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생존21 - 지진,재난,전염병,전쟁,사고로부터의 생존
 
 
 
카페 게시글
사회,인간,삶 스크랩 ◆<一讀>좋아하는 일을 주방에서 찾다
和敬淸淑 추천 1 조회 370 15.08.29 14:21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좋아하는 일을 주방에서 찾다

 

 

 

처음에는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손을 대기 시작한 제빵,

단순히

전공과목이 지겨워 듣기 시작한 철학과 수업,

단순히 운동을 위해 시작한 춤.

이런 '딴짓' 속에서 단서가 보였다.

내가 무얼 할 때 즐겁고,

무얼 잘할 수 있는지 말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주방에서 찾은 진정한 행복

 

저자 안주원

친구들과 도시락 까먹으며

즐겁게 보내던 중학교 시절,

하와이를 시작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후

십 년 가까이 캘리포니아, 로드아일랜드,

뉴욕 등지를 오가며 다양한 경험을 했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2007년 코넬 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구글코리아에 입사했다가

예전부터 탐닉했던

음식과 요리에 대한 열정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의 존슨앤웨일즈의

조리 프로그램을 이수한 후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미슐랭 원스타 레스토랑 SPQR에서 인턴과정을 거쳤다.

이후

한식에 대한 열망으로

다시

귀국해 서울의 정식당에서 일했고,

현재는

경리단길의 한국술집 안씨막걸리에서

한국음식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홀로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그녀가

9년 동안 올인한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완벽하게 습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 음악도 듣지 않고

셈을 할 때도 늘 영어로 하려고 노력했으며,

어렵게

아이비리그 대학교에 합격해

미국에 정착하려고 애를 썼다.

 

전공인

산업디자인을 막상 공부해보니

예상했던 바와 달랐다.

뭔가를 만들고

사교적인 환경을 좋아하는 그녀에게는

연구실에 틀어박혀 

이론과 비용계산을 주로 하는

디자인 프로젝트에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전공과 무관한 호텔 매니지먼트,

케이터링, 그래픽 디자인 등의 수업을 받으며

이벤트플래닝, 살사 수업, 식당 아르바이트 등의

재미있어 보이는 일에 빠졌다.

 

그 결과로

그녀의 구직자 이력서는

결코

매력적이지 않았다.

 

같은 해에 졸업한 코넬의

학생 수만 4천명임을 고려할 때

학위 취득 후

무비자로 취업활동이 가능한 1년이

그녀에겐 너무나도 짧은 셈이었다.

 

더구나

통장엔 한 달치 월세와

약간의 생활비로 사용할 수 있는

800달러만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이래저래

심신이 지친 그녀는

결국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와서도 취업이 쉽지 않았다.

미국에서 사귄

남자친구는 구글에 입사한 후

그곳 자랑만 가득한데 

그녀는 자신의 신세가

점점 처량하다는 느낌이 들던 차에 

국제 콩그레스

실무 담당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서울대에 찾아갔더니 담당하던 교수님이

별 다른 질문도 없이 오케이했다.

하지만 주변에선

왜 한국에 왔냐는 시각이 많았다.

 

하루는

저녁에 무심코 메일함을 열었다.

구글 리크루터가 보낸 메일이었다.

 

구글코리아에서 신규 채용이 있는데

데이터베이스에서

그녀의 이력서를 보고선

면접을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강남파이낸스센터 22층,

안내데스크에서 그녀를 알아보았다. 

이후 몇 차례 면접을 거친 후

최종합격 통지를 받았다

 

 

 구글코리아의 복지와 사회적 대우가 엄청났다.

'구글러'라는 타이틀은 

심지어

미국 출장길에 마주친 출입국 관리 아줌마도 

신나게 도장을 찍어주며 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직장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

무료함과 열등감에 시달렸다.

남자친구와도 이별했다.

 2년6개월 만에

구글을 그만두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우연히 만난

미국인 노숙자와의 대화였다.

 

한창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로 출장을 가서

토요일 호텔 근처의 무료급식소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양파 100개를 까고 

피망 200개를 다져야 하는 일이었다.

 

봉사를 마치고

노인과 합석해 식사를 하는데,

한 노인은

"예전에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주말마다 끓여 먹던 스튜 생각에

더 밥을 맛있게 먹었다"며 고마워했고,

또 다른 노인은

"자신의 아내가 끓여주던

검보(스튜의 한 종류)가 최고"라고 자랑했다.

 

대화 도중

그녀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잠시 자리를 떠 화장실에 간 그녀는

행복감으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변기에 걸터앉아

한참을 울고 난 후 그녀는 깨달았다.

그녀가 직접 만든

음식을 통해 사람들과 교감하고,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들과 생각들,

그것이 얼마나 그녀에게

큰 즐거움과 보람을 주는지를 말이다.

이젠 그녀의 마음속에

아무런 불안감도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직서를 제출하다

 

어느 날,

퇴근 후 빨래를 개키고 있는 엄마 옆에

살포시 자리 잡고선

"하고 싶은 걸 해도 되는 거냐"

소심하게 물었다.

 

걱정했던 거와는 달리

엄마도 할아버지 반대로

미대를 못가서 후회했다고 반응했다.

TV를 시청하던 아빠도

이젠 더 맛있는 요리 배워서

해주는 거냐고 웃었다.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저 그만두고 싶어요"

 

출장갔던 매니저가 베이징에서 귀국했다.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그는 '오 마이 갓'을 연발하며

축하의 악수를 해댔다.

 

많은 동료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부럽다며

모두 축하의 인사맛을 건넸다.

오히려

퇴사를 부러워하는 

이런 아이로니에 얼떨떨해졌다.

이렇게

이십대 중반의

그녀는 요리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이미 제빵, 제과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쉴 새없이 베이킹과

음식 얘기를 해도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행복감을 느꼈었다.

 

대기업의 타이틀과

고액 연봉조차도 줄 수 없었던

그런 쾌감이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시작한

제빵 자격증까지 획득했다.

이후 강남에 위치한

조리자격증 학원에 등록했다.

새로운 요리 공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스튜 요리로

이 자격증마저 손에 쥐었던 것이다.

그녀의 도전은

한식, 일식으로 계속되면서

'요리'라는 새로운 연인을 만난 셈이었다.

 

그녀의

증조외할머니는 내장탕과 순대,

그리고

각종 김치를 맛나게 만들던

요리의 대가였다고 한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그녀의 아빠는 미식가였는데,

집에서 조기구이를 먹을 때도

몸통에 먼저

젓가락을 대면 호통이 떨어졌다.

먼저 꼬리를 따고,

아가미가 있는 목덜미부터 파고들어,

뼈대를 따라 살살 몸통을 해체한 다음

완벽하게 살코기와 가시를

분리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 탓에 

막연히 관심을 갖고 있던 요리가, 

회사생활이 싫어지면서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던 것이다.

 

저자 안주원, 안씨막걸리에서

 

연어머리는 버리는 게 아니야!

 

미국의 요리학교

존슨앤웨일즈로 또다시 유학,

그녀는

그곳에서 사귄 친구와 함께 2인 1조를 이루어

기말고사 과제를 수행할 때 

사전 시연을 했던 담당 셰프가 버린

연어의 머리 부위조차

요리로 만들어냄으로써 

테스트를 만점으로 통과하기도 했다.

 

이후 혹독한

현지 레스토랑의 인턴 과정을 거쳤다.

현대적인 이탈리안 요리로

미슐랭 스타까지 받은 SPQR은

끊임없이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무급 인턴으로 6월 4일 첫 출근을 했다.

감자 5mm 정육면체로 썰기,

양파를 두께 1mm 채썰기,

껍질 벗긴 피망 2mm 정육면체로 썰기,

샐러리 1.5cm 다이아몬드로 재단하기 등

하나같이 눈이 바지고

머리에 쥐가 나는 일들이었다.

 

심지어

사과박스만 한 통 하나

가득 들어 있는 줄기콩을

4mm 네모로 재단해야 했다.

8월,

3개월의 인턴십이 끝나자

이곳 셰프는 그녀가 남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한식이 하고 싶었다. 

 

 

귀국해서

서울 강남의 유명 레스토랑

정식당에서 약 2년 근무한 후,

그녀는 2015년 2월부터

서울 이태원 경리단 골목의

조그만 막걸리집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데,

 

국산 막걸리와

청주에 어울리는 안주를 만든다.

메뉴판엔 술만 있고,

안주는

조그만 칠판에 그때그때 쓴다.

 

손두부, 계란장조림, 오리구이, 김치 등이

그날그날

그의 손끝에서 마음대로 준비된다.

 

 

 

2013년,

미식가이자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던 아빠가

뇌종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그녀의 행복 찾기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다음검색
댓글
  • 15.08.29 19:06

    첫댓글 Good

  • 15.08.29 22:11

    정말 열정적인 사람이군요 대단합니다 나도 저 열정의 반에반에반반만 있어도 성공했을듯

  • 15.08.31 12:27

    안씨 막걸리 한번 가고 싶네요.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