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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오픈의 역사-골프 명가 톰 모리스가문과 파크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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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종가' 영국인들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오픈"이라는 엄청난 의미로 자존심을 과시한
아예 “고유명사”로 되어있는 “디 오픈 챔피언십(The Open Championship)” 역사적으로
나 규모면이나 사실 지구촌 골프계에서 '최고(最古)의 메이저'라는 건 분명하다. 1860년
10월 프레스윅의 12홀짜리 코스에서 열린 3라운드 대회에서 윌리 파크(Willie Park Sr.)
가 초대 챔프에 등극한 이래 벌써 155년의 세월이 흘렀다. 1, 2차 세계대전으로 12차례
대회가 무산되었지만 2018년 147번째이 스코틀랜드 카누스티 골프 링크스에서 챔피언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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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7회 디 오픈 개최코스인 카누스티 골프 링크스 둘러 보기
https://blog.naver.com/k3565512/221310771304
골프의 종주국인 영국과 유럽에서는“디 오픈”이라 하고 미국에서는 “브리티시 오픈”
이라고 불리우는데 서로 입장차이에서 비록된다. 그만큼 자존심이 걸려 있는 큰 메이
저 대회이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도 이를 존중해 2013년부터는 투어 일정표에
“브리티시 오픈”이 아닌 '디오픈'으로 공식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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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오픈의 트로피 역시 '클라레저그'라는 독특한 명칭을 붙였다. 클라레는 프랑스 보르도산 와인,
클라레 저그는 '와인을 담는 주전자'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유일한 오픈 챔피언에게 주는 우승컵
을 주전자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영국인들의 남다른 '와인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그 가치는 물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챔피언이 갖는 자부심과 명예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12만 달러(1억4000
만원) 정도를 호가했다. 헤리티지옥션이 2013년 8월 미국 시카고에서 진행한 경매에서다. 샘 스니
드(Sam Snead 미국 1912~2005)가 1946년 우승 당시 받은 클라레저그다. 스니드가 바로 메
이저 7승을 포함해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PGA투어 통산 최다승(82승)의 주인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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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레저 이전에 우승자에 수여된 챔피언 벨트>
그린브라이어골프리조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아들 잭 스니드가 경영에 어려움을 겪자 아버지
의 유품 가운데 트로피와 메달 등 총 14점을 내놨다. 1951년 PGA챔피언십 우승컵 '워너메이커'가
12만 달러, 1959년 라이더컵 우승 트로피는 18만 달러(2억원)에 팔렸다. 그러나 최초의 디 오픈
트로피는 클라레 저그(왼쪽)가 아닌 가죽 벨트(오른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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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레 저그>
2018년에도 단 한 명의 골퍼가 디 오픈 챔피언십의 우승컵인 클라레 저그를 들어 올리며 역사 속에
남을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만큼 디 오픈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 대회이며, 그 어떤 메이저
대회보다도 디 오픈 우승을 꿈꾸는 선수들 역시 많다. 물론 꿈의 무대 라고 일컫는 “마스터스”가 있기
는 하지만 우열을 가릴수 없는 대회들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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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오픈 초대 챔피언 윌리 파크 시니어>
최고의 메이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디 오픈이지만 그 시작은 지금과 비교한다면 미약했다.
디 오픈의 고향은 모두가 생각하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골프장 올드 코스가 아
닌 프레스트윅(Prestwick) 골프 클럽이었다. 1860년 프레스트윅 멤버들이 스코틀랜드 최고
의 프로 골퍼를 찾겠다는 목적으로 8명의 프로 골퍼들을 초대해 첫 번째 디 오픈을 개최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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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모리스 시니어>
최초의 디 오픈은 우승 상금도 없었고, 트로피는 클라레 저그가 아니라 빨간색 가죽 벨트
였다. 대회는 하루 만에 프레스트윅의 12홀 코스를 세 라운드 돌면서 치러졌으며, 가죽 벨
트의 첫 번째 주인은 윌리 파크(Willie Park Sr.1833~1903)였다. 윌리 파크는 그 후로도
1863년과 1866년, 1875년에 디 오픈에서 우승했지만, 역사 속에서는 톰 모리스 부자의
명성에 밀려 부각되지 못했다. 역사속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윌리 파크와 톰 모리스(Tom
Morris Sr 1821~1903)간에는 대를 이어 지역을 대표하는 치열한 경쟁을 했다고 한다.
톰 모리스는 첫 대회에서는 윌리 파크에게 밀려서 2위를 차지 하였다. 이에 톰 모리스는 다음
해인 1862년도 2회 대회에서 윌리 파크를 무려 13타이로 꺽고 우승을 하엿다. 이 스코어는
현재까지도 메이저 최다 타수 차 우승 기록으로 께어지지않고 있다. 톰 모리스는 이어서
1862년에 연이어 우승을 하게 된다. 다시 1863년에 윌리 파크에게 패해서 준우승에 머물
렀다가 1864년도에 다시 우승을 하게 된다. 그리고 1867년도에 다시 우승을 하게 된다.
이때가 톰 모리스이 나이 46세였다고 한다. 1868년도에는 톰 모리스가 아들과 함께 출전하
여 톰 모리스 주니어가 우승을 하고 아버지인 톰 모리스가 준우승을 한다. 톰 모리스는
이때부터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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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톰 모리스>
아버지의 영광을 이은 것은 아들 영 톰 모리스(Young Tom Morris 1851~1875)였다. 영 톰
모리스는 아버지의 마지막 우승 바로 다음 해인 1868년 대회에서 17세의 나이로 우승을
차지했다. 영 톰 모리스는 1868년부터 1870년까지 디 오픈에서 3년 연속 우승을 하며 트로피
벨트를 본인이 소유하게 됐다. 그리고 새로운 트로피가 필요했던 디 오픈은 1872년에 바로
지금의 “클라레 저그”를 만들게 되었다. 1872년 디 오픈을 우승하면서 처음으로 클라레 저그
에 이름을 새긴 선수 역시 영 톰 모리스였다.이후 톰 모리스 주니어는 1870년까지 내리 3연패
를 하였으며 1872년도에 마지막으로 우승을 하게 된다. 톰 모리스 부자가 각 4회씩 8번의
우승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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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파크 시니어>
톰 모리스 부자는 파트너로 함께 플레이하며 다른 프로 골퍼들과 챌린지 매치를 자주 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정받았던 라이벌은 바로 파크 형제였다. 형이었던 윌리 파크 시니어
(1833~1903)가 조금 더 성공적인 커리어를 달성했는데, 파크 형제는 캐디로 골프를 시작
했고 프로가 되기까지 사연이 복잡했다. 윌리 파크 시니어는 클럽 하나로 골프를 배워야
했던 환경 속에서도 뛰어난 드라이버와 퍼터 실력을 키워서 1860년에 처음으로 디 오픈에서
우승했고, 이후 15년 동안 세 번 더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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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 파크 시니어는 가끔 한 발로 서서 샷을 하는 등 관중을 위해 화려한 골프를 보여주고 즐기는
재능이 뛰어났다. 동생 뭉고 파크(1836~1904) 역시 형 못지않은 재능이 있었다. 뭉고 파크
역시 윌리 파크와 같이 어렸을 때 골프를 배웠지만, 20년간 선원으로 일하다가 1870년대에
고향으로 가서 골프를 다시 시작했다. 마흔 살에 가까운 나이에 골프채를 다시 든 뭉고 파크에
대해 누구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뭉고 파크는 1874년에 디 오픈 우승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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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파크 주니어>
골프 가문 파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윌리 파크 시니어의 아들 윌리 파크 주니어
(1864~1925)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골프를 배우며 캐디 일을 했고, 16세에 첫
번째 디 오픈에 참가했다. 그는 결국 1887년, 1889년에 두 번 디 오픈을 우승했다. 파크 가문
에서만 총 7개의 디 오픈 우승을 나누어 가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파크 주니어는 부친이
시작한 클럽 제조회사를 이어받았고, 유럽과 북미를 통틀어 170개의 골프 코스를 디자인하며
코스 설계를 본업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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