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금강경 번역본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나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해석본이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용어나 개념은 물론 뜻의 이해 정도가 다른 데에서 기인한다.
더구나 구마라즙이 402년에 중국어로 번역했던 시기를 더 거슬러 올라 산스크리트어이던 때부터 새로이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그 양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여기에 한술 더 뜨서 북인도 4~5세기 학승 무착(無着)은 금강경을 18주위계위도로 나누는데 이는 초주(初住)에서 18이지(二地)인 등각(等覺) 묘각(妙覺까지 나눈 계위(階位)이다
다시 북인도 4~5세기 무착의 동생 학승 천친(天親,혹은 世親)이 27종의 의심을 끊는 의단(疑斷)으로 금강경을 분류하기도 하였다.
중국 당나라시대 소명태자는 금강경을 분위기별로 32분으로 분류하였은데 우리나라 함허득통선사는 중국의 오가해 금강경에다 소명태자의 32 분단으로 나눈 것을 합치고 다시 대조(對照)하고 교정(校訂)하여 서문을 붙이고 설의(說誼)했다. 이를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러한 금강경의 분류나 해석은 어느 정도 자성의 본성을 깨달은 사람만이 이해가 가능한데 이 금강경을 교학적이고 연역적 해석으로는 미흡한데 나는 무운 가구식 도어해(無耘架構式圖語解) 금강경 62 분단으로 교학적으로 총설 별설 유통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러한 금강경의 잡다한 혼란을 막기 위해 조계종에서는 <금강경 표준본>(조계종출판사, 2009)을 만들어 보급하기에 이른다. 현재 조계종은 이 판본의 해석을 기준으로 금강경을 해석하고 이해한다.
구마라집과 여러 선사들의 범어 한역본이 한반도로 들어온 이후 최초의 번역은 세종대의 언해본이고, 이후의 해석은 구한말에야 이루어진다. 얼마나 긴 세월 동안 한글이 괄시를 받았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요즘의 수많은 번역과 해설은, 또한 이전의 금강경 주해서를 근거로 하고 있다. 금강경 오가해니 삼가해니 하는 것은,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관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금강경 오가해는 송나라 때 편찬됐는데, 다섯 명의 해석을 통합해 놓은 것이다. 함허득통선사는 대조(對照)하고 교정(校訂)하여 서문을 붙이고 설의(說誼)했다. 이를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는데, 금강경이 점차 대중화됐다. 함허 득통의 이 설의(說誼)가 판본으로 출간된 이래 끊임없이 간행됐다. 현재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통 강원인 승가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즉 그가 설의에 주(註)를 붙이고 있는 곳은 야보(冶父)와 종경(宗鏡) 뿐이다. 특히 야보송에 대해서는 착어(着語)와 연송(聯頌)에 일일이 설의를 붙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규봉 종밀, 혜능, 부대사에 대해서는 각각 한 곳에서만 평을 달았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보조 지눌과 함허 득통의 금강경 선양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금강경이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자리를 굳히는데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