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좀더 자세한 정보를 요구하시면 정리자료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간략히 설명하자면 당시 몽골군의 군세는 바이다르 왕자와 카단 왕자, 2개사단 2만의 병력이었고 헨리의 부대는 2만 5천병력이었습니다. 접전이 시작되자 몽골군의 소규모 분견대 병력인 기병이 공격을 들어오자 헨리도 소수의 기병전력만을 보내지만 몽골군의 화살세례에 주춤하게되고 이에 나머지 기병을 모두 보내 공격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에 몽골군은 특유의 '망구다이'전법으로 분열, 소산을 거듭하여 유럽기병들의 전력질주를 유도합니다. 유럽군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나 넓게퍼져서 진형을 이루지 못하게 분산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복해있던 몽골궁수들의 집
일반적으로 몽골의 중기병:경기병 비율은 4:6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리그니츠 전투에서 몽골군은 거짓 퇴각 후 역습으로 선봉대를 패주시키고, 교란작전까지 더해 본대를 붕괴시킵니다. 그러나 그 전투가 단순히 경기병만으로 진행되었다고는 볼 수 없고, 경ㅡ중기병의 유기적인 헙동작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도 기사들의 칼질 포쓰는 후덜덜해서 최종돌격과 직후 벌어진 백병전에선 몽골군도 적지않은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더군요.
단사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몽골군의 '주력' 중장기병이 돌격하여 진형을 이루지 못하고 예기가 꺽여버린 기사들을 쓸어버립니다. 그렇자 몽골궁수들도 돌격하며 궁시하여 나머지 병력마져 사살했고 헨리는 몽골기병에게 전사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전투는 누가누굴 요리했다기보단 몽골군이 대게 그렇하듯 병과들의 적절한 운용으로 인해 승리한 전투입니다. 몽골군의 편제를 잠깐 살펴보면 이들의 전략, 전술개념은 단순하며 고정적이지만 그 운용면에서는 매우 유동적입니다. 몽골군의 전투대형은 5열횡대로 중기병은 중앙의 2열을 구성하는 주력이었으며 전위와 양측익의 3개열은 경기병의 몫이었고 이들이 바로
'망구다이'전법을 구사합니다. 만약 적이 측면을 공격하게 되면 마주친 경기병은 자동적으로 전위대가 되고 나머지 2개열의 경기병은 양측익을 담당하게 됩니다. 경기병은 접전초기 적진영의 분산을 유도하고 빠지게되고 이를 중기병이 요리하게 되는 방식의 전투가 주로 이루어 졌었습니다.
전형적인 몽골의 전투방법과, 전형적인 유럽기사들의 닭돌의 환상적인 조화가 이루어진 전투죠. 유럽기사들의 닭돌이야 레그니차 전후 십자군 시대의 전쟁이나, 뒤의 니코폴리스등에서 보이듯이 한번 붙으면 대박의 포스를 터뜨리지만 전투가 길어지고 상대편이 정신 제대로 박힌 친구들이면 녹아버리는다는.;;
물론, 다들 아시겠지만, '라이프치히' 에서 '유럽 기사 10만'을 몽골군 '2천' 이 격파했다는둥은 다 개소리입니다. 진짜 그랬다면 아마 전투에 참여한 몽골군은 평생 아내가 밥먹여줘야 했을겁니다. 1인당 거의 50명씩 활을 쏘고 무기를 휘둘러야 하는데 팔이 남아 나겠습니까?
;; 리그니치에 바투가 출전했다는 괴소문도 한때 넷상에서 떠돌았죠;;;; 바투는 당시 수베데이와 같이 유럽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을뿐. 또 유럽군의 경우 2만 5천병력 이외에 이를 지원하기 위해 딱 하루거리에 보헤미아의 왕인 웬슬라스의 5만병력이 있었는데 이를 헨리는 몰랐고 그냥 기동후 대기하고 있던 몽골군과 접전했는데 이 5만병력을 나머지 2만 5천병력과 합쳐서 계산하는 거의 유니버셜적인 계산등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죠;; 그래도 7만5천인데 이것이 10만이상의 병력이 되려면 반올림과 루트공식 카오스이론을 총동원한 상당히 고테크가 필요하겠죵. 한마디로 이 가설의 근원은 안드로메다?(응?;;)
첫댓글 좀더 자세한 정보를 요구하시면 정리자료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간략히 설명하자면 당시 몽골군의 군세는 바이다르 왕자와 카단 왕자, 2개사단 2만의 병력이었고 헨리의 부대는 2만 5천병력이었습니다. 접전이 시작되자 몽골군의 소규모 분견대 병력인 기병이 공격을 들어오자 헨리도 소수의 기병전력만을 보내지만 몽골군의 화살세례에 주춤하게되고 이에 나머지 기병을 모두 보내 공격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에 몽골군은 특유의 '망구다이'전법으로 분열, 소산을 거듭하여 유럽기병들의 전력질주를 유도합니다. 유럽군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나 넓게퍼져서 진형을 이루지 못하게 분산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복해있던 몽골궁수들의 집
일반적으로 몽골의 중기병:경기병 비율은 4:6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리그니츠 전투에서 몽골군은 거짓 퇴각 후 역습으로 선봉대를 패주시키고, 교란작전까지 더해 본대를 붕괴시킵니다. 그러나 그 전투가 단순히 경기병만으로 진행되었다고는 볼 수 없고, 경ㅡ중기병의 유기적인 헙동작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도 기사들의 칼질 포쓰는 후덜덜해서 최종돌격과 직후 벌어진 백병전에선 몽골군도 적지않은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더군요.
튜튼 기사단이 리그니츠 전투에 참가했었는지는 이론이 있습니다. 리그니츠에서 전사했다는 기사단장 포포 본 오스테른의 사망연대는 리그니츠 전투 후 십여년 뒤로 되어있습니다. 아마 슐레지엔 공과 튜튼 기사단장이 같은 교회에 묻혔다는데서 나온 착오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단사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몽골군의 '주력' 중장기병이 돌격하여 진형을 이루지 못하고 예기가 꺽여버린 기사들을 쓸어버립니다. 그렇자 몽골궁수들도 돌격하며 궁시하여 나머지 병력마져 사살했고 헨리는 몽골기병에게 전사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전투는 누가누굴 요리했다기보단 몽골군이 대게 그렇하듯 병과들의 적절한 운용으로 인해 승리한 전투입니다. 몽골군의 편제를 잠깐 살펴보면 이들의 전략, 전술개념은 단순하며 고정적이지만 그 운용면에서는 매우 유동적입니다. 몽골군의 전투대형은 5열횡대로 중기병은 중앙의 2열을 구성하는 주력이었으며 전위와 양측익의 3개열은 경기병의 몫이었고 이들이 바로
'망구다이'전법을 구사합니다. 만약 적이 측면을 공격하게 되면 마주친 경기병은 자동적으로 전위대가 되고 나머지 2개열의 경기병은 양측익을 담당하게 됩니다. 경기병은 접전초기 적진영의 분산을 유도하고 빠지게되고 이를 중기병이 요리하게 되는 방식의 전투가 주로 이루어 졌었습니다.
전형적인 몽골의 전투방법과, 전형적인 유럽기사들의 닭돌의 환상적인 조화가 이루어진 전투죠. 유럽기사들의 닭돌이야 레그니차 전후 십자군 시대의 전쟁이나, 뒤의 니코폴리스등에서 보이듯이 한번 붙으면 대박의 포스를 터뜨리지만 전투가 길어지고 상대편이 정신 제대로 박힌 친구들이면 녹아버리는다는.;;
물론, 다들 아시겠지만, '라이프치히' 에서 '유럽 기사 10만'을 몽골군 '2천' 이 격파했다는둥은 다 개소리입니다. 진짜 그랬다면 아마 전투에 참여한 몽골군은 평생 아내가 밥먹여줘야 했을겁니다. 1인당 거의 50명씩 활을 쏘고 무기를 휘둘러야 하는데 팔이 남아 나겠습니까?
;; 리그니치에 바투가 출전했다는 괴소문도 한때 넷상에서 떠돌았죠;;;; 바투는 당시 수베데이와 같이 유럽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을뿐. 또 유럽군의 경우 2만 5천병력 이외에 이를 지원하기 위해 딱 하루거리에 보헤미아의 왕인 웬슬라스의 5만병력이 있었는데 이를 헨리는 몰랐고 그냥 기동후 대기하고 있던 몽골군과 접전했는데 이 5만병력을 나머지 2만 5천병력과 합쳐서 계산하는 거의 유니버셜적인 계산등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죠;; 그래도 7만5천인데 이것이 10만이상의 병력이 되려면 반올림과 루트공식 카오스이론을 총동원한 상당히 고테크가 필요하겠죵. 한마디로 이 가설의 근원은 안드로메다?(응?;;)
여기에 기사들이 시종을 데리고 다닌다는 사실도 조금 결합되고 저 은하계 건너편에서 발견된 무한 불가능 확률 연산 로그 시그마 n에서 x로 가는 순열조합공식 3호를 이용하면 100만으로 불어납니다;
쯥 그런 복잡한 공식은 0에서 0까지 정적분 해주면 됩니다.
카오스이론까지야..;
주력이 경기병이라는 근거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된건가요.
유인, 산개, 섬멸을 하려면 중기병이나 보병으로는 꿈도 못꾸지요. 경기병 전력과 중기병 전력이 맞아떨어저야 뭐가 나옵니다.
hyhn217님의 답변은 언제봐도 명쾌하고 재밋어요 ㅎㅎ 다크킬러님과 게이볼그님의 설명도 감사합니다.
저 주력은 중장기병이라고 리플을 달아놓았는데용;; ㅋ
네 봤어용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