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20
4월7일[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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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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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keXCFxq6KY
[팔로티회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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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미사 생중계(조정래 시몬 신부님,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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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부족하고 비참한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오랜만에 손맛도 보고 꽃구경도 할 겸 남도 쪽으로 공동체 엠마오 소풍을 갔습니다. 뭐가 그렇게 먼지? 몇 시간을 달려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여기저기 나들이를 다녔지만, 봄비에, 황사에 제대로 된 꽃구경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닌가 보다 하는 마음에 꽃구경을 포기하고 그럴싸한 포인트를 찾아 낚싯대를 드리웠습니다. 남쪽으로 많이 내려왔으니, 수온도 괜찮고, 물때도 좋아, 폭풍 입질을 기대했습니다.
결과는? 꽝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쉼 없이 자리를 옮겨 다녔지만, 그 어떤 생명체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삼박사일 간의 고된 여정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 딱 도착했더니, 목련꽃이며 수선화며, 산수유며, 여기저기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해서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에 혹시나 해서 자주 가는 집 근처 단골 포인트로 밤낚시를 갔었는데, 결과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간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폭풍 입질이 계속되었습니다. 후두둑 하는 입질과 함께 선상 낚시급 우럭들이 올라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앞으로 엠마오 소풍 절대 멀리 가지 않겠다. 우리 집이 천국이고, 우리 집에 포인트고, 우리 집이 꽃길인데, 가기는 어딜 간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느님 나라는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공동체가 엠마오 길의 제자들처럼 부활 예수님을 만나뵙기 위해 멀리 엠마오 소풍을 갔었지만, 제대도 된 꽃구경도, 제대로 된 손맛도 못보고, 제대로 주님도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우리가 갈구하던 주님은 바로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우리 마을 안에 계셨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느 다른 하늘에 존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때로 부족하고 비참한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티격태격하는 우리들의 인간관계 안에 현존하십니다.
이번 주말도 많은 피정객들이 저희 집을 찾아주셨습니다. 한팀이 나가고 나니, 바로 또 한팀이 들어왔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바빴습니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침실 셋팅하고, 회떠오고, 치킨 사오고, 강의하고, 불지피고...정신없이 하루가 또 지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찾기 힘들었던 부활 예수님께서 저희를 찾아오신 형제 자매들 안에 떡하니 현존해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발견하고, 선포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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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VTW7_t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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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체험이 없으면 용서의 능력도 없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용서의 능력’입니다. 용서는 내가 죽는 일입니다. 자발적으로 죽을 수 있는 경우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농부가 열매의 기쁨을 상상하지 않으며 농사의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을까요?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자기를 무자비하게 찌른 사람에 대해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에 대한 희망 없이 나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녀의 어머니도 그 사람을 용서했는데 “내 딸이 용서했으니, 나도 자네를 용서하네.”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딸은 천국에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고정원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부활에 대한 희망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기 아내가 천국에 있는데 자신이 용서하지 못해 지옥 가면 아내를 영영 만나지 못할까 봐 용서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 때문에 용서가 가능한 것이지, 유영철이 사랑스러워서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용서의 능력과 하나입니다.
어떤 형이 나라에 큰 공을 세워서 임금으로부터 사면장을 들고 사형 선고를 받아 갇혀 있는 동생을 찾아왔습니다. 혹시 풀려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형의 말에 동생은 먼저 판사를 죽이고 그다음엔 자신을 신고한 이를 찾아가 죽일 것이라 말합니다. 형은 동생을 사면할 수 없어 나오면서 사면장을 찢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 결정적인 시기가 부활하신 당신을 만나고 믿게 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는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보이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중풍 병자를 치유하고 용서하실 때 사람들은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태 2,7)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실 수 없다고 믿고 개신교도 그래서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용서한다는 것은 나를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죽어야 마땅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요한 5,18 참조).
용서를 위해 목숨을 걸려면 부활에 대한 확신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당신을 보여주시며 동시에,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성령의 힘을 주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파견하실 때 당신이 보내셨다는 증거로 ‘지팡이’ 안에 힘을 넣어주셨던 것과 같습니다. 조선 시대 임금이 암행어사를 파견할 때 마패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때 빠진 사도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토마스’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도들에게는 성령과 함께 성령을 통한 죄를 용서할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고 다른 제자들처럼 죄사함의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죄사함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도 이미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부활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토마스 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 각자도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죄를 용서하는 예식을 통해 이 많은 사람이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는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보고 교회가 그리스도 부활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보지 않고 믿는 법입니다.
사제들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개혁 사명을 믿지 않자 성녀도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나는 이 은혜가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 25,19)라고 말합니다. 교회도 온 세상이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교회는 죄를 사해주는 권한에 조금도 물러섬이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지금도 바라보고 있는 가장 완전한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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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칠레의 민중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파블로 네루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생은 모호하지만 명확하다. 자연은 덧없지만 풍성하다. 우주는 무한하지만 무관심하다.” 인생에서 명확한 것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태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는 것입니다. 인생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터널과 같습니다. 암흑과 같은 터널에서 우리는 수많은 인생의 서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늘의 뭉게구름은 온갖 모양을 만들어 내지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영겁의 시간 속에 자연은 이렇게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 속에 ‘개념’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 김춘수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한함을 보여줍니다. 이 무한한 우주를 보면서 우리는 감탄하게 되고,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우주를 있게 한 절대자를 떠올립니다. 신앙인은 그 절대자를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 이외에 우주라는 커다란 화폭 위에 별들을 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과 평화는 비슷한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평화로울 수 있고, 평화로운 사람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신 말씀은 평화를 이루는 것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바라고, 행복을 원하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재물을 많이 가져도, 명예를 얻어도, 권력을 얻어도 그것만으로는 참된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분노와 원망입니다. 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을,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을, 내가 시험에 떨어진 것은 부모를 잘못만나서, 이웃을 잘못 만나서, 시기를 잘못 만나서라고 생각하면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셋째는 근심과 걱정입니다.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십자가를 지고 갈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근심과 걱정이 있는 사람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롭지 못한 이런 조건들을 다 극복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근심하고 걱정하지 마라, 지금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은 모두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신다. 그러니 너희는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방법은 3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평안하냐.’와 같은 말입니다. 막달레나에게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도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다정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도 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이 유령인줄 알았기 때문에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직접 만져보고서야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 고기를 준비해서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고, 그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함께 드시기도 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 기쁨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죽이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분열을 가져오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나눔, 기쁨과 평화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도 주님께서 못에 찔리셨던 발과 손을 보여 주셨듯이,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이, 우리들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셨던 바로 그와 같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형편이 좋아져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면 형편이 좋아 집니다. 살을 빼서 건강해 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 지면 살이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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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19-31: 토마의 불신앙
주간 첫날, 새로운 창조의 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유대인들의 잔혹 행위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 제자들은 그들의 집과 마음을 닫아걸었다. 예수께서는 문이 잠긴 상태에서 제자들 가운데에 나타나셨다. 주님의 육체는 그들과 함께 사셨던 그 육체이다. 그러나 자기들 눈에 보이는 육체에 확신하지 못하므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잠긴 방으로 들어오신 몸을 만지도록 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19절) 여기서 평화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실 때에는 영혼은 언제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19절)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사명을 주시어 파견하신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22절)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셔서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하려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신다. 이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고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신 분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실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새로운 창조를 이루신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성령으로 새로이 창조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두는 권한을 주셨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관계 회복은 죄의 용서를 통하여 오는 것이므로 성령의 첫 열매는 바로 하느님과의 화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다. 토마스라는 뜻은 본래,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다. 완전한 것만 좋아하는지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지 않는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죽음은 알고 있었지만,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기가 본 것이 환상에 불과한 일이 되지 않도록 “직접 보고” 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절) 한다. 토마스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분의 육체와 거기에 난 상처를 전부 보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분을 만나기를 고대한 것이다. 여드레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자리에는 토마스도 있었다. 여기서 여드렛날은 교회에서 거룩하게 모이는 날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문이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보아야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토마스는 결국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하고 고백한다. 그는 그분의 육신을 만지고 그분의 신성을 고백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토마스의 모습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많은 사람의 모습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다. 토마스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토마스가 스승의 육체에 난 상처를 만진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토마스의 불신은 다른 제자들의 믿음보다 우리의 믿음은 위한 것이다.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의심 없이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의심하는 자기 마음과 모든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그 상처를 그대로 두신 것은 부활의 증거로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오늘의 요한복음에서도 "보고 믿는다."라는 형태가 나온다. 그들은 믿음의 제1세대로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기 위하여 보아야 했고, 증언하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앙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선물은 부활이 예수님께 새 생명과 권능을 충만케 해주어 새로운 현존형태와 활동 방법을 부여하였다. 이같이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같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모습의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은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또한 그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시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사도 4,32) 자기의 재산을 모두 공동으로 사용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모든 형제와 친교를 이루고, 새로운 생명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자유로운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1요한 5,1) 한다. 이것은 의미가 깊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같은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과 피로 세상에 오신"(1요한 5,6)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는 세례성사(물)와 성체성사(피)를 암시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부활 할부 축일을 지내고 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과 결실로서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 되어 친교를 그분 안에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믿음이라는 선물이 진정한 사랑의 나눔으로 드러나야 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당신의 신부인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성령 안에서 믿음을 고백하며, 구체적인 삶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그래서 참으로 행복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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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부활 제2주일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여드레 뒤에 일어난 일을 전함으로써 팔일 축제의 끝을 알립니다. 매우 중요한 신학적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기에, 짧게 요약하여 보겠습니다.
첫째는, ‘평화’입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십니다. ‘샬롬 알레이켐’은 유다인들의 일상적 인사이지만, 특별히 이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라는 표현과 함께 세 번(완전함을 상징) 되풀이됨으로써, 이 평화는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실 때에만 주어짐을 강조합니다.
둘째는, ‘새 창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넣으며 …… ‘성령을 받아라.’”라고 하십니다. 평화(‘샬롬’)는 세상의 창조 때, 죄로 손상되기 이전 완전하고 충만하였던 상태를 말하며, ‘숨을 불어넣으시는 행위’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새로운 창조’로 이끈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 줍니다.
셋째는, ‘상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것은 상처였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필수적으로 연결된 현실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토마스가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기를 요구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 그러한 토마스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넷째는, ‘1인칭적 고백’입니다. 예수님과 토마스의 대화에는 1인칭(나, 내)과 2인칭(너, 네) 대명사가 되풀이되는데, 부활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토마스처럼 1인칭적 체험으로 고백되는 사건임을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자비’입니다. 1인칭적 고백은 주변에 ‘사랑’과 ‘자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나타나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통하여 증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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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4-29)
1)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는,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현대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1)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동료 사도들의 말 자체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정말로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난 것인지, 아니면 단체로 어떤 환시 같은 것을 체험한 것은 아닌지, 그것을 의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도들의 증언을 믿지 못하고, ‘집단 환시 체험’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토마스 사도는 동료 사도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 예수님인지, 아니면 어떤 영적인 존재를 만난 것은 아닌지, 그것을 의심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해서 사도들이 무서워했던 일이 루카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24,37) 그렇기 때문에 토마스 사도의 의심은 근거가 있는 의심이고, 토마스 사도만 탓할 것은 아닙니다.>
2) 예수님의 상처 자국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토마스 사도의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뜻이고, 또 정말로 살아 계신 분인지를 확인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는 말의 표현만 보면, 토마스 사도가 믿기를 강하게 거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나도 당신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나도 예수님께서 정말로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고 싶다.” 라고 자신의 희망을 강하게 표현한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는 토마스 사도의 말이 있습니다.(요한 11,16) 토마스 사도는 열정적인(뜨거운) 사람이었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를 위해서 직접 나타나신 것은, 그의 강한 희망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것은 토마스 사도를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은 진실이다.”라고 보증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토마스 사도 한 사람만을 위한 보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보증입니다.>
4)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은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복음서 저자가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를 기록한 첫 번째 목적은, 바로 이 신앙고백을 기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종교입니다. 이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그 종파를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최초로 고백한 인물로서,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5) 당시에 사도들은 토마스라는 동료 하나를 믿게 만들지도 못할 정도로 증언에 힘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는데 오순절 날에는 한 번의 설교로, 무려 삼천 명에게 세례를 줄 정도로(사도 2,41)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나의 지식만으로는, 또 나의 경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개인의 지식과 경험만으로는 아무런 힘도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증언은 성령께서 도와주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신앙인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고, 견진을 받을 때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받은 그만큼 변화되었는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영적인 힘을 가진 신앙인으로 변화되어 있는가? 그것은 각자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변화’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첫 번째로 해야 하는 노력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저절로 변화되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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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백인현 안드레아 신부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 팔일 축제를 성대하게 지내며 부활 제2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삶에 비추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 4,32-35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요약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으며,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았고,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에 대하여 사도행전 2,42 이하에 조금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변화된 모습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궁핍함을 모르고, 즐겁게 하느님을 찬미하며, 세상 사람들의 눈에 호감을 주어 공동체가 불어났다는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어떠한지 그려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당일 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주시고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주신 성령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을 무려 세 번이나 들려주십니다. 두려움에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불안과 공포의 상황에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용기와 힘을 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부활 하신 주님께서 건네신 평화의 인사를 들은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평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가장 큰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별사에서 평화의 선물을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다름 아닌 평화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물을 부활하신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평화가 너 희와 함께!"라고.
주님께서는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움에 고민하고 있는 우리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며 다가오시며 용기를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힘으로 유지시키는 평화가 아닙니다. 돈으로 유지시키는 평화도 아닙니다. 남을 희생시킴으로써 얻어지는 평화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희생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참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떠나있지 말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안에 담겨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더욱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설 때 부활을 증거 하는 삶을 살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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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영희 바오로 신부님]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요한 20,29)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인사말은 안식일 다음날,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때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그들에게 전한 이 인사말에 제자들은 기뻐합니다.
이 인사말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와 못에 박힌 손을 보여 주고, 숨을 불어 넣으며 사도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나타나 토마스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 줍니다. 그제야 토마스는 비로소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과연 교회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믿고 있을까요?
여러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체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자 중, 부활을 확신하는 비율이 30%,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비율이 30%, 나머지는 부활을 믿기는 하지만 확신이 없는 신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마저도 부활을 확신하는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데 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을까요? 만약에 여러분은 부활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사도 2,42-47에서는 ‘빵 나눔’ 예식을 통해 예수님 부활의 현재성을 드러냅니다. 또한 1베드 1,8-9에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본문을 통해 볼 때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지는 못하지만 그분의 실존을 체험하고 있다는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잘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은 언제나 믿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과학적으로 부활을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들에게는 나타났지만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고 만져볼 수 있는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확인해야만 믿겠다고 한 토마스의 믿음이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 많은 토마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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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어떤 분이 술에 잔뜩 취해서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께는 나타났는데, 왜 저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십니까?” 주님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주님의 사랑 안에 푹 잠겨 살아가고 싶지만, 잘 느껴지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으로 하소연한 것이었습니다.
마음 속으로만, 머리 속으로만, 허상처럼, 현실을 떠난 영처럼, 기도 속의 신비체험으로만 주님께 잠기고 싶은 마음이 해결되지 않으니까 고민 속에서 몸부림치며 탄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여러 번 여러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시기와 증오 속에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 16,21)
예수님께서는 왜 죽으셔야 하는지 그 이유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으로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주님께서 왜 죽으셔야 하는지,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모두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죽음의 의미와 죽음에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지 않았고, 그저 제자들의 마음 속엔 예수님께서 영광 속에 오르실 때에 그 밑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부귀영화를 언제 어떻게 누리게 될 것인가 하는 일념만이 새겨져 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사도 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해야 할 사명은 망각한 채, 계속 예수님 부활의 확신과 부활 이후에 이어지는 영광 속에 참여할 공과논쟁과 자리다툼 그리고 이익추구에만 골몰하는 제자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소연하십니다.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7-8)
오늘 우리 중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제자들과 같은 어리석음을 재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 중의 어떤 이들은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형제들을 위해 봉사하여야만 할 우리 자신의 본분은 망각한 채, 토마처럼 계속 자신의 마음만을 채워달라고 탐욕스럽게 외칩니다. ‘주님, 저희에게 나타나소서!’ ‘주님, 저희를 구하소서!’ ‘주님,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주님, 이러 저러한 것들을 주소서!’
오늘 우리 중의 어떤 이들은 자식으로서 부모의 말씀을 존중하고 효도해야만 할 자신의 의무를 망각하고, 배우자와 가족을 돌보며 살펴야만 할 자신의 의무는 망각한 채, 토마처럼 자기 개인의 편의와 아집에 빠져 외칩니다.
‘내 생각에 맞춰주세요.’
‘내가 하자는 대로 해주세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오늘 우리 중의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내보내시면서 각자에게 이루도록 하신 서로 다른 소명은 무시한 채,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라고, 하느님의 요구와 초대보다 세상의 요구대로 살아가라고 요구하며 외칩니다.
‘넌 내가 낳고 내가 기른 내 자식이니까, 내가 펼쳐주는 세상에서 내가 준비해주고 내가 열어준 대로 살아야 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서 살아야 해!’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잡혀 죽을까 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주님 곁에 다가서서 영광을 누리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예수님께서는 서로 경쟁하며 상대를 밟고 올라서려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2-23절)
예수님께서는 토마처럼 자신을 봐달라고,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토마처럼 빠지고 제외되는 이 없이 여러분 모두에게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니, 토마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축복과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로 숨어들면서,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고 스스로 소외시키고 고립시키는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내려지는 주님 사랑과 은총을 느껴 빛과 행복의 나라로 들어가시길 빕니다.
눈 앞에 닥친 어둠과 시련 앞에서 두려움에 떨지 말고, 주님 부활의 힘으로 살아나가시길 빕니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기에, 오늘의 어려움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신앙의 힘으로 여러분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시련을 이겨내실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휘감아 주님의 사도로 만들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형제자매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선포하고 구원의 희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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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현대 시대에서 종교의 가치는 날로 떨어지고 있고 물질 만능 주의는 팽배합니다. 사랑과 윤리를 가르치는 종교의 가르침은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성적인 문화와 많은 재물의 가치를 높이 사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늘어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현세의 일에 열중한 나머지 신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거나, 현실의 행락을 추구하여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흔히,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원한다.”,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신보다는 이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과학이 더욱 종교에 가깝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신앙인들의 태도에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성당에 나오긴 하지만 그저 형식적으로 미사만 드릴 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확신이 없는 경우도 많고 특히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그 생활에 너무 집중하는 나머지 예수님의 말씀은 저도 모르게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토마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이 주님을 봤다고 증언하지만 그는 그것을 결코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살아 생전에 예견하셨던 가르침이 부활인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동료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나타나셨다고 증언하지만 자신이 직접 보고 만져야만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손을 내미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고 토마스가 대답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말씀 속에는 주님의 진심이 들어있습니다. 진정 그분은 우리에게 평화를 기원하셨고 그것만이 삶의 의심을 몰아낼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의심과 평화는 공존하지 않습니다. 의심은 인간의 것이고 평화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평화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한편 이 토마스의 신앙 고백은, 보고 믿는 합리주의에서 벗어난 확신을 말하며, 이러한 실제적인 부활은 제자들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바로 오늘 제1독서의 말씀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함으로써 모두 큰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믿고 두터운 사랑으로 뭉쳐 살게 되며 신앙의 진정한 가치와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이제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말과 사건은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천년의 역사를 물려받아 온 성경의 말씀, 즉 “너희가 둘이나 셋이 모이면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 토대가 되며 기나긴 교회의 역사가 이를 증언합니다.
피와 목숨으로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의 행동과 각 시대에 나타났던 성인들의 삶 또한 그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생택쥐베리의 『어린왕자』라는 책을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어린왕자는 장미의 진심을 읽지 못하고 그로부터 상처를 받은 채 장미를 떠나 지구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에 도착해 자신이 헌신했던 장미가 사실은 흔한 존재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에 지구에서 만난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이야기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이 진리를 잊어버렸어. (...) 넌 네 장미에 대한 책임이 있어.” 이처럼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랑, 언제나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고 기뻐하시는 우리의 주님,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는 주님은 때로는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것을 상기하면 우리에게는 분명 하느님께 대한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깊게 패어있는 예수님의 상처를 두 눈으로 보고, 두 손으로 만져 보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그 사랑의 상처를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창으로 찔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아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남은 피와 물까지 흘리신 그 사랑의 샘을 우리 마음에도 파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요즘의 시기는 언제나처럼 별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겠지만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이 부활시기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시기, 나날이 희망이 넘치는 하루하루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요즈음의 따뜻한 햇살과 풍요로운 향기처럼 나 자신 역시 따뜻한 마음과 향기로운 행동으로 세상에 아름다움을 마음껏 뿜어내길 다짐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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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믿음의 크기를 강조하지요. 그런데 ‘나’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보다 ‘하느님’께서 나를 더 믿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늘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클까요? 아니면 자녀의 사랑이 더 클까요? 부모의 사랑이 훨씬 크다는 것을 자녀를 키워 본 부모들은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랑을 계속 받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처녀가 아이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의문만 있었지요. 자기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제가 남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의문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토마스 사도는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말씀하셨기에 전혀 모르는 사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신성을 의심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예수님의 신성을 믿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것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토마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선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받는 아이는 많은 부분에서 다릅니다. 자신 있게 자기 삶을 살아가며, 어떤 고통과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받음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사랑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잘 성장하고 있으므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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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의 평화 주님의 평화>
요한 20,19-31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예수님과 토마스, 복음서를 쓴 목적)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세상의 평화 주님의 평화>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네가 두려워
나를 닫는
세상의 평화
네가 반가워
나를 여는
주님의 평화
너 없이
나 홀로
세상의 평화
너 있어
나 함께
주님의 평화
너에게서
나에게로
세상의 평화
나에게서
너에게로
주님의 평화
너와 나
가르는
세상의 평화
너와 나
이어주는
주님의 평화
너는 너요
나는 나인
세상의 평화
너는 나요
나는 너인
주님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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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외아들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목숨을 내놓으셨으며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랑의 승리를 보여준 사건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큰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훗날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약속의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를 입으시길 바랍니다.“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길이 자비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 자신이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신 것처럼, 측량할 수도 없고 다 써버릴 수도 없을 만큼 한없이 많고 큽니다.”(성녀 파우스티나)
일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위신과 체면을 앞세워 아는 척도 하고, 때로는 아닌 척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하라! 정직하라’ 말하면서 그 속에 자신은 제외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감시하고 판단할 만큼 진실하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험담하지 않고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잘못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정직해야 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더니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토마스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정직하게 고백한 후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수난의 흔적을 보여주시며 토마스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토마스는 차마 만지지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면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한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셨으니 토마스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못 알아본 것이지 주님은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찌 되었든 토마스는 거짓 믿음보다 정직한 불신을 선택했고 그것을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우리도 거짓보다는 정직함으로 나를 드러냄으로써 부족한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시길 희망합니다.‘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오니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발현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서 누락되어 실망하고 좌절하여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토마스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 듣고 믿게 될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 표징을 보여주시고 또 발현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또 전하는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셨으니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고 전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평화가 있다면 그 기쁨이 밖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단순한 평화가 아닙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를 보면,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평화’는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징벌’덕에 악행과 죄를 용서받고 치유 받은 사람이 누리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누리는 조건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오지만, 믿음으로 굳건한 이들은 두려움과 공포에서 풀려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의 위로와 기쁨을, 성령을 통하여 주셨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을 통하여, 이제는 하느님과 예수님께만 유보되었던 사죄의 권리를 제자들이 행사하게 되었고 그 후계자들과 협력자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용서를 받고, 거부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 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너무 답답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시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지 못해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을 키워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말씀으로 제자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고, 빵을 떼어주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며 믿음을 키우시고, 토마스의 불신도,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던 제자들을 끝까지 참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후에도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며 사람들을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까지 잡수시며 의심하지 않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지난날의 모든 것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 주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채워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그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이웃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정직했던 토마스처럼 나도 주님 앞에 정직하길 기도합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 앞에서,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도 진실함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용서받아야 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 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불신으로 주님을 만난 토마스를 생각하고 우리의 한계를 주님께 의탁하면서 자비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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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깨어나라, 감사하라, 찬미하라-
자비하신 주님을!
지금 4월 부활축제가 계속 펼쳐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토는 어디나 파스카의 봄꽃들 만개한 하늘나라 지상천국입니다. 그러나 국민현실은 어려움의 절정입니다. 새삼 이번 이번 4.10일 총선이 나라의 명운(命運)이 달린 얼마나 절박한 선거인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어느 젊은 정치인이 목터져라 외친 말마디가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이대로 둬서는 대한민국 다 죽는다!”
"우리나라 진짜 큰일났다!"
살아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잘 살라고 부활축제가 계속되고 있는 오늘 부활 제2주일은 하느님 자비의 주일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자비를 닮아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 천국을 살라고 하느님께서 선물하신 하느님 자비의 주일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자비로운 마음, 지혜로운 정신으로 난국의 현실을 잘 타개해 나갈 수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을 지내던 2000년 4월30일 부활 제2주일 사백주일에, 하느님 자비를 선포하는 임무를 위임받았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를 성인품에 올렸고 전 세계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 자비의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자비의 사도라 일컫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성지에서의 1997년 6월중 강론은 지금 들어도 공감이 갑니다.
“역사상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지금같이 위태로운 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인간 양심이 심하게 세속화될수록, 자비라는 말의 의미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될수록, 하느님에게서 떠나 자비의 신비에 거리를 두면 둘수록, 교회는 큰 소리로 자비의 하느님께 호소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와 인류의 걱정을 자비로우신 그리스도께 의탁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어느때보다 하느님 자비의 체험과 삶이 절박한 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자비를 배우고 공부하여 우리 모두 자비의 사람이 되어야 할 작금의 시대입니다. 방금 흥겹게 부른 “가,나,다”해가 동일한 화답송 후렴이 우리 모두 자비의 사람이 되도록 고무합니다. 오늘 하루뿐 아니라 평생 화살기도 노래로 끊임없이 바쳐도 참 좋은 시편구절입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 118,1)
어제 일간신문에서 읽은 번역가의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완벽한 번역은 없다, 다만 아름다움을 옮길 뿐이다.”, 저는 번역대신 삶과 강론을 넣어 읽도 그대로 통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완벽한 삶은, 완벽한 강론은 없다, 다만 아름다움을 옮길 뿐이다.” 어떻게? 사랑입니다.
하느님 자비는, 사랑은 어김없이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파스카의 봄철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그대로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자애가 온땅에 가득하네” 얼마전 시편 화답송도 생각납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1960년대 후반을 풍미했던 대중가요도 생각납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아무리 못생긴 아가씨도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사랑을 하면은 꽃이 펴요, 사랑을 하면은 꽃이펴요.
아무리 못생긴 호박꽃 아가씨도 사랑을 하면은 꽃이 펴요.”
사랑을 하면은 꽃이 피고 예뻐지고 아름다워짐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갈수록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2007년, 17년전 파스카의 봄철 이맘때쯤 썼던 “아름다운 사람들이여!”라는 시를 나눕니다.
“동안거(冬安居)를 끝낸 겨울 나목들
잎눈들, 꽃눈들 임사랑에 활짝 열려 피어나니
오, 찬란한 태양,
광활한 창공(蒼空),
모두들 깨달은 꽃나무 각자(覺者)가 되네!
내 존재의 미소(微小)함, 공허(空虛)함
깨달음으로부터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찬미와 감사
웃음같기도, 눈물같기도 한
꽃같은 깨달음이여, 새롭게 열리는 세상이여,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아름다운 삶은 우리의 의무이요 책임이요 권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 사랑할 때 아름다운 삶, 행복한 삶입니다.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을 잘 키우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첫째,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공동체입니다. 참으로 이상적 교회 공동체의 모델이요 2000년 동안 공동체 운동에 샘솟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이상적 유토피아 공동체로 공산주의도 여기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가장 근접한 공동체가 자발적 사랑의 공산주의 공동체인 수도공동체이고 그 빛나는 모델이 지금 여기 성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사도행전의 참 아름다운 사랑의 교회공동체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바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공동체를 키워주고 보존해 줍니다. 공동체 성립의 핵심 요소를 알려줍니다. 한마음 한뜻, 공동소유, 공동체의 중심인 부활하신 주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된, 빈부의 격차가 사라진 공평과 평등이 실현된 하늘 나라 교회공동체입니다.
둘째,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우선적 선물이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臨在)와 더불어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활짝 열린 문이 됩니다. 참으로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의 평화는 이 주님의 평화에 기반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말마디에 ‘항상’을 덧붙여 “평화가 항상 너희와 함께!”말하고 싶습니다. 무려 오늘 복음에 세 차례나 나오는 주님의 참 좋은 말마디입니다. 제자들은 평화의 주님을 뵙고 몹시 기뻐했다니, 평화와 함께 주어지는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주시는 평화와 기쁨의 선물입니다. 주목할 바, 이 모든 선물은 공동체가 함께 할 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회의론자, 이성주의자, 토마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의 전광석화 반응의 고백이 우리에게는 참 좋은 배움이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주님이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이라니 얼마나 멋지고 놀라운 고백인지요!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부끄럽게 하면서 분발케 하고 우리의 믿음을 고무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마지막 복음 말씀이 믿음과 생명이 얼마나 깊이 결속되어 있는지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참 엄중한 진리가 믿음과 함께 가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가 믿고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 최상의 축복입니다. 제2독서 요한 사도의 믿음에 대한 말씀도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셋째,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성령입니다.
주님 선물중의 선물이 참 좋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사랑이자 진리입니다. 그러니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성령뿐입니다. 성령없는 인간은 반쪽의 인간일뿐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구원의 문입니다. 성령께 마음을 열면 누구에게나 선사되는 성령의 선물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느님께서 창세기에서 사람을 창조하실때 진흙으로 만든 몸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듯 우리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가능한 용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평화의 선물과 더불어 용서의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자비의 사도, 평화의 사도, 성령의 사도, 용서의 사도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자비의 사도로 살라고 수도원 형제들의 숙소 명칭도 “자비의 집”이며, 피정오신 분들은 평화의 사도로 살라고 피정집 명칭은 “평화의 집”입니다.
혼자 독점하라 주신 선물이 아니라 서로 나누라 주신 선물입니다. 자비도 평화도 성령도 용서도 나눠야 서로 삽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그러니 사랑의 나눔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에 대한 응답은, 자비하신 주님을 닮는 길은 감사와 찬미, 겸손과 온유, 사랑과 나눔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고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참 좋은 하늘 나라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주시며, 날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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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닫힘과 열림>
오늘 부활 제2주일의 주제를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잡을 수도 있지만 올해 저는 <닫힘과 열림>으로 잡아봤습니다.
오늘 복음의 첫 문장은 제자들의 두려움과 문을 닫음에 대한 묘사입니다. “주간 첫날 저녁,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닫아걸었다고 얘기하지만 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제자들이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보다 자기들의 힘이 없어서 그들을 두려워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호랑이가 무서워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물리칠 힘이 있거나 총이 있으면 두렵지 않지요. 우리는 이렇게 두려움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아내야 물리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한 것이 실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해석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두려워한 것이지만 이는 신앙이 빠진 인간적인 해석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이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했겠습니까?
어렸을 때의 우리는 밤이 무섭고 강도가 무서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함께 있거나 강아지만 옆에 있어도 무섭지 않은 경험이 있잖아요?
이는 우리가 어두운 것은 밤이 어둡고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빛이요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이라고 우리가 신앙적으로 이해함과 같은 논리입니다.
우리에게 평화 없음도 같은 논리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겼기에 또는 싸움을 걸어오는 누가 있기에 평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주님의 평화가 없기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평화로우려면 오늘 제자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평화를 주실 때 그 평화를 받아 지니면 우리는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평화를 무고(無故)의 평화가 아니라 관계의 평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간 또는 밤새 별고(別故) 없으셨느냐고 인사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별고란 특별히 안 좋은 일 곧 사고의 준말일 것입니다. 그러니 별고 없냐는 말은 특별히 안 좋은 일 사고 없었냐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 좋은 일이 있고 상황은 평화롭지 않아도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평화롭습니다.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는데 거센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배의 고물을 베고 주무십니다. 제자들은 난리법석인데 주님은 천하태평이십니다. 이렇게 평화의 주님께서 배에 함께 계시면 제자들은 평화롭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함께 계시어 두려움은 사라지고 평화롭게 되면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골방에 갇혀 있지 않고 닫힌 문을 활짝 열고 나가고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리고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하시면서.
그래서 제자들은 성령 충만하게 되고, 성령 충만함으로 사랑 충만하게 되고, 사랑 충만함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며,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 공동체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는, 무소유와 공동소유의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문이 열린 것뿐 아니라 성령의 사랑으로 마음도 열리고 움켜쥐었던 손도 펴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나와 우리 공동체에도 이런 부활의 은총을 주시길 청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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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20,19)
'하느님의 자비가 되자!'
오늘 복음(요한20,19-31)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과 토마스의 불신을 치유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배신과 불신의 모습을 보인 제자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 죄책감과 두려움에 빠져 있었던 제자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와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그들을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1.22.23)
부활 제2주일인 오늘은 24번째 맞이하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2000년 대희년 때, 4월 3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비의 사도'로 불리는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시면서,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제정하셨습니다. 많은 본당에 성녀 파우스티나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상'이 걸려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결정적 표지'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주어졌고, 그래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부여된 사명은 하느님 자비의 선포이며, 하느님의 자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내가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자비를 입고 자비가 됩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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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GsqiwHYku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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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하느님의 자비는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뜨겁게
만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창조되고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는
구원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축복된 삶을
살길 바라시며
끝없는 자비를
우리들에게
베푸십니다.
실천이 없는
자비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체온과 말씀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아픔이
하느님의
아픔이 됩니다.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
우리에게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길 잃은 이들에게
길을 찾아 주시는
자비이며
굶주린 이들에게는
빵이 되시는
자비이며
강도를 만난
이에게는
내 몸같이
보살피고 섬기는
자비입니다.
이와 같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자비를
십자가의 죽음과
상처에서 다시
만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따뜻한 미소이며
다정한 속삭임이며
쓰러진 형제를
일으켜 세우는
맑은 손길입니다.
하느님의 참모습을
십자가의 상처에서
다시 뵈옵는
은총의 자비 주일
되십시오.
하느님의 자비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음으로
고백하며
십자가를 통해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을
만납니다.
하님의 자비로
생명과 빛을 얻는
하느님의 맑은
자비 주일입니다.
우리는
자비를 베푸는
자비의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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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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