.’는 말은 예수의 제안을 한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매우 감동적인 장면으로 예수의 인격적인 부르심과 죄인의 전격적인 영접은 구원의 눈부신 접촉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누구든지 예수의 초청을 기쁨으로 순종하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려있는 것이다. 삭개오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명성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리장이라는 직책, 부당한 세금 징수로 인하여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받고 있었고, 자신의 부를 축적함에 있어 죄책감으로 고민하고 있던 중 예수의 초청과 방문은 어둠 속에 비쳐오는 한 줄기 광명한 빛이었을 것이다. 높은 직책과 엄청난 부를 가졌어도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을 인정하거나 초청하지 않은데 반하여 명성이 높은 예수께서 자기를 초청한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고, 모든 사람이 자기를 죄인이라고 모욕하는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 구원해 주는 용서의 선언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행위는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 죄인의 집에 머물며 그와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죄인의 죄를 인정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매국노와 같은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드디어 잔치가 시작되었고 식사의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삭개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특별한 제안을 한다. 삭개오는 예수에 대한 호칭을 신앙적인 면에서 ‘주여’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예수를 메시야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고백을 한 것이며, ‘보시옵소서.’라는 말은 자신의 의지의 단호함과 실천 가능성에 대해 자신만만한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강요에 의한 타율적인 선언이 아니라 기쁨이 넘치는 자율적인 결단인 것이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을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당시 랍비들이 제시한 구제비는 수입의 소유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보다 훨씬 많은 파격적인 액수 즉 자기 소유의 절반을 구제비로 제시하였다. 이는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 는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떠나간 부자 청년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또한 율법에 의하면 부정하게 취한 것을 돌려줄 때에는 1/5을 덧붙여 상환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당하게 취한 것을 반환할 때에는 20%의 배상금만 추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삭개오는 남의 것을 도둑질했을 때 배상하는 4배의 배상을 하겠다는 것으로 이러한 파격적인 행위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방향을 새롭게 바꾸는 회개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삭개오의 선언에 대한 예수의 응답 역시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즉 구원이 오늘 이 집에서 이르렀다는 것이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죄인의 집이었던 이곳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것이다. 이러한 기적적 축복은 삭개오의 헌신적 자아 부인의 선언에 따른 결과임이 분명하다. 구원은 장차 이루어질 미래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아 부인의 실천적 결단을 통해 현재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동안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배타적인 대접을 받아온 삭개오를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게 한 형제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셨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 선언은 삭개오가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복권은 정치, 사회적 복권을 의미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서 전인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언 후에 예수께서는 그 선언에 대한 신적 권위를 부여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이란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를 다시 회복시켜 당당하고 품위 있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온갖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혼돈과 파멸로 달려가는 인간을 구원하여 영원한 하나님 백성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예수의 삶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 병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벙어리, 소경, 절뚝발이, 같은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 불가능한 자들을 치유하고 회복시켜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삭개오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구원시키는 삶이었다.
2. 은 열 므나 비유 (19:11-27절)
삭개오에 관한 기사와 더불어 본서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 당시 헤롯 왕가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헤롯은 죽을 때에 자기 왕국을 세 아들에게 분할해 주었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 아켈라우스가 각각 영지를 받았으며 이 중에 아켈라우스는 로마 당국의 인준을 받기 위해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가 왕이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별도로 50명의 사절단을 구성하여 로마에 파송했으며 그 결과 아켈라우스는 왕의 칭호는 받지 못했고 자기가 받은 영지의 통치권만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반대한 유대인들을 숙청하였고 철저하게 징계하였으며 자기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는 큰 상급을 내렸다.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사건을 배경으로 자신의 재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비유는 달란트 비유와 비슷한 내용이나 주제에 있어 차이가 있다. 달란트 비유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와 재능들을 최대한 선용해야 한다는데 강조점이 있지만 므나 비유는 무리들의 그릇된 천국관과 메시야 관을 지적하는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세 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받은 사명에 대한 실천적 결단과 충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어떤 환난이나 고난이 닥쳐와도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내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 나라는 당장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귀인’을 예수라고 했을 때 왕위를 받으러 간다는 말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왕 중의 왕으로서 심판주로 오심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 된다. 이어서 먼 나라로 간다는 것은 귀인이 돌아올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됨을 암시한다. 귀인은 종 열 명을 불러 각각 은화 한 개씩을 주며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지시했다. 달란트 비유는 세 명의 종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열 명의 종이 등장한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다섯 달란트, 세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지만 여기서는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한 므나씩 주었다. 므나는 한 달란트의 1/60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적은 액수이다. 이는 적게 받은 사명에 대한 충성도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달란트 비유가 제자들에게 준 것이라면 므나 비유는 무리들에게 주신 비유하고 할 수 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겼는데 그 재능대로 소유를 맡겼지만 장사하라는 지시는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귀인은 종들에게 ‘장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창조적으로 수행하라는 것이다. ‘프라그마튜오마이’라는 이 말은 상업적 이윤 추구와 관계되는 말로서 이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귀인이 떠나자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그의 왕 됨을 방해했는데 이는 예수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유대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자신들의 외식 행위를 비난하고 기득권을 위협하는 예수를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로 여겼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추종했던 군중들도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리라 기대했던 것이 사라지자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를 죽음의 자리로 내몰았던 것이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종들이 어떻게 장사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 비유의 종말론적 의미는 마지막 심판 날에 모든 사람이 그 일한 바대로 선악 간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장사한 것’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장사한 내용 전체를 말하는데 처음으로 부름을 받은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다고 보고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의 한 므나’라는 점이다. 종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과 건강과 물질과 생명까지도 주의 것이라는 것이며 ‘남겼다.’는 말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최대한의 노력으로 창조적이며 생산적으로 일했다는 것이다. 주인의 관심은 이윤의 남긴 양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장사의 내용 즉 삶의 전 과정이다.
주인은 종에게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했다. 마태의 달란트 비유와 비슷하게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대한 칭찬과 보상이 강조된다. ‘작은 것’이라는 말은 ‘미크로스’인데 이 말의 최상급인 ‘엘라키스토스’라고 하여 종에게 맡겨진 므나가 ‘지극히 작은 것’임을 강조한다. 달란트 비유는 ‘더 많은 것’을 맡긴다고 했는데 무엇을 맡겼는지 알 수 없지만 누가는 구체적으로 밝힌다. 즉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 즉 열 고을을 다스리는 왕의 권세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한 므나로 장사를 한 것에 비하면 너무나 큰 축복이다. 이는 심은 대로 거두는 천국의 법칙이다. 두 번째 사람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겼는데 그에게 주는 보상은 역시 다섯 고을을 맡기게 된다. 달란트 비유는 능력대로 맡기고 보상은 일괄적으로 더 많은 것을 맡긴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능력급, 성과급으로 하고 있다. 이는 실천적 과정에서 쏟은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 번째 사람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다. 이 사람 역시 ‘주의 한 므나’라고 함으로써 청지기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만 했지 장사를 하지 않았다. 그가 주인의 명령을 거역하고 장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로서 주인에 대해 스스로 느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그는 주인을 엄한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엄한’이라는 말은 엄격하고 날카롭다는 것이다. 주인을 까다롭고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가급적 주인의 일에 참여하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즉 장사를 하다가 손해를 볼 경우 주인의 호된 책망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이익과 손해를 따지기보다는 종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느냐를 관심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주인이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자라고 하였다. 이는 착취자를 묘사하는 말이며, 동시에 악질 지주 계급을 묘사한다. 즉 주인은 수고도 하지 않고 종들을 혹사시켜 자신의 이익으로 만드는 악독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수고하여 장사를 해도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은 없었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장사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청지기 정신을 왜곡한 것이며 주인의 번영이 곧 자기의 번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주인은 그에게 ‘악한 종아’라고 불렀다. 이는 ‘착한 종아’라는 말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저주가 섞인 응답이다. ‘악한’이라는 말 ‘포네로스’는 병든 자라는 것으로 죄에 오염되어 영적 중태에 빠진 인생의 참경을 나타낸다. 누가는 독특하게 종이 주인에게 진술한 내용 그대로 종에게 심판하겠다고 했는데 이와 같이 사명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기 인생의 결말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주인은 종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상식선에서 반박했는데 주인이 돈을 나누어 준 것이 자신의 이익이 목적이었다면 그 돈을 은행에 맡겨 두어 원금과 이윤을 찾으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을 종에게 맡긴 것은 이윤 추구가 목적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돈을 종들에게 맡긴 것은 주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제 주인의 결정은 내려졌는데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가진 자에게 주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미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한 자에게 한 므나를 더 준다는 의미보다는 한 므나를 빼앗긴 자에 대한 심판이다. 장사를 하지도 않고 이윤을 남기지 않은 자에게는 그가 받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살 가치조차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받은 재능, 건강, 재물을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사장시켜 버린 자는 그 모두를 빼앗긴다는 것이다. 마치 자동차를 운행하지 않고 세워만 두면 녹이 쓸고 고철이 되고 결국 패차 처분당하는 것과 같다.
주인의 명령을 받은 다른 종들이 그 명령을 이해할 수 없어 말하기를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라고 했다. 이는 일반적인 보상의 개념으로 자기가 받을 보상을 이미 다 받은 사람에게 다시 남의 보상까지 겹쳐서 준다는 것은 공평한 처사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천국의 보상 개념은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예수께서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의 요지는 성도들의 이 땅에서 삶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강력히 주지시킨다. 단 일회성의 삶을 살아가는 자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때에 천국에서 보상이 크지만 자신을 위해 사는 자는 이 땅에서 받은 그 모든 것까지도 다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사는 자는 그 삶에서 생명의 향기가 나고,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사는 자는 신령한 결실 즉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열 명의 종을 다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 비유가 세 가지 형태의 종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졌기 때문이다. 나오지 않은 종들은 이 세 종류의 종들에 포함되어 있거나 아니면 장사를 열심히 했지만 원전을 날리고 이윤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어서 주인의 왕 됨을 반대하던 원수들을 끌어내어 죽이라고 명령한다. 주인은 저들을 가리켜 ‘원수들’이라고 지목하면서 매우 단호하고 분노에 찬 감정을 표출한다. 이는 복음을 거부하고 죄악된 생활을 고집하는 자, 예수의 왕 됨을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방해하는 세력들은 마침내 죽임을 당할 것이다.
3. 예루살렘 입성 (19:28-44절)
본문은 예수의 수난 주간 중 첫째 날에 대한 기사로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내용이다. 겸손하고 온유하신 평강의 왕이신 예수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자기 목숨을 내어줌으로써 마침내 인류 구속을 성취하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의의를 지닌다. 이 입성은 ‘승리의 입성’으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로서 자신을 만민에게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사람들을 앞서서 가셨다. 이는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이 선두에서 진두지휘를 하여 부대의 사기를 높이듯이 수난과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시고 단호하게 나아가신 것이다. ‘감람원’이라는 산은 ‘감람산’ 혹은 ‘올리브산’이라고 하며 예루살렘 교외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이 산에는 벳바게와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었다. ‘베다니’는 ‘사랑의 집’이라는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3.5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이 마을에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제자 두 명을 앞서 보냈는데 누구를 보냈는지 알 수 없으나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것으로 보아 여기서도 이 제자들을 보냈을 것이며, 맞은 편 마을이란 벳바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는 말은 구약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의 성취라 할 수 있다.
*슥9:9-10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암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아무도 타 보지 않는 나귀 새끼를 구하신 것은 제물에 바치는 정결한 짐승을 구별하는 종교적 의식법에 따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종교적 의식까지 갖추도록 하여 그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지시는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며 자신의 발걸음이 구약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임을 나타낸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여기 ‘주’에 해당하는 ‘퀴리오스’라는 말은 예수 자신을 나타내는 말로서 나귀의 소유주로서 ‘주’가 아니라 신앙적 의미에서 ‘주’로 보아야 한다. 제자들이 마을로 들어가서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귀가 묶여 있음을 보고 나귀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묻기를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했다. 마가는 ‘거기 섰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라고 했고 그들이 묻는 물음도 누가는 ‘남의 것을 왜 푸느냐’라는 식으로 물었다면 마가는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고 물음으로써 소유권에 관계없이 나귀 새끼의 사용 용도를 물은 것이다. 누가의 말 역시 ‘아직 새끼에 불과한 나귀를 풀어 무엇에 쓰려는가.’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했고 주인들은 더 이상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주인들이 그 말을 인정했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신적인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 제자들이 나귀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웠는데 겉옷을 걸친 것은 안장 대신 사용하고자 함이었지만 해석에 따라서는 왕이나 귀인에게 보이는 존경의 표시라고 보기도 한다. 타 복음서는 예수 스스로 나귀에 타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를 태웠다는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 경의를 표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겉옷을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에 폈는데 이는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이다. 마태와 마가는 많은 사람, 무리들이라고 하며, 제자들뿐만 아니라 나뭇가지도 길에 폈다고 하였다. 요한은 그것을 종려나무가지라 했으며 환영하는 무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계신 것이다.
예수께서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신 것으로 보이는데 타 복음서에는 없는 장면이다. 제자들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찬양은 예수가 행하신 모든 능한 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오는 동안 바디메오의 사건을 보았고, 베다니를 지나오는 동안 나사로의 기사회생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누가는 예수의 활동을 하나님과 일치시키고 있는데 사람들은 예수가 행한 일을 두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는 예수의 치병활동이나 기적들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며,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체험했다는 고백이다. 무리들은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했다. 이는 시편 118:26절에서 따온 말로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왕’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예수께서도 므나의 비유에서 자신을 왕으로 나타내셨는데 무리들 역시 예수를 왕권의 권위를 지니시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이다. 물론 무리들이 인용한 시편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모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의 말이지만 이 말을 메시야와 관련시킬 때에는 예수의 승리의 입성의 예표로 이해한다.
찬송의 내용은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는 것인데 예수의 탄생 시에 천사들의 노래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말과 다른 어색한 느낌을 준다. 마태와 마가는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누가는 ‘호산나’라는 말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호산나’라는 말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의 말로서 무리들이 자기들이 본 바 예수의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했기 때문에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단지 정치적 메시야 입성으로 이해하고 환영하고 기뻐했으며 구원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이다. 예수를 찬양하는 소리를 들은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청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했다. 이 역시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무리들의 찬양이 신성모독의 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답변하셨다.
*합2;11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한 마디 말로 묵살하셨는데 이는 예수를 메시야로 환호하는 저들의 찬양이 합당하다는 것이고,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찬양의 필연성을 주장하신 것이다. 예수에 대한 메시야적 찬양은 특정한 사람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제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계획 아래 필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이 찬양은 계속 선포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찬양을 방해하거나 침묵을 지키는 것은 곧 죄가 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메시야 찬양 때문에 어떤 물리적 위험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찬양은 계속 되어야 하며 메시야 행진 역시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의 행진은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셨다. 예수께서는 성을 보시고 우시며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예루살렘의 장래의 일을 예언하신 것이다. ‘우시고’라는 말 ‘에클라우센’은 슬퍼하며 비통해하며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말한다. 이 증언 역시 누가만의 기록이다. 이 울음은 많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찬양을 받으신 후에 우신 것이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울음이며, 예루살렘의 장래를 애통해 하는 메시야적 눈물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인격화하여 ‘너’라고 부르시며 이는 예루살렘 성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인 동시에 수도 예루살렘을 말한 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말한 것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평화의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평화의 길이 있지만 자기들의 눈이 가리어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그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메시야에 대해 듣고 배웠지만 실상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오신 것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평화의 길이 영원히 막혀버린 것이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경고가 예언의 말씀으로 주어진다. 날이 이르면 원수들이 예루살렘 성 주위에 토성을 쌓고 성을 완전히 포위할 것이며 성을 공략하여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성전이나 성곽에 돌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허물어버린다는 것이다. ‘날’에 해당하는 말 ‘헤메라이’는 복수 형태로서 예루살렘 멸망뿐만 아니라 종말의 때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이 예언은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으로 일차 성취되었다.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기 위해, 성을 포위하고 방책을 둘러 쳤다. ‘토성’은 본래 말뚝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완전한 파멸을 맞게 되는 이유는 저들이 ‘권고의 날’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고의 날’은 ‘하나님이 저들을 방문하신 때’ ‘하나님이 구원하러 오신 때’를 의미하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저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호소했지만 저들이 믿지도 않았고 듣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 성전 숙정 (19:45-48절)
이 사건은 고난 주간 둘째 날 월요일에 일어난 일이다. 마태와 마가는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함께 서술하고 있으나 누가와 차이가 있다. 누가는 무화과나무 사건을 기록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하시며 우신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누가는 성전 숙정 사건을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즉 환전상이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에 대한 언급이나 예수께서 의자를 들러 엎어 분노를 표시했다는 말이 없다. 당시 성전은 이방인 구역에서 희생제물이나 기름과 포도주를 팔았다. 유대인 남자는 1년에 반 세겔씩 성전세를 납부해야 하는데 백성들이 당시 통용되던 헬라, 로마, 애굽의 화폐를 가지고 오면 이를 성전의 화폐로 환전해 주었다. 이럴 경우 종교 지도자들이 상인과 야합하여 비싼 가격으로 짐승을 팔고 환전 수수료를 고액으로 받아내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종교적 부패상을 여실히 반영하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셨다.
*사56: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기도한다는 것은 절대자를 향한 가장 기본적인 예배 의식인데 성전이 기도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성전의 종교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며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곳이라는 말이다. 즉 성전은 거룩한 곳이 아니라 부패의 온상이며 위선과 욕심과 투기의 장사꾼의 무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예레미야의 말을 인용하셨다.
*렘7:10-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전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연결된 신정국가에서는 나라 전체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온 민족의 정신적 지주요 종교적 핵심인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선언한 발언은 결국 정치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권위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신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는 종교의 타락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예루살렘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종교의 중심인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는 것은 예수의 호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성전 자체가 아니라 종교적 부패상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예수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집권자들이 예수를 추방하거나 체포하지 못했던 것은 성전 안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러 몰려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민중들의 예수에 대한 영향력 때문에 음모만 하고 있었지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유월절이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 왔을 것이며 예수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반대로 종교 지도자들은 위기감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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