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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문학 卍 장명등 포교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나무관세음보살
서울 숭인동 청룡사와 정업원 |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청룡사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운의 주인공 가운데 한명인 단종과 그의 부인 정순왕후에 대한 애절한 사연이 슬픈 역사 속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을 돌아보면 불교가 배척당한 조선사회의 단면이 낱낱이 드러나며, 조선의 한 임금이 비운의 생을 마감하고, 그의 부인이 한 많은 세월을 살다 간 이야기는 역사 속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청룡사는 원래 고려를 건국(918년)한 왕건이 922년에 도선국사의 조언에 따라 개경을 위협하는 지세를 누르기 위해서 지었다고 한다.
단종비 정순왕후 슬픈 사연 곳곳에 간직 왕권 다툼에 희생…궁전 나와 수행자 길 선택 ‘살아남은 자’ 죽은 왕 명복 빌며 한 생 마감
현재는 빽빽이 들어선 달동네 가옥들이 주변에 가득하고 뒤쪽으로는 재개발로 아파트가 신축돼 명당의 지세를 느끼기 어렵다. 역사의 현장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조차 든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면 청룡사와 ‘정업원구기’ 비문이 옛 역사의 체취를 느낄 수 있고, 청룡사 앞 동망봉과 인근 원각사 옆 바위에 새겨진 ‘자주동천’ 문구와 옛 우물터가 비운의 역사를 오롯이 전해주고 있다. 1452년 조선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단종이 오른다. 그해 나이 겨우 12세.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고 어린 세자가 걱정되어 신하인 황보 인과 김종서 등에게 부탁을 한다. “경들은 세자가 즉위하면 나랏일을 잘 보살필 수 있도록 보필해 주시오.” 왕위에 오른 단종은 즉위한 지 2년째 되던 해인 1454년 정순왕후 송씨를 왕비로 맞이한다. 왕비의 나이 15세였다. 어린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단종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사진설명 : 정업원으로 불렸던 청룡사 전경(사진 위)과 경내에 있는 ‘정업원구기’ 전각과 현판(사진 아래).
조선의 왕 자리는 언제나 질투와 시기심으로 가득 찬 주위의 권력다툼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숙부인 수양대군은 호시탐탐 조카의 보위를 노렸다. 문종은 집현전의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의 신하에게도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물거품처럼 허사가 되고 말았다.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의 무인세력을 휘하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단종 즉위 이듬해인 1453년 10월 김종서를 살해한 뒤 영의정 황보 인, 이조판서 조극관 등을 궐문에서 죽이고 좌의정 정분 등을 유배시킨다. 이 모든 일은 왕명으로 진행됐으나 단종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리고 문종의 동생(세종대왕의 셋째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유배된 뒤 교동도로 옮겨져 죽임을 당하고 만다. 피비린내 나는 왕권다툼에 단종은 2년 뒤인 1455년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고 수양대군(세조)이 조선7대 왕에 오른다. 정순왕후는 사정전을 나와 수강궁에 머문다. 왕대비의 그때 나이는 16세였다. 슬픈 역사는 계속됐다.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해인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모두 처형됐고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등된다. 다시 숙부인 금성대군(수양대군 동생)이 경상도의 순흥(順興)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사(賜死)되자 노산군에서 대역죄인으로 몰려 서인(庶人)으로 추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왕대비에서 대역죄인으로 몰린 정순왕후도 더 이상 수강궁에 머물 신세도 못 되어 삼각산 청룡사로 오게 됐다. 평소 궁에서도 정업원(淨業院-궁 안에 있는 법당으로 처음에는 내불당이라 불렀으나 유생들의 항의에 의해 신(身) 구(口) 의(意) 삼업을 청정히 한다는 의미)에 가서 부처님께 예불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죄업을 참회했던 정순왕후는 궁 밖으로 나서면서 출가를 결심했다. “나는 청룡사로 가련다. 너희들도 나를 따르겠느냐.” “예. 저희들도 마마님과 함께 하겠나이다.” 함께 동행했던 시녀 3명과 후궁 2명이 일제히 대답했다. 이른 새벽 궁을 나선 이들은 총총걸음으로 청룡사로 향했다. 정순왕후 일행이 먼저 궁을 떠나 청룡사에 당도하자 점심나절이 넘었다. 절에서는 벌써 왕후를 맞을 준비를 해 놓고 우화루에 머물 처소를 마련해 놓았다. 어수선했지만 정순왕후의 마음은 편했다. “이 생을 청룡사에서 부처님을 시봉하며 마감하리라….” 저녁 나절이 되자 단종이 궁을 나왔다는 전갈이 왔다. 정순왕후는 담담했다. “그래. 올 것이 왔구나.” 태연한 척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마음을 추스르고자 경내를 거닐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울렸다. “마마. 상왕전하가 도착하였나 보옵니다.” 초췌한 모습을 한 단종이 청룡사로 들어왔다. 날개가 부러진 새같이 어깨에는 힘이 빠져 있었고 곧장 왕후에게 쓰러질 듯 했다. “상왕전하. 오셨사옵니까. 어서 드시지요.” 단종이 입을 열었다. “그럴 시간이 없소. 내 영월이라는 곳으로 떠나야 하는 처지라 부인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가려고 이리 들렸소.” 마음 한 켠이 쓰라리며 목젖에서 신물이 넘어왔다. 정순왕후는 이것을 참기 위해 마른 침을 삼키면서 말을 건냈다. “그래도 밤이 이슥해 지는데 하룻밤을 지내시고 가심이 어떠할런지요.”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단종은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생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부인의 간곡한 청이었다. “그럽시다.” 방안에 든 단종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신의 편에 서 주었던 숙부 금성대군과 안평대군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도 죽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무서운 생각이 뇌리에 자꾸 파고 들었다. 옆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부인의 흐느낌이 어깨에 와 닿았다. “부인. 미안하오.” 다음날 새벽 일찍 단종 일행은 떠날 채비를 했다. 우화루를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정순왕후는 주변 사람을 물러가게 하고 마지막 이별인사를 나눴다. “상왕전하.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부디 옥체를 보전하시어 기력을 되찾으시옵소서.” “내 그리 하리다. 비록 궁을 떠나는 몸이나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부인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리다.” 정순왕후는 단종을 마을 다리까지 배웅했다. 후세에 그 다리는 ‘영원히 이별을 나눈 다리’라 하여 영리교(永離橋)라 불렀고 다시 ‘영미다리’로 불렸다고 한다. 단종을 떠나보낸 정순왕후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삭발염의를 했다. 함께 왔던 시녀 3명과 2명의 후궁도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 시녀는 희안 지심 계지라는 법명을 각각 받았고 정순왕후의 상좌가 되었다. 후궁 김씨는 원경, 후궁 권씨는 혜경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왕후의 사제가 되었다. 정순왕후는 청룡사의 노비구 지진스님으로부터 ‘허경(虛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녀의 나이 17세였다. 삭발하는 동안 정순왕후의 뇌리에서는 양반집 규수에서 왕비에서 비구니스님으로 이어지는 기구한 운명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허경스님이 된 정순왕후는 일체 바같세상과 인연을 끊고 매일 동망봉에 올라 오로지 단종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러나 이 애절한 기도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 10월말 영월에서 비보가 날아왔다. “스님. 상왕전하께서 승하하셨다고 합니다.” 소식을 들은 허경스님은 조용히 동망봉으로 향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세속과의 인연을 끊었다지만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이 생의 질긴 업연을 녹이기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일설에는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왕후가 아침 저녁 이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리면 온 마을 여인네들이 땅 한번치고 가슴 한 번을 치며 동정(同情)하는 곡(哭)을 해 ‘동망봉’(東望峰)’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보위에 오른 수양대군(세조)은 근처에 ‘영빈전’(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고도 전함)이라는 아담한 집을 짓고 식량을 내렸으나 허경스님은 끝내 거부하고 청룡사에서 82세까지 살다가 입적했다고 한다. 불교가 배척당하는 시대라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던 청룡사 비구니 스님들은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생계를 꾸렸다고 하며 그 흔적은 지금도 인근 원각사 옆 바위에 ‘자주동천’이라는 글귀로 남아있다. 우물도 복원돼 있다. <한경지략>에는 허경스님을 동정한 성 안팎 백성들은 끼니때마다 푸성귀를 갖다 대주곤 했는데 부녀자들의 많아 긴 행렬 이룰 정도였다고 전한다.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자 여인들은 지혜를 모아 청룡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푸성귀를 파는 척 모여들어 몰래 허경스님에게 갖다 주곤 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동묘 남쪽 마을인 ‘여인시장 터’의 유래가 됐다. 허경스님은 입적 후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의 시집인 정씨 집안의 묘역(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묻였다가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 단종 복위와 더불어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를 사릉이라 했다. 후대왕인 영조는 1711에 창덕궁을 들렀다가 지난날의 일을 듣고 나서 청룡사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前峯後巖於千萬年(전봉후암어천만년)”이란 친필을 내렸다. 또 ‘동망봉(東望峰)’이는 글자를 바위에 새기게 했으나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 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찾아가는 길 / 지하철 6호선 창신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가면 낙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곧바로 난 도로를 돌아 올라 5분여 오르면 청룡사가 나온다. 청룡사 안 한 켠에 ‘정업원구기’가 있고, 앞쪽에 동망봉이 보인다. 청룡사를 끼고 좌측으로 오르면 원각사가 나오는데 그 옆에 복원된 초가 뒤뜰에 ‘자주동천’이라는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우물도 함께 복원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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