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카르야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웃들은
아기에게 어떤 이름이 주어질지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이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름을 받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요한의 탄생이 회개로 이끌어,
주저앉아 있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었다면,
이제 죽을 운명의 인간을 살리신 주님의 탄생이 곧 이어질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 묻는 말이 있습니다.
“아기가 누굴 닮았어? 엄마야, 아빠야?”
그런데 요한이 태어나자 사람들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합니다(루카 1,66 참조).
“누굴 닮았어?”라는 질문은 과거의 일이고,
“이 아기가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미래의 일입니다.
요한은 앞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주님께 세례를 줄 것이며,
불의를 일삼는 권력자의 폭력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자신은 서서히 작아짐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서 할례를 받는 내용입니다.
유대인 남자는 누구나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면
아브라함의 전통에 따라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는 이전의 내가 잘려 죽고 하느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할례가 신약으로 오면 세례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할례를 통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신 이유는 새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새로 태어나면 갖게 되는 것이 본성이고 그 본성은 새로운 이름 안에 갇힙니다.
하느님은 즈카르야의 아들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의아해합니다.
당시 요한은 흔한 이름이기는 하였으나 즈카르야 가문 이름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즈카르야는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씁니다.
그러자 묶였던 입이 열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왜 이름을 인간이 짓는 것보다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 그리 중요할까요?
그 이름을 누가 지어주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나의 세례명이 누구이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보다
그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것을
세례명을 통해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보다 그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어주셨다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요셉이란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어주셨다고 믿어야
그분의 뜻 안에 살고 그분 나라에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세례명은 세례로 하느님 가족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첫댓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들!
가정에서라도 세례명을 부르면 좋겠네요 ㅎㅎ
요즘은 이름(세속명, 세례명)이 잊혀져 가는 현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 엄마, ** 아빠 등으로 또는 자기, 당신으로 호칭합니다.
무의식을 담는 그릇인 이름을,
특히 세례명을 불러 하느님의 자녀임을 늘 새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