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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기 목사가 만든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의 문젯점들(1)
박용기 목사의 저서 '성경신학개론'에서 발췌
제 1편 성경신학 서론
본서는 성경신학( The Bible Theology)의 개략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본서에서 말하는 성경신학은, 기존의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과는 의미를 근본적으로 달리한다. 전자는 하나님에 관한 성경 자체의 논리 체계라면, 후자는 성경에 나타난 부분적인 주제들에 대한 지엽적인 해설이다. 즉, 전자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설명이라면 후자는 성경에 소개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지엽적인 설명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시는 섭리를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하여 신.구약성경 전체의 일관된 논리에 의해 설명한다. 그런데 후자는 신.구약성경에서 부분적으로 신학적인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되는 내용들을 주제 별로 일관된 논리 없이 설명한다.(박윤선, 성경신학, pp.9-21) (21p)
제1장 성경신학의 개요
제1절 성경신학의 정의
2. 전통신학의 정의
.....전통적인 개혁파 신학에서는 하나님을 신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하여 조금은 주저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이 형이상학적 존재라는 점을 고려하기 때문이며, 형이상학적인 존재를 학문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일단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파 신학자들은 하나님만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를 신학의 대상으로 정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개혁파 신학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를 신학의 대상으로 삼아 신학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신이심으로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음으로 구체적인 연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신학의 대상으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의 결과로 결국 전통적인 개혁신학에서는 신학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우주에 대한 관계를 논하는 학'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박형룡, 교의신학 서론)(27p)
제2절 성경신학의 학문적 위치
1. 전통신학의 여러 분야
2) 주경신학이다.
주경신학(註經神學)은 성경을 풀이하는 신학으로서, 일명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이라는 뜻으로 석의신학(釋義神學)이라고 일컫기도 한다.(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이 신학은 근래에 이르러서 상당한 여러 신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분야의 신학인 것이다. 그런데 주경신학은 특별히 성경의 본문 내용들을 연구하기 위하여 성경의 원본 내용에 대한 회복과 그 해석에 관한 연구 작업을 하는 신학이다. 그래서 주경신학은 그 연구 작업에 필요한 성경개론을 비롯하여 성경고고학과 성경사본학 및 성경해석학과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 등을 포함하는 방대한 신학의 한 부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은 특별히 성경을 해석한 결과들을 모아서 여러 가지 기본적인 신조나 교리들을 만들기도 하고, 성령께서 계시하신 성경 계시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연구하기도 하는 것으로 그 임무를 삼는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신학에 있어서,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은 주경신학을 위한 하나의 보조 자료에 지나지 아니하는 학문으로 자리 매김이 되고 있는 것이다.(32-33p)
2. 성경신학의 소속 학군
전통적인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은 위에서 두 번째로 밝힌 바 있는 주경신학 학군에 소속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근래 전통신학의 학적 분류에 따른 결과이다. 이같은 결과로 보면, 성경신학이 주경신학 학군에 속한 한 분야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경신학은 주경신학을 위한 하나의 보조 신학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필자가 제창하는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은 주경신학을 보조하는 신학이 아니라, 주경신학 자체가 성경신학을 위한 하나의 보조신학인 것이다. 왜냐하며, 앞절에서 이미 밝힌바 대로, 성경신학은 성경의 전체 내용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일관된 논리체계에 의하여 계시된 하나님을 밝히 증거하려는 데 반하여, 주경신학은 성경의 표면적인 내용만을 해석하는 데 치중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주경신학은 어디까지나 성경신학의 근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보조신학에 불과한 것임에 틀림없다......기존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이 필자가 제창하는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과는 달리 성경의 한 지엽적인 부분들만을 취급하고 있다는데 또 하나의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에는 기존의 전통적인 성경신학이 가볍게 취급을 받아 왔으나 앞으로 논의될 필자가 제창하는 성경신학은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일관된 논리에 의한 깊은 내용의 무게가 그 진가를 보여줄 것이다.(34-35p)
박용기 목사는 기존의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의 용어를 The Bible Theology라고 묘하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3. 타분야 신학과의 관계
2) 주경신학과의 관계이다.
주경신학은 교의신학에 있어서 필수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성경신학적 입장에서의 주경신학은 성경신학의 입문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근본적인 설명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해석하는 목적이 교의 또는 교리를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36p)
성경해석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주경신학은 문법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에 치중한 신학이라면, 성경신학은 신학적 해석에 치중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루이스 벌코프, 성경해석학, (개혁주의 신행협회), pp. 74-187)(37p)
결론적으로, 성경신학과 다른 분야의 신학들과 관계를 총정리하면.....성경신학은 모든 신학들의 근본이고 목적이 담겨진 신학이며, 기타 모든 신학들은 성경신학의 보조역할을 담당하는 신학들이며, 성경신학의 결과로 나타나는 신학들로서 성경신학과 유기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39-40p)
제3절 성경신학의 필요성
1. 신학의 난해와 필요성
2. 인본주의 신학의 도전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개혁파 신학은 방향감각 마저 잃어 버리고 비틀거리며 표류하고 있는 처절한 형편이다. 이러한 개혁파 신학의 비참한 모습을, 하나님을 등진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모를리가 없다. 그들은 개혁파 신학의 헛점과 급소를 정확히 알고 집요하게 도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지난 날의 낡아진 개혁파 신학의 녹슨 무기로는 현대 인본주의 신학자들의 첨예화되고 세련된 공격 무기를 감당하기에는 확실히 역부족이다. 막연히 진리보수라는 미명 아래 낡고 무디어진 개혁파 신학의 진리 체계들을 무조건 고집하는 것은 개혁파 신학의 근본정신에 위배된다. 성경신학 운동을 통하여 성경대로 기독교 진리체계 및 제도들을 과감하게 개혁해 나가는 것이 개혁파 신학의 근본정신이다. 그러므로 인본주의 신학의 무분별한 도전 앞에서 시들어가는 개혁파 신학의 소생을 위하여 성경신학의 필요성은 더욱 더 절실한 것이다.
3. 사이비신앙운동의 발흥(40-42p)
제4절 성경신학의 목적
1. 성경적 바른 신관 정립
진정한 의미의 신학이라면 그 대상을 오직 하나님으로 규정한다. 성경신학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전통신학에서는 하나님보다는 지엽적인 주제들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보인다. 실제적으로 교의신학만 해도 1권에서 신학의 서론을 다루고, 제2권에서 신론을 취급한 후, 나머지는 인죄론이라든가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의 주제들을 방대하게 다루고 있어서(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신론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 신학의 근본 목적인 신지식이 외면 당할 우려를 낳게 하고 있다. 교의신학의 분야별 모든 주제들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부수적인 주제들로 취급이 되어야 한다.
주경신학은 성경 자체의 내용을 알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그러나 성경신학은 성경적 바른 신관 정립을 근본 목적으로 한다. 신.구약성경 66권 전체에 흐르는 통일성 있는 논리에 의하여 계시 되어진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정립해 가려는 것이 성경신학의 임무이자 목적이다.(44-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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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들은 박용기 목사가 쓴 ‘무엇인가‘ 책에서 발췌한 글들인데 -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나 용어들 - 이 용어들의 목적을 보면 하나같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스스로가 경외함을 받고 영광을 받기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다고 획일적으로 이야기하시는데 이것은 인자하시고 거룩하시고 자비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훼손시키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봅니다.
[무엇인가 1]
* 연보의 목적: 착한 일이 넉넉히 성사되게 하기 위함이며, 부요케 된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기 위함이며, 이로 인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려는데 있다.
* 전도의 목적: 전도의 간접목적은 택자와 불택자를 심판하는 데 있고, 직접목적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의 영광을 선포하는 데 있다.
[무엇인가 2]
* 계시의 목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는 목적은 일반계시나 특별계시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택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셔서 그의 권능과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시려는 것이다.(34p)
* 예언의 목적: 먼저 하나님 자신의 계시완성에 있고, 다음으로는 계시된 예언의 말씀, 즉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알고 경외케 하려는데 있다.(130p)
* 목사의 직임: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을 깨닫게 하여 경외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쓰임 받는 일이다.(210p)
[무엇인가 3]
*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목적: 스스로 영광을 선포하시려는 데 있다. 따라서 사단을 창조하신 목적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의 영광을 선포하시려는데 있는 것이다.(36p)
* 십계명 발령의 목적: 여호와를 잊지 않고 기억하여 경외하게 하시려는데 있다.(61p)
* 사단의 결국: 하나님께서 그렇게 절대적인 주권행사를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선포하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을 인간에게 계시하셔서 알게 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이다.(45p)
* 구원의 목적: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영광을 선포하시는 것과 그 영광을 피조물로 하여금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전자가 근본적인 목적이라면, 후자는 지엽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1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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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적인 해석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말씀운동(장안중앙교회)에서는 위의 “되리라“의 뜻을 ”되도록 하겠다”라며 이 본문은 인간의 책임과 의지가 수반되는 사항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되도록 하시겠다고 해석합니다만..
반박-> 행 1:8절은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의지적 미래형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표현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 작용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보는 것이 바릅니다. 만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강조될 경우 하나님의 주권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을 기계나 로보트로 전락하게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인간은 단순히 기계나 로보트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존귀한 인간을 배제하는 방식이 아닌, 포함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펼쳐집니다...
“로마서 12장 이후에 나타나는 문법적 차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성경은 인간의 문법을 사용하시되 근본적으로 신학적 차원의 책이다. 바울이 성도의 생활을 권면하는 명령형의 문법은 인간행위의 자율적인 주체를 강조하는 도덕적 권면이 아니다. 그것은 언약대로 오신 성령이 수행하는 신학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해석 되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명령형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는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도의 생활을 논의하는 가운데 “성령이 도우시지만 그러나 인간도 노력해야 한다”든지 “그것이 인간의 의무이다”라는 주장은 로마서 전체에 관통하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지혜의 섭리와 절대주권적인 능력을 간과한 오류이다."(박용기 목사의 제자인 김규욱 목사의 기독교윤리학 320p)
반박-> 성경에 나오는 명령형을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적 역사로만 해석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극단적인 해석입니다. 무한자이신 하나님과 유한자인 사람 사이에 물론 큰 갭이 있지만, 성경이 명령형을 사용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차원으로 내려오셔서 당신의 백성을 인격적인 파트너로 인정하시는 맥락에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명령하셔 놓고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배제한 채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이루신다면, 명령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그냥 원맨쇼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한한 우리와 참된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우리가 그 명령에 순종할 때까지 기다리시며, 성령님을 통해서 설득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강제적으로, 무조건적으로 그냥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버리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인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에 대한 불일치가 있기 때문에 성경해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님이 과연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하나님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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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운동(장안중앙교회)은 구속사를 언약사의 하위 레벨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구속사와 언약사가 수직(높낮이)으로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성격의 논리인가요?)
그러면서 "전통신학이 구속적 동기에 지배되고 있다. 구속사 신학은 본질적으로 인본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구속사적 동기에 지배되는 전통신학이 궁극적으로 인본주의적이다. 구속사적 전통신학이 얼마나 성경을 편협화하고 있는가를 확인했다." 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박용기 목사의 성경신학은 첫째, 논리적 일관성이 있다. 둘째, 빛과 어둠, 선과 악은 이원론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지배되는 일원론적 논리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셋째, 영원과 시간을 별개의 두 실체로서 설명되어서는 안 되며 시간은 영원안에 함축되어 설명되어야 함을 주장합니다.
게할더스 보스, 에드먼드 클라우니, 그레엄 골즈워디 등의 성경신학 책 한권을 제대로만 읽었어도 전통개혁주의가 말하는 성경신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텐데.. 박용기 목사의 주장을 보면 그가 개혁신학(조직신학, 성경신학 등)을 바르지 못한 좁은 시야로 바라보며 경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본인의 성경신학이 개혁신학의 모든 문젯점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사인양 본인의 신학의 우월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개혁신학을 대변할 수 있는 저명한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많은데 그의 위 책 전체를 둘러 보았을 때 거의 모두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 서론 한권으로 변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궁색합니다.
박용기 목사는 자신의 성경신학 하나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경신학 틀에 자신이 자의적으로 성경해석하며 찾아낸 논리들[언약성취사, 왜곡된 신관(여호와와 주권을 너무 강조), 죄관(성경의 범위를 벗어난), 율법관(율법폐기론), 극단적 예정론, 하나님을 시대적으로 읽는 양태론(구약-여호와, 신약-예수), 십자가 신학과 구원론과 종말론 교리에 대한 가르침이 거의 없음, 자유의지 無, 성화론 無(하나님이 하게 하심)]을 포함해 넣고 기존의 전통 성경신학이나 조직신학의 많은 부분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보면 신앙을 짐작할 수 있듯이, 이렇게 균형잡히지 않고 건전치 못한 신학을 듣고 배운 장안중앙교회 신도들의 신앙생활에도 여러곳에서 문젯점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곳 회원님들께서도 가깝게는 언약성취님이 이 카페에서 와서 물의를 일으키며 주장했던 글들만 보아도 그가 심취한 박용기 목사의 신학의 문젯점들을 조금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박용기 목사의 성경신학개론 위의 글 뒤에 나오는 인식론과 계시에 관해 제가 또 언급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래의 참고자료는 위의 글들과 관련된 전통개혁신학자들의 견해들을 몇점 발췌했는데 박용기 목사의 주장과 비교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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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들
에드먼드 P. 클라우니의 저서 '설교와 성경신학' 7p를 보면 성경신학의 학문적 위치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계시의 객관성을 인정한 게할더스 보스는 성경신학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과정을 다룬, 주경신학의 한 분야"라고 정의하였다.]
9p에서[조직신학이나 교의신학과 성경신학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을지언정 갈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의 결과를 토대로 체계를 세워야 하며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이 가지는 거시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 조직신학의 전개방식은 철저하게 논제적이며 주제적이다. 즉 성경전체의 가르침을 하나님, 인간, 구원, 교회, 종말 등 특정 논제(loci)별로 요약한다. 반면에 성경신학은 구속사적 전개방식을 취한다. 성경신학은 모든 역사를 창조, 타락, 홍수, 아므라함에 대한 소명, 출애굽 및 그리스도의 오심과 같은 구속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구분한다. 각 시대별 또는 보다 세분화된 기간 내에서는 체계적 방법이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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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엄 골즈워디의 저서 '성경신학적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53p를 보면 [게할더스 보스는 성경신학을 "성경 안에 예치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과정을 다루는 주경신학의 분과"라고 정의한다.]
61-63p에서 [구원사(혹은 구속사 salvation history)는 성경신학을 하는 특정한 관점과 관련하여 사용된 용어다. 그 용어는 하나님이 역사하셨으며,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며, 앞으로 역사하실 하나의 틀로서 특정한 역사를 인정하는 말이다. 성경신학과 마찬가지로 구원사라는 개념도 현대의 성경 연구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와 구별해야 한다.....구원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며 아버지이신 여호와가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인식을 함축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들 때문에 발생한다. 또 역사는 하나님의 이러한 작정들이 오류없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 때문에 역사의 참된 의미는 오직 역사에 그 의미를 제공해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분별한다.....그러므로 구원사는 성경의 세 차원들을 지적해 준다. 그것은 우리가 설교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 문학적 차원, 역사적 차원, 신학적 차원이다. 우리에게는 성경 본문을 설명해야 할 과제가 있으므로 우리는 성경이라는 문학이 어떻게 메시지를 전달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 메시지에는 역사가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은 관계없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단순히 줄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역사에는 통일성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들이 나타난다. 문학성은 우리에게 역사를 가리켜 주며, 그 역사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을 가리켜 준다. 복음주의의 주장은 단순한 사건들인 역사가 계시를 구성한다는 주장, 즉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다양하게 취하는 주장을 반대한다. 바로 그 주장을 취하기 때문에, 미국의 성경신학 운동이 마침내는 성경 계시를 다룸에 있어서 무능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복음주의의 주장은 사건들이 그 자체로는 자기를 설명할 수 없으며 그 사건들의 의미를 명확히 하려면 하나님의 확고한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사건과 말씀에 대한 이러한 관계를 성경에서 거듭해서 볼 수 있다. 심지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도 그 의미를 해석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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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 박사의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에서 발췌)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개혁주의 성경신학은 보스나 페인이 잘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을 연구하고 주해하는 "주경신학"의 하위 분과들 중의 하나이다. 주경신학의 하위 분과들은 (1) 성경의 실제적 내용에 대한 연구, (2) 총론, (3) 정경학, 그리고 (4) 성경신학, 즉 "성경의 성문화(成文化) 배후에 있는,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계시된 자료의 성문화와 더불어 온, 시간과 공간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실제적인 자기 계시에 관한 연구"가 포함되는 것이다.(Vos, Biblical Theology, 5=21.)
보스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이 둘 다 필요한 것이며, 그 어느 하나도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한다. 또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보스가 하고 있는 다음의 말을 들어보라:
성경에 의존함의 정도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또 하나가 성경을 변형하여 사용하고, 하나는 아무 수식 없이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 성경 가운데 보존된 진리를 변용한다. 그러나 차이점은 이 변용의 원칙에 있다. 성경신학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구조를, 조직신학에서는 논리적인 구조를 그 원칙으로 한다. 성경신학이 발전의 선(line)을 끌어낸다면, 조직신학은 그 원(circle)을 끌어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점진성의 선상에 있어서는 그 가운데 조직화의 과정의 시작이 지적될 수 있는 몇 가지 점이 이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Vos, Biblical Theology, 15f.=32.)
그러므로 보스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모두가 성경적 신학이며(is), 성경적 신학이어야만(should be) 한다는 것을, 따라서 성경신학 못지않게 조직신학도 성경에 철저히 의존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둘은 단지 그 방법론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머레이(John Murray)도 보스를 따르면서 정확히 같은 말을 한다.( Murray, "Systematic Theology," 9.) 보스와 머레이의 이런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페인 교수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직신학]은 성경신학과 같은 사실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좋은 조직신학은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신학]은 [성경의] 사실들을, 성경신학이 그렇게 하듯이 그것이 계시된 순서대로가 아니라, 주제에 따라 종합하는 방식으로(in a topical synthesis) 배열하는 것이다.(J. Barton Payne, The Theology of the Older Testament, 22.)
그러므로 개혁주의 성경신학을 하는 분들은 성경신학만이 아니라 조직신학도 모두 성경적이어야 한다. 즉 성경에 대한 바른 주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성경신학이 성경 주해에 근거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계시의 역사를 제시해야 한다는 데에는 별 반론이 없을 것이다. 조직신학 역시도 주해의 결과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다.(193-196p)
구속사에 근거한 신학: 신학을 하는 새로운 틀의 구성과 언약신학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도움은 조직신학 구성에 있어서 구속사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보스나 그를 따르는 개핀은 "구속사적 전망은 성경을 부분적으로든지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필수불가결한 지평"이라고 이해한다.(Gaffin, "Introduction," xx.) 계시가 역사적 점진성을 가지고 주어지는 이유는 구속이 역사적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실현에 있어서 획기적이기 때문이다.(Vos, Biblical Theology, 6=22.; Gaffin, "Introduction," xvi) 따라서 계시사의 유의하는 것은 곧 구속사에 유의하는 태도를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속사를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신학을 해야 하는데, 구속사에 유의하는 신학은 한편으로는 신학을 하는 새로운 틀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리차드 린츠가 앞으로 나타날 복음주의 신학의 방향을 지시하면서 아주 강하게 주장한 요점이다.(Richard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이렇게까지 구조 전체를 고치지는 않을지라도 조직신학이 구속사의 진전을 유의하면서 작업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주 자명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개혁신학은 언약의 진전을 중심으로 신학을 구성해 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초기부터 성경신학의 도움을 받아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핀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성경의 계시는 그 내용에 관한 한 구속사적 또는 언약적이기 때문이다.(Gaffin, "Introduction," xv, xvii) 그러므로 초기부터 언약 개념과 언약 사상을 중심으로 신학적 작업을 해 보려고 하던 개혁파 신학은 코케이우스와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서부터 시작하여 계속 선구적인 성경신학을 진전시켜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보스 자신이 이렇게 말한다. "역사적 측면을 염두에 둔 개혁파의 언약 교리는 계시사를 구성하려는 첫 시도였고, 오늘날 성경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의 선구로 옳게 간주될 수 있다."(Vos, "Hebrews, the Epistle of the Diatheke,") 이런 의미에서 개핀은 보스적인 성경신학은 개혁주의의 원리인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가장 열매있고 철저하게 실현한 것이라고 한다.(Gaffin, "Introduction," xviii) (217-218p)
나가는 말
.....성경신학적 작업과 조직신학적 작업의 관계는 마치 하나의 해석학적인 순환을 해 나가는 것과 같다. 일단은 주어진 이해[전제, 암묵리의 조직신학]를 가지고 성경에로 나아가서 그 계시의 흐름을 통해 가르침을 받으면(성경신학적 작업), 그 후에 그 가르침 받은 것에 근거해서 더 풍성해진 이해를 정리하게 되고(조직신학적인 작업), 이제 이렇게 더 풍성해진 이해를 가지고 또 성경 본문과 씨름하되 그 본문의 계시성에 유의하므로 성경신학적인 작업을 함으로서 다시 또 그 결과를 조직화하는 끊임없는 나선형적인 순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보다 풍성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리의 점진적 발전이 그 언제 그쳐지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조직신학은 결코 완결된 학문이 아니며, 그 과업이 완성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머레이의 말은 아주 정확한 것이다.( Murray, "Systematic Theology," 6, 7도 보라.) 그러므로 좋은 조직신학과 좋은 성경신학은 상호 의존적인 것이지, 상호 배타적이거나 경쟁적인 것일 수 없다.(이런 바른 관계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D.A. Carson,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 The Possibility of Systematic Theology, 91ff.를 보라.) 만일 그런 관계에 있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성경신학도, 바른 조직신학도 아닐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서로 잘 조화되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정상에 이른 조직신학과 정상에 이른 성경신학은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를 풍요롭게 하고, 합하여 우리의 신학 전체와 교회를 살찌울 수 있을 것이다.(220-221p)
(이승구 박사의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에서 발췌, 193-2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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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에서 발췌
기독교에 없어서는 안될 교의(34-37p)
1. 성경이 진리를 기독교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제시한다.
2. 교회의 통일성이 교리적 일치를 요구한다.
3. 교회의 의무가 교리상의 일치를 요구한다.
4. 세상에서의 교회의 위치가 일치된 증거를 요구한다.
5. 교의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험이 가르쳐 준다.
2. 교의학의 과제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65p)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절대적으로 타당한 진리를 학문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기독교 교리의 총체를 포괄하는 일"이 교의학의 과제라고 주장한다(하지). 바빙크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교의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된 계시의 내용을 지적으로 재생산하는 바로 그 사명을 갖는다." 교의학은 기독교의 교리적 진리들을 조직적으로 제시하고자 애쓴다. 교의학은 순수하게 역사적이거나 기술적인 학문이 아니라 규범적인 의의를 지니는 학문이다.
B. 교의학의 방법론(67p)
1. 교의학의 내용이 유래되는 원천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
.....교의학자는 성경을 사용하는 가운데 자연히 계시와 영감, 일반 총론 및 개별 총론, 거룩한 역사, 그리고 특별히 계시역사 즉 성경신학 등에 관해 자기 이전에 있었던 연구의 결과들을 참조하게 될 것이다.
C. 교의학의 분류(80-82p)
1. 삼위일체적 방법
2. 분석적 방법
3. 언약적 방법
4. 그리스도론적 방법
5. 왕국 개념에 기초한 방법
6. 종합적 방법- 이 방법은 교의학에서 요구되는 통일성을 낳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하나님에서부터 출발하고, 논의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해한다. 이 방법은 다양한 교리들을 그것들의 논리적 순서대로 즉 그것들이 생각 속에서 생겨나고 또 가장 알기 쉽게 취급되도록 맞추어진 순서에 따라 논의한다. 이러한 취급방법에서는 첫 교리를 제외한 각 진리가 바로 앞의 진리와 연결되어 가장 밝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진리이며 따라서 순서상 당연히 첫째다. 이어지는 모든 진리는 올바른 관점에서 보기 위하여 이 주된 진리에 비추어 이해하여야 한다. 이 이유 때문에 인간론은 그리스도론 앞에 와야 하고 그리스도론은 구원론 앞에 와야 한다. 이 논리적인 순서를 계속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1. 하나님에 관한 교리(신론)
2. 인간에 관한 교리(인간론)
3.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그리스도론)
4. 구원 적용에 관한 교리(구원론)
5. 교회에 관한 교리(교회론)
6. 마지막 일들에 관한 교리(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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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신학이란 모든 종류의 신학이 성경에 의거해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신학의 근간이 되는 신학이다.
주경신학이란
주경신학(註經神學)은 성경을 풀이하는 신학으로서, 다른말로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이라는 뜻으로 석의신학(釋義神學)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 신학은 근래에 이르러서 상당한 여러 신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분야의 신학인 것이며 특별히 성경의 본문 내용들을 연구하기 위하여 성경의 원본 내용에 대한 회복과 그 해석에 관한 연구 작업을 하는 신학을 말한다. 그래서 주경신학은 그 연구 작업에 필요한 성경개론을 비롯하여 성경고고학과 성경사본학 및 성경해석학과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 등을 포함하는 방대한 신학의 한 부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은 특별히 성경을 해석한 결과들을 모아서 여러 가지 기본적인 신조나 교리들을 만들기도 하고, 성령께서 계시하신 성경 계시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연구하기도 하는 것으로 그 임무를 삼는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신학에 있어서,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은 주경신학을 위한 하나의 보조 자료에 지나지 아니하는 학문으로 자리 매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 아르케 아카데미
http://cafe.daum.net/archeacademy/RFiX/110
첫댓글 모든 교리와 신학이 건강한지를 쉽게 알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는
계21:2, 9-10이 말하는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중요시 하는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피터 럭크만 계열의 한국 모임은 최고의 성경을 자랑하지만
새 예루살렘을 진짜 금으로 만들어진 집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훗날 이 금 집에서 어느 정도 공간을 분양받아 살 것이라는 식의
설명을 합니다. 핀트가 빗나간 것입니다.
@낫띵 위 박용기 목사님은 이 새예루살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혹시 아시는 분 계신지요?
@낫띵 그쪽으로 가르치는 것을 못들었습니다. 물론 저서들에서도 언급한 일이 없구요.
@sam745 감사합니다.
성경에는 사람의 의지가 필요함을 말하는 많은 내용이 있지만
한가지 예로 든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이[ 세상 ]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 [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이 세상 사람 모두가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지만 성경은 또한 믿는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말 합니다
[ 주 예수를 믿으라 ] ( 행 16 ; 31 ) 이러한 명령문이 사람이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라 말한다면 더 이상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다 보니 지나친 것이라 여겨 집니다
@나사로 92 동의합니다.^^
아주 큰 능력자인 아버지가 태어난 자식에게 너 대학 보내줄께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식이 커서 대학을 갔습니다 아버지가 약속대로 대학을 보냈지요 하지만 공부를 하는 것은 아들의 목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키포인터는 공부한 아들이 대학간게 아니고 약속한 아버지가 대학을 보낸 거지요 이와같이 주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내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자를 예수를 믿게하는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의미죠 내가 믿어 구원이 되면 예수님의 은혜성이 사라져 버리지요 윗글에서 이세상은 온세상이 아니라 직역하면 이스라엘 이지만 의역하면 택한자기백성 이라고
@제이원 생각 합니다 당연히 아버지는 자식이 태어 나기전부터 대학에 보낼려고 계획을 했고요
@제이원 의지가 있다고 해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고 내가 믿어서 구원 받으려는 것은 인본주의 곧 알미니안주의나 다름없지요. 말씀운동(장안중앙교회)에서는 자유의지를 무색케하는 종속적 자유의지를 주장하기에 인간의 의지 부분을 지적한 것입니다.
@제이원 제이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은혜만 받고 뒤따르는 아무 행동이 없다면 거듭나지 않은 불택자인 것을 의심해야겠지요. 거듭나서 주와 연합된 자들에게는 행함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해서 알아서 하라고 방관하시지만은 않을 것이고, 어떠한 방법으로든 우리의 의지를 자극해서 선을 이루도록 해가실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를 믿습니다.
@나사로 92 잘 보셨습니다. 삼위 하나님 중에서도 성부 하나님(여호와 하나님)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고
하나님의 5대 속성 중에서도는 주권성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습니다.(거기에 자유의지마저도 없으니 더욱 신도를 로봇과 같이 만들고 있지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영광 받으시고 싶겠어요? ㅠ)
@sam745 예수님도 로보트라는 표현을 하는건 살다살다 처음 들어봅니다 ㅋ
@가을애 ㅎ 저두요~
그쪽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도 없다지만,
그렇게 최악으로 빠질 수도 있음을 경험합니다. 어쩌다가..
@가을애 너무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치우치다보니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sam745 행함과 행위의 차이 겠지요
@제이원 대학에 가는 자녀 ?
대학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
그러나 모든 자녀가 대학에 가는 것은 아니지요
저는 박용기목사님이 다 틀렸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님들이 지적하신 오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신학이 문제가 아니라 장안교회에서 추구하는 THE PARK'S Bibiical Theoiogy 가 문제지요 성경위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언약님께서 말씀하신것 처럼 성경이 즉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존재증명에 있다고 생각하므로 그 강론내용이 사변적이고 지식적이고 성경철학이 되었지요 그기다가 넘 절대주권을 강조하다보니 선명치 않고 안개 낀 것처럼 뿌였지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공생애 3년을 같이 하면서 많은 기적을 보고 직접 예수님을 만나도 못믿고 도망갔는데 지식적으로 설령 존재증명이 된다해도 못 믿지요 오직 성령만이 예수를
그의 신학에서 하나 잘 된 부분도 없지만,
신론 하나 잘못 되어 있으면 다른 것은 처다 볼 것도 없습니다.
특히나 성경해석을 중요시 하는 성경신학에서는 신론의 자리가 너무도 큰데요..
주와 그리스도로 시인 하도록 하지요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도 성령이 임한 후에는 부인 안고 순교하지요 제자들도 마찬가지구요 그리고 한가지 아쉬운 점은 주님은 한분이지만 은사와 은혜는 각자 분량되로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를 부인을 하지 않는 한 드러난 사이비나 이단이아니면 형제 일수가 있습니다 물론 드러나지 않고 이단사상을 가르치는 곳이 더 위험하지만요 이왕이면 745님께서 언약님의 활동을 정지 시키기 전에 윗글을 올리셔서 변증을 서로 못한게 아쉽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도 배울게 있다고 했습니다 넘 언약님이 다틀렸다고 생각 마시고 독만 분별 할수 있다면 취할것도 마니 있다고 생각 합니다 기독교는
제이원님, 무슨 말씀을? 제가 언약님을 활동정지 시켰다구요?
저는 정회원이고 이곳 운영자분들과 연락한 적도 없고 그분을 정지시키고 싶은 생각도 없구요.
그렇지 않아도 윗글을 준비하면서 제 블로그에서 작성해 이곳에 올리려는데 제 블로그 화면의 폭과 달라
옆이 잘려 많이 애먹고 올렸는데, 올린 후 보니까 언약님 강등되어 좀 아쉬워했습니다.
@sam745 님께서 정지시켰다는 얘기가 아니구요 되기전에 올리셨으면 하는 이야기 입니다
@제이원 글이 오해하기 쉽네요.
@sam745 타이밍이 안맞았네요 주님의 뜻이 있겠지요
역설의 신앙입니다 마치 우리가 죽어야 살고 버려야 얻듯이요
언약성취님은 회원 간의 분란을 일으킴이 도를 넘어 제재를 당한 것입니다. 이단 판정과는 다른 얘기입니다.
이분이 어느교단에서 안수를 받았으며 지금은 어느교단에 속해 있나요?
이분애기로는 신학이 신의 뜻과 섭리와 역사를 연구하는것이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는거라 하네요?
성경연구 밤낮으로 연구해 보세요~이단만 만들고 헛소리 하는 사람만 양산합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복음이 무엇인가와 목회가 무엇인지를 연구하는것이
목사가 할 일이라는 애기입니다.
하나님을 연구하는 신학은 목회자 수준이 아니라 선지자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고
목회자는 사람을 세우는일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것이 좋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하기사 모든 정황을 살펴 보면 그러고도 남지요.. 공부하는 쪽으로..
제가 바로 뒤에 올린 '성경개론 목차' 글에서 역사적이고 지식적인 접근으로 생각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진정 하고 싶었던 얘기는 "메마르고 생명력 없는 지식적인 접근"이었는데 망설이다가 수식어를 빼고 썼습니다. 그 이유는 박용기 목사에 대해 잘 모르시는 회원분들이 보았을 때 제가 너무 편견적 내지는 감정적으로 밀어 붙인다는 인식을 가지실까봐 많이 자제를 한 것입니다. 신도들도 그 영향으로 교제는 없이 오로지 신학공부.. 대단히 많이 알고 있다고들 자부하는 것 같은데, 신도들을 통해 은혜에 젖은 간증한번 못들었습니다.
@sam745 참고: 강원동노회 이탈 자 박용기목사의 이단성 http://blog.daum.net/ekoshin/126
하나님을 마디마디 절단해서 그 조각들을 갈고 닦는게 신학인가요?
강퇴와 논란이 반복되었지만 그 몸부림이 개혁적 투쟁에서 오는지는 의아함이 드는군요.
순전히 개혁적 측면에서 보면 '신학적 입장은 니들이 잘 몰라서 이런거다'같은 주장들이 반복되는데
개혁의 뿌리는 예수님이 원했던 의도로 회귀하는 것 이상이 있을 수 없고, 그것에 앞장서는 이는
입으로가 아니라 묵묵히 삶의 행동으로 그분의 사랑과, 봉사와, 희생의 본을 감행함으로 본을 보여야겠죠.
허다한 이론과 꾀는 성령으로 부는 바람에 먼지처럼 흣날릴 것입니다.
맞습니다! 잘 보셨고 좋은 말씀입니다.^^
┗ 언약성취 17.02.12. 23:51
삼위일체라는 성경에도 없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말보다는 대신 저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신관을 갖고 있습니다만~
위의 댓글은 언약성취님이 "예수님도 자유의지가 없으셨다"라는 자신의 글에 올린 댓글입니다.
스스로가 삼위일체를 안 믿거나 부정하는 말이지요. 장안중앙교회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신관이 잘못 되어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런류의 사람들이
좀더 프로세스화되면
제2의 신천쥐됩니다.
신을 믿는다면서 실상은 자신들의 프로세스를 믿고 있을뿐입니다.
말씀처럼 신관!
가장 중요한 신관이 잘못되었기에 저런 어처구니 없는 표현을 아주 쉽게 합니다.
@토마스 네, 그렇습니다!
알량한 인간의 머리로만 성경을 보면 삼천포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 혼자만 가면 뭐라 하겠어요? 그 해괴한 신학에 속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앞으로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장안중앙교회 승용차로 우리집에서 10분 안쪽 거리인데. ㅎㅎ
찬바람님 강등 이후로 또 한차례 바람이 불었구만유.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