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여주에가서 오랫만에 강가에 서본적이 있다.그때 강물은 쉬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강에 흐르는 물은 그저 강물일 뿐이다.바람이 불고 구름이 흘러가도 그저 바람이요 구름일 뿐이다.하지만 우리 사람에겐 지울수 없는 제마다의 이름이 있다.그리고 그이름은 죽어서야 비로서 진정한평가를 받는다.모든사람들이 훌륭한맏며느리였다고 효부였다고 현모양처였다고
입을모아 칭찬하며 몹쓸병으로 돌아가심을 애도하였던분이 나에게도 6촌형수님이 되셨던 남평
형수님(故 문정숙 여사님) 이셨다. 당신을 많이 알게된데는 대소가 친척이었기에 가능했다.
형수님은 항상 누구에게나 자상하시고 따뜻이 대했다.그리고 좋은얘기를 해 주셨다.
남의얘기를 잘들어주시고 옳게판단을 해주시는 요즘 말하는 훌륭한 멘토이셨다 그분은 작게는
집안을 환하게 비추셨던 등불이요. 크게는 사회의 한구석을 환하게 비추며 살다가신 분이었다.
그분이 그렇게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살다가셨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존경하며 또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그럼 지금부터 런닝머신을 타고 1960년대로 날아가보자
1960년대는 우리나라 전체가 경제적으로 한없이 빈곤했던 시절이었다.그래서 해마다 춘궁기
쌀도 보리도 다떨어져버린 봄을말한다. 일명 보릿고개 너무나 먹을것이없어서 도토리밥,무우밥,쑥과밀가루조금섞어삶은 쑥부쟁이,보리와섞어삶은 보리부쟁이,고구마,씨감자,풀씨나물,취나물
고사리,더덕,도라지,칡뿌리,찔구 삐비,깜바구,참꽃,산딸기,뱀딸기,고상,을 씹어먹었고 여름에는
주식이 수잽이죽이었고 산에는 고란이,토껭이가많아 잡아먹었고,물에는 큰냇물둠벙에가물치
고기는 둠벙을 품어 발대로 잡았고 마을앞냇물에는 메기,장어(장어는 거머골뚝방에만 있었음)
꺽지,붕뭉치,붕어,피리,용지름,미꾸라지,째개,앵에,징게미,자라,모래무지,까재 등등등........
자연의생물들이 있어 배고픔을 덜어 주었었다.아마도 그때그당시엔 흑백TV나 라디오가 있는집은 무조건 부잣집이었다
너무나 먹고 사는것조차힘들고 어려운 그때에 그시절에 남평형수님은 시어머니 베실댁으로부터 살림을 인계받아고달픈살림을 꾸려가셨던 것이다.없는집에 제사는 잘찾아온다는 말이있듯이
종갓집인지라 제사는 꼬리를 물듯찾아왔고 게다가 더욱허리를 휘청케한것은 그힘든와중에
자녀들 교육문제가 끊임없이 힘들게 하였을 것이다.형수님에게는 복내장날에 새옷하나 사입으시는것도 큰사치였을 것이다.슬하에 장남등재로부터 딸 인순,돈재,숭재,강재 4남1녀를 남못지
않게 당신의피나는 희생과노력으로 고등학교이상을 가르치셨다.그도 모자라 광주에 유학까지
보내시면서......
형수님을 내가알게된계기는 같은 대소가 인척관계로 인함이었다.당시우리대소가는 당촌에 하남댁,평동댁,베실댁,독황댁,생이댁,완재씨,장터 용하형님이계셨고 버드골엔 사평댁,일봉댁,하동댁,우리집(강골댁)고잔댁이 있었다.다른대소가도 마찬가지였겠지만,당시 우리대소가는
제사만 지내면,생신날만 되면 무조건 한가정당어른 두분을 불러 모셨다.모시고 반드시 식사를 함께하는것이 철저한 습관이었다.그제사가 가장많은곳이 사평댁이었는데 당시에 민재씨는 객지에서 유학을했고 종곤씨는 어린탓에 꼭나를 불러 당촌심부름을 시키셨다.그런저런 연고로나는
남평형수님을 잘알게되었고 좋아하게되었다.그당시의제사음식은 많은사람들을 영양실조로부터
구해주는 기능과대소가친목도모 라는 두가지기능을 하였다.
그런심부름도하고,대소가집집에서 잔치도하였기에 우리대소가집은 집의구조,무슨나무가있는지 당감나무가 어디께쯤있는지 나는 훤히 알고 있었다.그후 15세되던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고향을 떠나왔고 그후론 대소가집들을 어쩌다 찾았고 당촌도 수몰지역이되어 한집한집 헐렸다
서울 일산에서 많이사셨던 형수님.지난4~5년 동안 대소가모임 총무를 엉터리로해서 형수님을 자주 못뵈온것이 후회가 된다.병환이 깊어지신후 2번 일산으로 찿아뵈었다.마음은 수도없이 갔다 왔지만 몸은 못갔다.형수님 ! 자주못찾아뵈서 죄송해요.뭔말을 이렇게온것이 너무나 고맙지 많이 바뿔텐데.....두번이나 나를 위해 밥상을 차리셨다.마지막뵙고온날은 병마에시달리시는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해드릴수없는 나자신의 무력감,지나온 나의굴곡진세월의설움까지겹쳐
나는 형수님을 부여안고 울었다.어쩌면 나의어머님같고,나의누님같은 형수님이 아닌가?
그리고 추석을 못넘기시고 가셨다.마치 자식들에게 추석에 짐이안되게 하시려는듯....
내가본 형수님은 가냘픈여인이 아니었다. 그분은 남자못지않은 여장부였다.
어찌그분의80평생을 이렇거니 저렇거니할수 있을까.다만 파란만장한삶속에서 나는 수박겉핱기
로 백분의 일을 애기했을 뿐이다.어쨋든 가신 형수님같은분은 다시볼수 없을것 같은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한동안 담고있던생각을 털어 개운한마음으로 형수님을 생각할 수 있을것 같다.
2011년 9월21일 형수님을 생각하면서 知捧 이 용춘 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