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말씀 시간입니다.
오늘은, 시편, 칠십 삼편, 22절, 23절, 24절, 25절 말씀으로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보고싶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22절 :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절 :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절 :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절 :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아 멘
시인 윤동주는, 나라 잃은 치욕스러움과, 암울한 시대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에 대해 욕됨을 느끼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참회하는 마음에서 쓴 시가 그의 참회록입니다. 윤동주의 참회록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아래있음에도 아무것도 할수 없었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시인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그나마도 우리 인간이 할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며 자세입니다.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입니다.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아주 당당하게 카메라 앞에서는 정치인들을 보노라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목사라는 사람이 누구에게 가방을 주었다면서 하는 말이, '내가 가방을 주었을 때 받지 말아야하지, 왜 받았느냐'라고 괴변을 늘어놓는 것을 봤습니다. 책임이 자기에게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얼굴을 감싸쥐고 쥐구멍을 찾는 모습을 보고싶습니다.
죄없는 사람이 보고싶은 것이 아니라. 죄있지만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보고싶습니다. 예수님은 죄없는 사람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죄있으나 부끄워하는 죄인을 찾으셨습니다.
시편의 성도 역시 부끄러워했습니다.
"나는 우둔합니다. 나는 어리석고 무식합니다. 나는 주 앞에서 한 마리 짐승같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움을 알았기에 주님께 더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늘 주님을 가까이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나를 주님의 교훈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를 주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주님과 함께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게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나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하였음을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 할수 있음도 은혜입니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 예수님은 부끄러워하는 자를 찾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부끄러움을 아는 자가 되게해 주시며, 그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주님께 더 가까이나갈수 있는 믿음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