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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미국의 영적 대각성운동과 찰스 피니
18세기 중반부터 시작한 미국의 영적 대각성운동은
제1차(1725~1750: 주요인물/조나단 에드워드와 죠지 휫필드),
제2차(1795~1835: 주요인물/찰스 피니),
제3차(1857~1915: 주요인물/무디)에 걸쳐 20세기 초반까지 계속됩니다.
이러한 미국의 영적부흥운동의 결과중 하나로 은둔의 나라 조선으로 수많은 선교사들이 건너오게 됩니다. (초창기 80%가 미국 선교사)
19세기 미국부흥운동의 주역 `찰스 피니`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대각성 운동’(The Second Great Awakening:1795~1835)을 이끈 뛰어난 지도자가 바로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이다. 피니는 1792년 미국의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 카운티 워렌에서 평범한 청교도 농부였던 아버지 실베스터 피니와 어머니 레베카 라이스 피니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피니가 2살이 되던 해 뉴욕 주 서부로 이사 가게 되었다. 피니는 이곳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유대어 및 법률에 관한 수준높은 교육을 받아 총명하고 유망한 청년으로 인정을 받았다.
회의적인 법률가에서 확신에찬 전도자로
피니를 통한 각성운동은 자신의 영적체험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29살이 될 때까지 교회의 설교 내용 같은 것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자주 목사와 논쟁을 했으며 교회 청년회에서 기도를 해 주겠다고 하면 한 번도 기도응답이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비꼬곤 했다. 그러나 피니는 그가 즐겨 읽는 법률 서적들이 대부분 성경에 높은 권위를 두고 있음을 주의 깊게 보고 자신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성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성경을 읽어나가던 피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모순이 결코 성경 때문이 아님을 확신하고 성경이 명백한 하나님의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갈수록 구원에 대한 갈망과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니는 자신이 구원을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성경을 읽다가도 사람들이 들어오면 성경을 법률서적 사이에 아무렇게나 섞어 놓았다.
마음이 괴로워 기도할 때조차도 혹시나 밖에서 사람들이 들을까 하여 열쇠구멍을 막고 소리 죽여 기도했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나 답답하고 괴로울 뿐이었다. 그러던 중 1821년 10월 10일 아침 피니는 그의 사무실에서 빛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예수님은 피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냐? 너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너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느냐?”
피니는 당시의 회심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술 했다. “나는 주님의 발 앞에 쓰러져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회개를 다하였다. 나는 주님의 두 발을 나의 눈물로 온통 다 적시어 놓았다.” 그는 이어 “성령이 내게 임하셨을 때 마치 전류의 파장이 내 온몸을 꿰뚫고 흐르고 또 흐르는 듯 하는 느낌을 받았다. 성령의 사랑이 내게 밀려 왔다. 성령의 파도가 계속 밀어닥칠 때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피니의 성령 체험은 바울이 다메섹(Damascus*현재 시리아의 수도)에서 빛과 음성을 듣고 땅에 엎드린 회심한 것과 매우 유사한 현상이다.
50년 동안 각지를 돌며 부흥집회 열어
이런 영적 체험 후 피니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1823년 6월 25일 그는 세인트로렌스(St. Lawrence)노회의 배려로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담임이던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조지 게일(George W. Gale) 목사의 문하에서 신학 수업을 시작해 6개월 후인 그해 12월 30일 강도사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나서 1824년 7월 1일 피니는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특히 1824년 봄부터 그는 서부지역여선교회의 후원을 받으며 뉴욕 주 북부 지역 정착민을 상대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그는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를 다니며 부흥회를 열었다. 부흥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그는 여러 대도시에서 오랜 기간 동안 부흥회를 진행했다.
피니가 말씀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많은 역사가 일어났다. 어느 날 피니가 뉴욕 주에 위치한 소돔(Sodom)이란 미국 마을에서 집회를 시작하고 1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생긴 일이다. 사람들이 모두 앉은 자리에서 땅바닥으로 엎드려 기도하고 울부짖었다. 당시 모습을 피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양손에 칼을 쥐고 휘둘러도 그들을 그렇게 재빨리 넘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넘어지기 시작하여 2분도 채 못 되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저앉거나 엎드려 기도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한편 어느 날 피니가 뉴욕방직 공장을 견학하는 동안 일하던 한 처녀가 피니가 다가가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푹 쓰러졌다. 소녀는 눈물로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그 순간 마치 화약이 폭발하듯 그 방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한편 이 공장의 주인은 “공장 일보다 영혼 구원의 일이 더 중요하다”며 그 날로 공장 문을 닫고 피니를 초청해 공장에서 부흥 집회를 열었다. 공장주는 모든 직공들이 집회에 참석하도록 했으며 며칠이 지나자 모든 직공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
‘새로운 척도’ 운동 통해 미국 사회 개혁
피니는 다른 목사들과 달리 원고 없이 자유로운 형태의 설교를 했으며 개인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해주었다. 여성들을 회중 앞에서 기도와 간증을 하게 했으며 회심자들을 강단 앞으로 불러 세워 간증을 하도록 했는데 이것을 소위 ‘새로운 척도’(New Measure)라고 했다. 피니의 새로운 척도운동을 통해 반노예운동, 여권신장운동, 형무소개혁, 금주와 절제운동 등 수 많은 사회개혁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피니의 자유분방한 예배방식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 세력은 피니에 대한 거짓 풍문을 퍼뜨렸으며 피니의 활동을 정탐해 방해공작을 했다. 적지 않은 교회가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자 않을 정도의 반대도 있었다. 피니는 일생을 통해 사회로부터 많은 반대와 조롱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그의 뒤에는 늘 주님이 함께 했다. 실제로 피니는 주님으로부터 반대 세력이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음성으로 들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방해 공작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피니의 부흥운동은 불길처럼 타오르게 되었다.
한편 미국 콜롬비아 노회에서는 피니에 대한 거짓 송사(訟事)만을 믿고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피니를 심문함으로써 그의 집회를 방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사 위원 중 한 목사는 일부러 피니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목사의 요청대로 피니는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다. 그 목사가 피니의 설교를 듣고 노회에 통보하기를 “피니의 설교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더 이상 피니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동시에 주님께서 피니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피니를 방해하면 하나님과 맞서 싸우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로 인해 콜롬비아 노회에서는 피니를 반대하는 소리가 없어지고 피니의 복음 전하는 일에 협조를 했다. 결국 그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약해졌으며 오히려 그를 지원하는 세력은 더 강해졌다. 이를 통해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대각성운동은 피니를 통해 절정에 이르게 됐다. 특히 당시 매우 보수적인 신학자였던 윌밍턴(Wilmington)의 길버트(Gilbert) 목사도 피니를 초청해 집회를 열었다.
피니, 일생동안 50만 명 전도
특히 필라델피아에서 피니는 3,000명을 수용하는 한 독일계 교회에서 집회를 계속했다. 이 집회에서도 기적을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를 통해 미국의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기독교 부흥이 일어났으며 피니의 부흥집회가 절정에 달했을 때 100,000명의 사람들이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피니는 뉴욕이건 필라델피아이건 일단 부흥회를 시작하면 일년 이상 계속했다.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어 청중들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들었다. 피니는 1825년 후반부에 도시 중심으로 집회를 가졌으며 뉴욕에서는 7년 동안 대집회를 가졌다. 1830년 뉴욕 주 로체스터에서 가진 전도 집회 때는 시민 10,000여 명 중 1/10이 회개했고, 1,200명이 교인으로 등록하게 되었으며 1831년 한 해 동안에 십 만 명의 성도가 회심을 체험하는 기적을 낳았다.
사랑의 설교, 능력 있는 기도 그리고 부흥
피니가 가는 곳마다 커다란 부흥이 잇따랐다. 그의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부흥의 방식은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여러 교단의 목사들이 그를 비판하기 위해 그의 집회에 참석했지만 곧 그의 전폭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설교 원고를 준비하지 않았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그날 집회에 필요한 성경 말씀이 어떤 것인가를 하나님께 물었다. 그날 필요한 성경 말씀을 받으면 계속 그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다만 그의 입을 사용하시어 성령의 인도로 회중에게 말씀하실 것을 구했다. 피니는 기도하지 않고는 설교할 수 없었으며 그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오랜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없이는 한 사람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기도에 대한 피니의 믿음은 확고했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경 말씀과 약속에 근거해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이 결코 거절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강단에 서면 하나님은 그 곳에 피니와 함께 계셨다. 선포되는 그의 설교는 강력했다.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들을 보면 그의 마음을 다해 그들을 꾸짖고 싶어졌고 주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그들에게 말씀을 쏟아 놓게 하셨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피니는 사람들의 거절로 하나님이 영이 얼마나 슬퍼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가슴 깊이 느꼈다. 사람들도 그가 아무리 심한 어조로 꾸짖어도 그의 설교 깊은 곳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심한 어조에 화를 내거나 비난을 퍼붓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 왔다.
훗날 다른 사람들은 피니의 설교가 성공한 원인을 그의 논리적 제시,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그의 관심, 그리고 그의 압도적으로 부드러운 사랑의 마음에 연유한다고 분석했고 피니는 다만 성경에서 제시한 복음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1835년 피니는 오벨린 신학교에서 강의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피니는 단순히 신학 이론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성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강의를 시작하는 기도를 하다가도 그들을 위해서 성령에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하다 보면 강의 시간이 기도회 장으로 변하곤 하였다. 학생들은 그 기도회로 성령 충만함을 받고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839년 아프리카 탐험을 떠나기 전에 그의 복음을 듣고 첫봉급을 스코틀랜드에 있는 동생에게 부치면서 피니에게 가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피니가 오벨린 신학교에 있는 동안 학생들이 10배 이상이나 늘어났다. 이는 그가 교육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혼을 고결하게 다듬는 생의 변화이며 사랑이 없는 교육은 영적인 실패작이라고 생각해 온 결과였다.
그는 계속 유명한 전도자, 교수, 대학 학장, 목사가 되었다. 확성기도 대중 매체도 없던 시대에 피니는 50만명 이상의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었다. 통계에 의하면 무디의 집회에서 회심한 사람 중 85%가 이전 생활로 돌아갔으나 피니의 집회에서 회심한 사람 중 85%는 계속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는 그가 회심한 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변화된 삶을 위한 성화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삶도 하나님의 온전한 임재 가운데 거하는 삶이었다. 그의 설교를 듣던 많은 사람들이 그 격렬한 어조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회개하며 그에게 배운 많은 학생들이 그의 사랑에 넘친 강의를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저서를 통한 부흥
피니가 교회에서 목사로 사역하면서 한 일련의 부흥에 관한 강의들은 나중에 책으로 나와 또 한번 부흥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부흥에 관한 강의들은 세계각국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적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진 정한 부흥(Lecture on Revival of Religion)은 설교자들을 위한 "실천적" 교과서로 판매성적이 가장 높은 종교 고전에 속한다. 이 책은 지적인 이론이라기 보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통한 용광로에서 다져진 하나의 결정판이다. 여기에서는 부흥의 기초 공사 즉 원리를 다루고 있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인 강좌(Lectures to Professing Chirstians)"와 자서전, 조직 신학은 아직까지 많이 찾는 잘 알려진 역작이다.
[2008.3.15. 폴
*찰스 피니의 기도의 영
피니는 초신자 때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많이 가졌다. 그는 아주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쳤고, 때로는 문자 그대로 ‘쉬지 않고’ 기도했다.
그는 자주 은밀히 며칠씩 금식하는 것이 아주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숲속이나 교회나 자기만이 아는 곳에서 그것을 무척 즐겼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기 못하고서는 살 수 없었고, 언제라도 내 위에 구름이 깔리면 쉴 수도 공부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과 내 영혼 사이의 통로가 다시 깨끗해지기까지는 일에 집중하여 최소한의 만족이나 유익도 얻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피니의 사역을 특징지었던 중요한 한 가지는엄청난 ‘기도의 영’ 이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있는 사역의 비결이 전적으로 기도에 있다고 보았다. “나는 단 하루나 또는 단 한 시간이라도 은혜와 간구의 영을 잃으면 능력있게 효과적으로 설교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 대화를 통해 영혼을 구할 수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불멸[不滅:영원히 없어지지 않음]의 영혼들의 무게가 나를 눌러 나는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나는 날마다 시간마다 고뇌의 믿음 가운데 그러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나는 어두움의 권세와의 투쟁을 위한 멍에를 메었으며, 하나님께서… 그 신생국에 더 큰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가 부흥회를 인도했던 서부 뉴욕주의 로마에 있었던 기도의 영에 대해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실로 그 마을은 기도로 꽉 차 있었다. 마을의 어디를 가든지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길거리를 가다가 그리스도인 두세 사람이 우연히 만나게 되면 그들은 기도했다. 만난 곳이 어디이건 기도했다. 회심하지 않은 죄인이 어디에 있건, 특별히 그가 부흥을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두세 형제나 자매가 그를 특별히 기도제목으로 삼고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 신학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니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기독교에서 가장 어렵고도 드물게 얻어지는 것이 기도의 영입니다. 만일 당신이 기도의 영을 잃어버린다면 당신은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천사의 지혜를 가졌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는 기도의 능력이 교육이나 신학적 지식 등 어떤 것보다 우선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신이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아주 현명하지만 딱딱하게 되어 신학교를 졸업하고 기름부음도 없고 생명도 없으며 영성도 없이 사역에 뛰어들 것이 얼마나 확실한 가를 생각할 때 나는 낙심에 빠져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칠 것입니다. ‘조심하시오! 책을 덮어 두고 기도하시오! … 아니면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서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피니는 기도의 영이 없어지면 그 즉시 사람은 세상적인 마음으로 가득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로서는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목사보다 더 추하고 가증스러운 존재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은밀한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라 믿었다.
찰스피니의 기도 생활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아가2:1)
봄이 다가오자 믿은 지 오래된 신자들의 열성이 줄기 시작했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예배당에 가서 혼자 오랫동안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아침에 기도회에 참석할 형제들을 상당수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매우 이른 아침이었고 우리는 글을 읽을 수 있을 만큼 환해질 때 까지 함께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이 아침 집회에 우리 목사님도 참석하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태만해 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일찍 일어나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깨우곤 했다. 몇 번씩이나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참석할 확률이 제일 많은 형제들을 불러내서 함께 귀한 기도의 시간을 갖곤 했다. 그러 나 차츰차츰 그들은 마지못해 참석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내 게 큰 시험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도 나는 이런 식으로 돌아다녔으나 예배당으로 돌아왔을 때는 모인 사람이 불과 몇 명 되지를 않았다. 게일 목사가 교회 문 옆에 서 있었는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갑자기 하나님의 영광이 아주 신기하게 내 주위를 둘러 비추었다. 때는 막 동이 틀 무렵이었다. 그러나 홀연히 너무나 영광스러운 빛이 내 영혼을 비추어서 나는 땅바닥에 꼬꾸라졌다. 나는 이 빛 속에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빛은 사방으로 빛나는 태양과도 같았다. 그것이 너무나 강렬해서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눈물을 펑펑 쏟았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그 때 다메섹 도상의 바울을 꼬꾸라뜨렸던 그 빛이 무엇인가를 생생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는 그런 빛이었다.
내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자 게일 목사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피니 형제님?”
나는 그에게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런 빛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왜 내가 그러한 마음 상태에 있어야 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과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다는 것만을 말했을 뿐이었다. 정말 그 당시에는 내가 본 그 영광스러운 장면을 말로 묘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울음으로 그것을 표현했으며 그 환상-만약 그것을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은 지나가고 내 마음은 고요해 졌다.
내가 갓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많이 가졌었다. 그러한 시간은 내 마음에 자주 이러한 인상을 남기고 끝나곤 했다. “가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게 되도록 주의하라.” 그 당시에 나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명령을 잊어버리고 내가 하나님과 가졌던 교제에 대해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었다. 그러나 주님과 내 영혼 사이에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는 유익이 못 된다는 것을 나는 곧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내 말을 들을 때 놀라는 것 같았고 때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신성한 계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을 곧 배우게 되었다. 나는 아주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쳤고 때로는 문자 그대로 “쉬지 않고 기도하기도” 했다. 또한 자주 은밀한 금식을 며칠씩 하는 것이 대단히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한 날이면 나는 완전히 홀로 하나님과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리하여 보통 숲속을 방랑하거나 예배당으로 들어가거나 또는 완전히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어떤 곳으로 가곤 했다. 때때로 나는 금식 중에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 점검의 생각으로 자신을 시험하기도 했다. 그 후에는 목사님과 교회의 대접을 받았다. 나는 나 자신의 느낌을 점검한다는 의미에서 내 마음을 조사하려고 했고 특별히 나의 동기와 마음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곤 했다. 나는 이런 길로 나갈 때는 아무런 진전 없이 하루가 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뒤에 나는 왜 그러했던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의 동기와 느낌으로 주의를 돌릴 때는 나의 감정도 침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식하면서 성령님으로 하여금 그 분의 뜻대로 행하시게 해드리고 내 자신을 드려 그 분이 나를 인도하고 가르치게 해드릴 때는 항상 가장 큰 유익이 있다는 것을 발견 했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지 못하고서는 살 수 없었고 언제라도 내 위에 구름이 깔리면 나는 쉴 수도 없었고 공부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과 내 영혼 사이의 통로가 다시 깨끗해 지기까지는 일에 집중하여 최소한의 만족이나 유익도 얻을 수 없었다.
찰스 피니의 자서전 中
피니의 부흥운동 영적각성부흥운동 / 2011. 11. 24. 21:45
영적 각성운동의 역사적 고찰 7 - 피니의 부흥운동
피니의 부흥운동 - 미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부흥운동 피니는 19세기 중엽 미국 교회사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에 대한 언급 없이 미국 역사의 중심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남북 전쟁 직전 시대에 미국 개신교 신학과 생활에 일어난 거대한 변혁의 주역이었다.
1792년 미국 코넥티컷주의 리치필드에서 출생
1818년 뉴욕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견습 생활
1821년 회심과 성령 체험
1821-32년 11년간 부흥운동 주도
1832-35년 뉴욕에서 목회
1835-50년 오하이오주의 오벌린 대학 신학교수
1851-66년 오벌린 대학 학장
1875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18세기말에 이르러 미국 기독교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침체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온 청교도들이 다스리던 과거와는 달리, 그 당시 기독교도들은 전체 인구의 10%를 넘지 못했다. 술집·폭동·방종이 신대륙을 휩쓸고 있었고, 전통적 신앙에서 떠나는 풍조가 만연되어 '더 이상 기독교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고 외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찰스 그랜디슨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1792-1875)를 택하여 강력한 '성령의 부흥'을 미국 땅에 보내셨다. 그를 통하여 19세기에 걸쳐 미 전역으로 성령의 불길이 퍼져나갔으며,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사회·정치·문화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미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고야 말았다. 참된 부흥은 반드시 영적 체험을 동반하지만, 감정의 흥분상태나 황홀감 같은 것이 곧 참된 부흥의 징표는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교회 성장이나 은사운동 등은 참된 부흥과 뚜렷이 구별된다.
‘참된 부흥은 반드시 자신의 죄에 대한 심오한 각성, 그것도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 놓인 지옥에 갈 죄인이라는 각성이다.’ 이렇듯 한 영혼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깊이 각성될 때 회개의 현상은 실로 인간의 추측을 초월한다.
이러한 회개는 반드시 큰 충격과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1.피니의 회심과 성령체험
피니는 뉴욕의 아담스(Adams)에 있는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견습 생활을 하던 중 교회에 출석하여 성가대를 지휘하게 된다.
법률의 기본법을 공부하던 피니는 보통법의 위대한 원리들 가운데 많은 부분의 권위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성경을 관심 있게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21년 10월 10일 성령의 역사로 인해 죄에 대한 자각이 가중되고, 자기가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 같은 생각에 번민하다가, 그의 사무실로 향하던 도중 복음을 깨닫고 전격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회심을 체험한 그날 저녁 피니는 퇴근 후 사무실 뒤에 있는 방으로 기도하러 갔을 때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그 방에는 불이나 등이 없었지만 내게는 환한 것 같았다.
그곳에 들어서서 문을 닫았을 때 나는 마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로 마주 대하는 듯했다.
그분은 한마디의 말도 없었지만… 나는 그분에게 내 영혼을 쏟아 놓았다.
그리고 나는 어린애처럼 소리내어 울며 흐느끼는 음성으로 죄를 자백했다." 마음이 차분해진 피니는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는 순간 성령의 강력한 불체험을 하게 된다.
『그런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누가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성령은 나의 몸과 영혼을 관통하여 지나가는 것처럼 나에게 임하셨다(The Holy Spirit descended upon me in a manner that seemed to go through me, body and soul). 마치 전류와도 같이 나를 꿰뚫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정 그것은 용해된 사랑의 파도처럼 임하는 듯 했다(I could feel the impression like a wave of electricity, going through and through me. Indeed it seemed to come in waves and waves of liquid love).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숨결이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거대한 날개가 돌며 부채질 하듯 내게 밀려왔다.
내 마음 가득히 번져나간 놀라운 사랑을 어찌 말로 표현할 길이 있겠는가?
나는 기쁨과 사랑에 겨워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말할 수 없는 마음속의 격정으로 인해 문자 그대로 고함치듯 울부짖었다.
이 물결은 거듭 거듭 내게 밀려와 드디어 나는 외쳤다: '이 물결이 계속 내게 밀려오면, 나는 죽습니다. 주여, 더 견딜 수가 없습니다』[Leona Frances Choy, Powerlines, p.80]
피니는 이 사건 이후 세상의 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사의 꿈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소송을 담당하는 주의 종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바로 이 순간부터 '성령의 부흥'이 그를 통하여 강력하게 미국 땅에 임하게 되었다.
2.하나님의 말씀과 신 임재의식을 통한 각성
'성령의 부흥'에는 언제나 말씀이 놀라운 능력으로 살아서 역사 한다. 즉 복음 진리가 교리로서가 아니라 생생한 실재로서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영혼들은 자신의 죄악에 대해 심히 애통하게 되고, 이러한 자각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물론 자신의 삶에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 피니가 로마(Roma)라는 지방의 어느 회중 교회에서 설교하던 중 청중들이 격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하나님의 성령이 어찌나 강력하게 역사 하는지, 그가 단 몇 마디 말을 했는데도 말씀이 사람들의 폐부에 화살처럼 박혀 아주 건장한 남자들이 고뇌 속에 몸부림쳤다. 그것은 칼이 심장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런 장면을 목도해 보지 않고는 진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 말씀은 반석을 치는 불과 방망이였고(렘20:9,23:29), 영과 혼을 찔러 쪼개는 두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이었다(히4:12).
‘심지어 건장한 남자들도 말씀에 의해 꼬꾸라져 자신을 가누지 못하고 친구들에 의해 실려 집으로 옮겨졌다.’
이처럼 '성령의 부흥'은 살아있는 말씀을 통하여 영적 각성을 일으킨다. 피니가 소돔과 고모라성처럼 사악한 뉴욕 제퍼슨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위로부터의 권능(the power from on high)이 급류처럼 사람들 위에 임하였다.
단 몇 마디의 말을 했는데도 성령이 어찌나 강력하게 역사 하시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폐부에 화살처럼 박혀 온 회중은 거의 일분도 되지 않아 무릎을 꿇거나 얼굴을 감싸고 저들의 죄를 고백하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고뇌 속에 울부짖었다.
그것은 칼이 심장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건장한 남자들도 말씀에 의해 고꾸라져 몸을 가누지 못하고 들것에 실려 집으로 옮겨졌다.
그런 장면을 목도해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렘23:29;히4:12).
'성령의 부흥'에는 강력한 신(神) 임재의식이 동반한다. 부흥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당신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의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의심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가 눈앞에 밝히 보이기 때문이다. 피니는 가는 곳마다 '두려움을 일으키게 하는 하나님 임재의식'(an awesome feeling of the presence of God)이 도시나 마을 전체에 임하여 엄숙함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충만해짐을 자주 경험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운 심판에 대한 영적인 무감각 상태에서 살아 움직이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지옥이 현존하는 실체로서 저들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Wesley Duewel , Revival Fire , pp.92-130)
3.성령의 부흥에 있어서의 인간의 책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책임감 있게 행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배제하지 않는다.
부흥이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쳤다.
사람이 천둥·우박·지진을 일으키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듯, '성령의 부흥'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흥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조나단 에드워즈적 생각이 미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부흥이 15년에 한 번씩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신 사람은 모두 회개할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또 한 차례의 부흥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부흥에 큰 장애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피니는 "부흥이란 적절한 수단들을 올바로 사용할 때 임하는 결과"(A revival is the result of the right use of the appropriate means)라고 주장했다. 즉 사람들이 준비를 갖추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부흥은 임한다고 했다.
피니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던 칼빈주의의 견해보다 모든 인간 내면에 이미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기독교적 삶을 결단할 수 있는 '선행적 은총'(先行的 恩寵 - prevenient grace)이 존재한다는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 책임이 강조되었고, 더 나아가 성령의 도움으로 이 땅에서 '완전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Charles G. Finney, Revival Lectures, pp.2-16]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핑계로 기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한 피니는 아주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일에 바쳤고, 자주 은밀히 며칠씩 금식을 했다.
부흥의 때에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 함과 동시에 악령들의 도전도 치열하게 전개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 흑암의 세력을 이기는 비결은 전적으로 기도에 있음을 피니는 깨달았다.
이러한 영적 전쟁에 있어서 피니의 사역을 특징지었던 중요한 한 가지는 엄청난 '기도의 영'(a spirit of prayer)이었다.
그는 부흥이 많은 기도에 의해 유지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단 한시간이라도 마음속에 은혜와 간구의 영을 잃으면 능력 있게 설교할 수 없을 뿐아니라,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 영혼을 구원할 수도 없다고 고백했다.
지옥 가는 영혼들에 대한 구원의 심각성에 짓눌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출32:32;롬9:1-3).
기도의 짐이 어찌나 무겁던지 그는 두 손을 꼭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지옥을 향해 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통곡하며 기도하곤 했다. 이러한 피니의 열렬한 기도에 응답하여 하나님은 권능으로 임하셨던 것이다.
1857-59년 사이에 피니의 부흥운동은 국가적인 부흥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미국 전역을 통해 적어도 1만 여 개의 정기 기도회를 가졌으며, 당시 미국 인구가 3천만 명이었는데 이 기간동안 거의 2백만 명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이 부흥으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도덕적인 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는지 루이스빌과 켄터키주의 일간 신문들은 천년왕국이 미국 땅에 도래했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부흥은 영국 제도 전역을 휩쓸더니 북아일랜드·웨일즈·스코틀랜드까지 확산되어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런 모든 부흥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의 기도를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러한 '성령의 부흥'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메마르고 화석화된 정통과 복음을 떠난 자유주의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며 복음을 농담처럼 여기는 지옥을 향해 가는 영혼들(창19:14)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바로 지금이 영적으로 깨어있는 성도들이 부흥의 여명을 기다리며 기도로서 인고(忍苦)의 밤을 지새우며 통곡할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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