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 운하(Suez Canal)는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집트의 운하로 1869년에 완공 되었다.
파나마 운하와 더불어 전 세계 해운업과 해양사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경계 역할도 수행한다
세계 지도를 보면 유럽에서 인도와 아시아로 나아가 무역을 하기 위해선 배를 타고 유럽에서 출발 →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항해 →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끄트머리 희망봉에 도착 → 인도양 도착 → 목적지 도착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아프리카 대륙을 돌려면 요즘 컨테이너선으로도 한 달은 걸리며 옛날 배로는 몇 개월이 필요했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이어지는 자리의 폭은 굉장히 협소할 뿐더러 북으로는 지중해로 연결되고 남으로는 홍해를 지나 인도양으로 이어진다.
즉 아프리카 대륙을 빙 둘러 가지 않고 유럽에서 바로 인도양으로 갈 수 있는 운하만 있다면 엄청난 교통의 요지가 됨이 불을 보듯 뻔하였다.
오늘날 존재하는 현대적인 운하의 역사는 1805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가 오스만령 이집트의 대총독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시작했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 뒤 서방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러 1841년 사실상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에 메흐메트 알리와 우호관계를 맺은 프랑스가 주도하여 운하 개통을 위한 주식을 공매하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페르디낭 M. 레셉스(Ferdinand M. Lesseps)인데, 프랑스 외교관으로서 이집트에 파견된 차에 메흐메트 알리 및 그 아들과 친분관계를 쌓았다.
메흐메트 알리 사후 그 아들 사이드 파샤가 이집트의 새 지도자가 되자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이집트 법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에 운하의 운영권을 양도하고 99년간 운영 후 운영권을 이집트에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
문제는 자금 조달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땅을 파내는 난공사이므로 당연히 자금도 많이 소모되었다.
수에즈 운하회사는 주식 총 40만 주를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지만, 이른바 큰 손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정부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하지는 않았고, 40만 주 중 20만 7,000 주에 달하는 프랑스 측 지분은 모두 프랑스 국내 개인 투자자들에게 나뉘어서 매각되었다.
그나마도 대규모로 사겠다는 고객이 없어서, 주주가 21,000명에 달해서 평균 구입 주식 수가 10주도 안 되었다. 100주 이상 구입한 사람이 199명밖에 없을 정도였다.
나머지 주식들은 운하에 관심이 있을 법한 주요 강대국 정부에 분할매각을 추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당시 제안 받은 나라들은 영국, 러시아, 미국, 오스트리아 등이었는데, 영국을 제외하면 수에즈 운하가 필요한지 의문이 드는 나라들이었다.
프랑스가 이들 정부에 주식 매입을 타진한 이유는 당연히 영국의 방해에 맞서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자유무역이란 개념이 없어서 해군력으로 해로를 유지해야하는 당대 기준으로 수에즈 운하를 사용할 일이 없는 위치에 있는 국가들에 접근한 건 꽤나 어이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영국이었다.
결국 우에즈 운하의 운명은 돈의 권력에 좌우되었고, 자금을 투자한 것은 오트피낭스였다.
오트피낭스는 세계 금융 마피아였고, 로스 차일가가 중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