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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식탁 위의 중국사〉
(중국의 음식문화에 관한) 이 책의 저자 장징은 중국 사람이지만, 일본에서 활동 중인 학자다. 상해 화둥(華東師範大學)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원에서 비교문화 연구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고쿠가쿠인(國學院)대학 조교수를 거쳐, 2021년 현재까지 메이지(明治)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의 역사만큼이나 장대하고 다양한 음식을 소개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저자는 머리말에서 “중국에는 중화요리가 없다.”고 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기도 한데 “중화요리 하면 기름진 요리를 떠올리겠지만, 단백한 요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중화요리에는 정형화된 틀이 없다. 중국 식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 이것이다. 천변지이(天變地異)로, 왕조 교체, 민족문화의 충돌과 융합, 격심하게 변화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음식 조리법, 식사 예법도 역동적으로 변해왔다.”고 했다.
〇 고대에는 무엇을 먹었을까.
역사와 시대사는 음식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고대에도 지금과 같은 음식을 먹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농경 기술이 발달하고 학문이 번성했던 춘추시대(기원전 770∼403년), 공자가 살던 그 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것을 먹었을까? 『논어』에는 공자가 노나라 대신으로 있을 때 토지 관리를 담당한 제자 원사(原思)에게 900두의 곡물을 주었다고 하고 원사가 이를 사양했다고 한다. 곡물이란 곡식을 말하는 것으로 쌀인지, 밀인지, 보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화폐경제가 성립하기 이전까지 봉록으로 식량을 지불했고, 쌀이 주식이 되면서 쌀이 지불수단이 되기는 했으나, 그전에는 어떤 곡물들을 주었을까?
공자 이전의 춘추시대 인물 『관자』에 “콩과 곡물이 부족하면 백성은 반드시 기아에 허덕인다.”고 하였고, 또 200년쯤 후에 저술된 『묵자』에는 “콩과 곡물이 많아지면 백성은 식량으로 곤란한 일이 없다”라고 했다. 『논어』에도 오곡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엇을 말하는지 확실치 않으나 한(漢)대에 마, 기장, 조(혹은 수수), 보리, 콩을 말하거나 벼, 기장, 조, 보리, 콩이라고 하였으므로, 마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같다. “쌀밥을 먹고 비단옷 입는 것이 너에게는 편안하겠느냐?”고 하는 말이 『논어』에 나오는데, 쌀밥을 고급에 속하는 비단옷과 비교하고 있으니 쌀밥이 고급 음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노나라는 기후조건이 쌀을 대량으로 재배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으므로 벼가 주식이 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쌀밥이 비단옷만큼 귀한 음식이었다면, 공자는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논어』에 공자가 “고상한 음악에 마음을 빼앗겨 고기를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현대 중국에서는 고기하면 돼지고기를 가리키지만, 고대에도 마찬가지였을까? 『예기』에는 공자가 키우던 개가 죽자 사체를 먹지 말고 땅에 묻으라고 했다고 한다. 육조시대에도 중국은 개고기 먹는 것을 금지시키지 않았는데, 공자는 아마 키우던 개에 정이 들어먹지 말라고 한 모양이다. 일상적으로 먹지는 않았더라도 공자가 무슨 고기라고 명시하지 않은 그 고기는 아마도 돼지고기인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생선도 먹었는데, 바다 고기의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고대에도 잡기 어려웠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공자가 정리했다는 『시경』에 ‘잠(潛)’이라는 시에 다양한 생선의 이름이 나온다. 철갑상어를 비롯해 피라미, 쏘가리, 매기, 가물치, 송어, 모래무지, 납자로 등과 자라와 붕어도 보이는데, 이들 담수어는 황하 유역에서 잡히는 것이 많았다. 생선은 서민들이 즐겨 먹은 것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4대 담수어는 민물청어, 초어, 붕어, 잉어인데, 『시경』에는 민물청어와 초어는 보이지 않는다. 둘은 남방에서 나고 거기서만 먹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논어』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러 가지 채소도 먹었다. 콩잎, 미나리, 순나물, 고사리, 고비, 부추, 아욱, 박나물, 순무, 무, 냉이, 씀바귀, 백쑥, 순나물꽃, 질경이, 도꼬마리, 박잎, 쑥갓, 개구리밥 등으로, 일부는 오늘날에도 자주 식탁에 오르는 것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대략 20여 종인데, 절반 이상이 현재는 채소로 취급되지 않는 것들이다. 고비와 고사리는 한국과 일본에서는 친숙하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는 배추, 청경채, 양배추, 시금치 등은 『시경』에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중국은 한국·일본과 달리 육회나 생선회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거의 먹지 않는다. 중화요리에도 날음식은 나오지 않으며, 북경·상해 등 대도시에 일본음식점이 진출하여 생선회가 유행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춘추시대에는 생식이 매우 일반화되었고, 공자도 육류를 생으로 즐겼다고 하고, 『예기』에 회의 양념으로 봄에는 파, 가을에는 겨자를 사용하고 사슴 생고기에는 간장을 사용했다고 했다. 그때는 날것을 먹었는데 지금은 안 먹는 이유가 무엇을까. 철(쇠)이 발명되기 전에는 음식을 가열하려면 손이 많이 갔다. 냄비, 쟁반, 사발 등 도기로 찌거나 졸이기는 쉬웠지만, 도기는 열전도율이 낮아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수렵이나 전쟁처럼 촌각을 다투는 때에 천천히 가열할 여유가 없었다. 날것에다 소금만 뿌리면 그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생식으로, 고대에 생식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던 것이다.
국의 종류도 다양했는데, 고기를 넣어서 끓이는 고깃국이 되고 채소만 넣으면 채소국이 된다. 국은 제후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차이를 넘어 누구나 즐긴 음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돼지고기 국에 봄에는 부추, 가을에는 여뀌를 넣었으며 양고기에는 산초, 다른 고기에는 매실을 넣었다고 『예기』는 기록하고 있다. 데침과 절임이라는 다양한 조리법도 있었는데, 이들 음식 제조법은 모두가 제사와 연결되어 있었다. 일본의 경우 불교 사찰이나 신사에서 제사 지낼 때 해산물을 제외하고 가축의 내장이나 발, 머리 등은 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은 짐승의 머리는 물론 내장과 피까지 올렸다. 재물의 피를 바치는 것은 생기가 담긴 것을 공경하고, 폐·간·심장 등은 생기의 근원이 되는 부분을 공경하기 때문이었다. 한중일 세 나라 모두 제사음식을 버리지 않고 신에게 바친 뒤에 그것을 사람이 먹었는데, 이는 신의 이름을 빌려 미식을 누리려는 의도가 엿보이기는 하지만, 제사음식의 다양한 조리법은 제사 풍습과 연관이 있고, 신에게 바친 음식을 인간도 먹는 관습에는 차이가 없다.
〇 면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한서』에 동중서(董仲舒, 기원전176∼104)가 “성인은 오곡 중 맥과 조를 가장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시했던 작물을 잃으면 서민의 생활에 타격을 주게 되오니 폐하께서는 관리에게 명하여 농민들에게 월동 맥을 재배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맥을 숙맥이라 하였지만, 그것이 대맥(보리)인지, 소맥(밀)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느 것이든 그것을 알곡으로 먹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원전 33년경 밀가루로 만든 병(餠)이 당당하게 음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 차이는 불과 70∼80년밖에 되지 않고, 다른 기록과 비교하면 불과 20∼40년 사이에 압곡을 가루로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다.
1970년대 호남성 장사시에서 마왕추라는 대형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기원전 2세기에 사망한 지방 호족의 묘에서 식량부터 조리를 끝낸 다양한 부장품들이 나왔다. 3호 묘에서 40종이나 되는 벼, 소맥, 기장, 조, 대두, 소두, 마 등이 나왔으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보이지 않았다. 육식품은 소, 말, 양, 돼지, 개, 사슴, 토끼 등이었고, 조류는 닭, 꿩, 오리, 집비둘기, 참새, 기러기, 백조, 학에 이르기까지 수십 종, 어류는 민물고기로 잉어, 붕어, 쏘가리 등이 나왔다.
한(漢)대에 환관(桓寬)이란 사람이 『염철론(鹽鐵論)』이란 책을 썼는데, 옛날에 비하면 현재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를 기술하고 옛날보다 식생활이 풍요로워지고 식습관도 크게 변화했다고 적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성장한 가축만 먹었지만, 부드러운 음식을 추구해 어린 양, 어린 돼지, 어린 새도 먹었다고 하고 기호도 매우 다양하다고 했다. 또 옛날 사람들은 동식물의 성장주기를 배려했지만, 지금은 이를 무시하고 번식기 거위를 잡아먹으며 가을에 미성숙한 영계를 먹는다고도 했다. 이 무렵에는 외식업이 시작되었는데, “옛날(주나라) 사람들은 시장에서 조리한 음식을 팔지도 않고 사서 먹지도 않았다. 가축을 도살하여 팔거나 술과 말린 고기, 생선, 소금 등을 팔았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리한 음식을 파는 가게와 노점이 늘어서 있고, 고기도 많이 진열해 놓았다. 사람들은 일은 게을리하면서 먹는 것에는 항상 제철의 맛을 요구한다.”고 적기도 했다.
교자(餃子)는 만두와 헷갈린다. 교자는 물교자, 찐교자, 군교자가 있다. 중국에도 만두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진빵과 더 비슷하다. 교자는 대부분 반달 모양을 떠올리는데, 농촌에는 춘권처럼 원통형도 있고, 같은 반달 모양이라도 주름을 잡은 것과 주름을 잡지 않은 것이 있다. 북방에서는 주름을, 남방에서는 주름을 잡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교자는 대부분 밀가루를 피로 사용한다. 물 혹은 식염수를 밀가루와 혼합한 후 반죽하여 만들며, 타피오카 전분을 사용하면 피가 반투명해져 한눈에도 소맥분 교자와는 구분된다. 피가 잘 찢어져 굽기가 어려우므로 찌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재료 구하기도 어렵고 손이 많이 가 일반 가정에서는 잘 만들지 않는다.
교자는 언제 생겼을까? 답이 없는지 모른다. 교자 같은 음식은 하룻밤 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서서히 발전해 왔다. 중국 최고의 교자는 1986년 9월 위구르 자치구인 트루판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8개가 사발에 담긴 채로 발견되었다. 길이 5.7㎝, 폭 2.4㎝로 상당히 컸다. 같은 고분에서 ‘고창연화(高昌延和) 12년(613년)’이라는 연호가 나왔으므로, 수말당초의 고분임이 확인되었다.
빵 표면에 참깨를 뿌려 굽은 것을 지마소병 혹은 호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널리 퍼진 것은 후한 말, 삼국시대 초로 왕찬(王粲)이 저술한 『영웅기』에는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승소성이란 마을에 이르렀을 때 마을 유지 이숙절과 그의 동생이 소를 잡고, 만 장이나 되는 호병을 구워 술잔을 높이 들어 환대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또 『진서』에는 왕장문이란 자가 학문이 매우 뛰어나 그를 행정관으로 임명했지만, 임관을 거부하고 고향을 떠나 성도에 몸을 숨겼는데, 어느 날 저잣거리에서 호병을 먹다 발각되었다고 하였는데, 촉의 수도였던 성도는 낙양에서 상당히 멀었음에도 이미 호병이 전해졌다는 것이 된다.
당대에는 호병이 더욱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일상 음식이 되었는데, 755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듬해에 현종은 촉으로 피난을 갔다. 함양 집현궁에 이르렀지만, 점심때가 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양귀비의 재종 오라비 양국총(楊國忠)이 직접 호병을 사와 현종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는 호병을 어디서든 살 수 있는 음식이었다는 증거다.
중국의 북방은 밀가루 남방은 쌀이 주식이다. 밀이 처음 재배된 곳은 지금의 이란 초승달 지역으로 언제 중원에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앞서 보았듯이 후한 때 먹기 시작해 삼국시대에는 북방지역에 정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알곡인 입식이 아니라 분식이 주식이 되려면 빵이나 만두처럼 발효가 전제되어야 한다. 만두의 기원을 삼국시대 제갈량이 맹획을 치러갈 때 누군가 사람 머리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자, 밀가루 반죽으로 사람 머리를 만들어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 위·촉·오 삼국을 통일하고 세운 진(晉)의 재상 하중은 사치를 좋아해 옷과 수레가 호화의 극치에다가 미식가였다고 하는데, ‘증병(진빵)’은 부풀어 표면이 십자로 갈라지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발효시키지 않은 밀가루는 굽든 찌든 부풀어 오르지 않는다. 하중이 먹은 증병은 효모군을 넣어 발효시킨 빵이었던 것이다. 그는 278년에 사망했으므로 이때 이미 발효 기술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생선구이가 일상적인 요리다. 그러나 현대 중국은 대부분 생선구이를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식점의 메뉴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고대 중국은 달랐다. 동위(東魏, 534∼550년)시대에 저술된 『제민요술』에 의하면 생선 통구이, 꼬치구이, 토막구이 뿐 아니라 오리고기를 생선 배 안에 넣어 굽는 등 복잡한 조리법도 있었다. 꼬치구이도 마찬가지로 중국의 음식점에는 꼬치구이라는 메뉴가 없다. 양고기 꼬치구이는 훌륭한 중화요리였지만, 지금은 신강 위구르족의 요리가 되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이민족의 요리를 받아들였으면서 원래 있던 조리법이 자취를 감춘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〇〈식탁 위의 중국사〉이 책은 중국 역사를 소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래서 장마다 시대구분을 소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복습 삼아 돌아보면, 춘추전국시대 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 한대 기원전 206년∼기원후 220년, 위진남북조시대 221년∼589년, 수당시대 581년∼618년(618∼907년), 송대 960년∼1279년, 원대 1271년∼1368년, 명대 1368년∼1644년, 청대 1636년∼1912년으로 구분된다. 다시 음식으로 돌아가면 제4장은 ‘개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이다.
고대 중국인은 개고기를 먹었다. 3장에 소개한 『제민요술』에 “개고기 30편(1편은 약440그램)에 밀 6되, 탁주 6되를 넣고 끓여 국물을 따르고 버리기를 세 번 반복한다. 다시 밀과 탁주를 3되씩 넣고 끓여 고기와 뼈가 분리되면 찢어 놓는다. 달걀 30개를 고기에 고루 섞어 달걀이 마르면 도기 시루에 쪄서 익힌다. 돌로 눌러 하룻밤이 지나면 꺼내 먹을 수 있다”라고 했는데, 조리법을 자세히 소개한 데 비해 무슨 요리인지, 맛이 어떤지는 밝히지 않았다. 신석기 시대부터 인간은 개를 가축으로 길렀다. 물론 가축이라고 모두 식용으로 쓰였다는 것은 아니다.
내몽골, 화북, 화남 등 신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가축 뼈의 빈도를 비교하면, 돼지 뼈가 73개소로 가장 많고, 양이 59개소, 소가 57개소, 개가 50개소로 개가 4위를 차지했다. 개는 양과 소처럼 방목방식으로 대량 사육하기는 적합하지 않다. 그런데도 넓은 지역에서 다수의 개 뼈가 출토된 것은 역시 고기로 소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기』에는 황제의 복식과 음식을 규정하고 있는데 “천자는 백의를 입고, 백옥을 두르고 마 열매와 개고기를 먹는다. 식기는 각형(角形)으로 깊게 만든 것을 쓴다”는 기록이 있다. 개고기는 군주의 의례 음식으로 바쳐졌음을 알 수가 있다. 심지어 조상의 제사상에도 개고기는 빠지지 않았으며, 궁중에서는 개를 관리하는 견인(犬人)이라는 관리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오월동주, 와신상담 등으로 널리 알려진 월왕 구천은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어떻게 하면 내정에 힘을 쏟고 복지를 충실히 하고 백성의 충성을 끌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백성이 자녀를 많이 낳도록 하는 정책을 펼쳤다. 아들을 낳으면 술 두 독과 개 한 마리, 딸을 낳으면 술 두 독과 돼지 한 마리를 하사했다. 이는 당시에 딸보다 아들을 중시했던 것을 고려하면 개를 돼지보다 귀히 여겼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정책을 지금은 쓰면 안 될까. 몰라.
유목민이 중원을 지배하자 그들은 개를 먹지 않았다. 낙타와 호랑이, 오소리까지 식자재로 소개하기도 했지만, 개는 약으로 소개할 뿐 요리로 다루지는 않았다. 심지어 개고기는 어느 정도 약효가 있지만, 먹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원대의 저술인 『음식수지』라는 책에는 개고기가 얼마나 몸에 나쁜지 지적한 뒤에 “개는 똑똑한데다 집을 지킨다. 먹어서 좋을 게 전혀 없는데 굳이 먹을 필요가 있을까?”라고 했다. 이 책의 저자 가명은 절강성에서 태어나 원대에 관리를 역임하기도 했는데, 개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남쪽으로도 퍼졌음을 보여준다.
유목민의 뿌리인 원나라는 개를 숭상하거나 아꼈기 때문에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명대는 어땠을까. 개를 먹는 풍습이 있던 광동에서도 개는 천한 사람만 먹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광동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는 돼지고기였다. 이것은 청대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청대에는 많은 요리서가 쓰였는데, 여기에 개고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돼지와 양에 대해 말했으니 소와 개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동물은 세상에 이로운 동물이다. 먹지 말라는데 굳이 먹으려는 이들을 보니 참을 길이 없다. 이 두 동물을 생략하고 가금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몇 해 전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 아무튼 중국에서는 청대 이후로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천한 사람과 병 든 사람이 약으로 먹는 음식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것을 먹는 것은 파렴치하다고까지 했다. 북방 민족의 남하가 이처럼 문화 반응을 초래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전래 된 것으로 알려진 호두가 중국에서는 한대 장건이 페르시아에서 씨앗을 가져왔다고 『한서』가 전한다. 서역에서 전래된 열매로는 호두 외에도 아몬드가 있다. 아몬드에 대해 “페르시아에서 난다. 거기서는 파담이라고 부른다. 나무의 높이는 5∼6장(1장은 3,3m), 둘레는 4∼5척이다. 잎은 복숭아와 비슷하며 넓고 크다. 형태는 평평하다. 그래서 편도(扁桃)라고도 하는데, 과육은 쓰고 떫어 먹을 수 없지만, 핵 안의 인은 달다. 서역 제국은 모두 이것을 귀히 여긴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아몬드는 호두와 달리 널리 퍼지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요리나 과자의 재료로 확고한 위치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은 유별나게 돼지고기를 좋아해 황주(호북성 황강현)에는 소동파의 호를 딴 동파육이란 게 있다. 그는 여기서 돼지고기 예찬 시를 쓰기도 했는데 “황주의 맛 좋은 돼지고기, 값은 진흙처럼 싸지만, 부자는 거들떠보지 않고 가난한 이는 어찌 요리할지 모르네. 돼지고기에 물을 조금 넣고 약한 불로 푹 졸이면 그 맛 비할 데 없어 아침마다 배불리 먹네. 그 누가 어찌 이 맛을 알리오.”진흙처럼 싸고, 부자들은 입에 대지 않았다는데 사실일까? 같은 송대의 주희가 지은 『청파잡지』에 그 답이 있다. “이 지방에서 고양이 사료로 돼지고기 창자를 팔았다. 돼지고기는 천한 음식이었고, 최고급 육류는 양고기였다.”돼지고기는 질이 낮다고 여긴 것이다. 대신 양고기는 사랑받았다.
1114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를 정벌하고, 이듬해 정식으로 국호를 대금(大金)이라고 칭했다. 이로써 북방 여진족이 정권을 잡았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던 거란족과 달리 여진족은 양고기와 돼지고기 모두를 먹었다. 여진족의 선조는 숙신과 말갈인데 『진서』와 『구당서』에 보면 숙신은 “소와 양은 없고 멧돼지를 많이 키운다”는 기록이 있다. 요가 망하고 금이 들어서면서 이제 거란족은 한족처럼 생활하기 시작했다. 양고기를 먹기 시작했으며, 황하로 내려오면서 양고기만 먹게 되었다. 양고기 요리에 양의 혀를 삶아 얇게 썬 것도 있고, 양고기 요리는 남송에도 믿기 어려울 만큼 강한 영향력을 주었다.
사소한 일 같지만, 한국과 일본은 젓가락을 가로로 놓는데 비해 중국은 세로로 놓는다. 왜 그럴까? 세 나라 모두 고대로부터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사절이나 신료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자주 열었다. 기마민족인 이민족 정권도 중국 대륙을 통치하게 되면서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연회관습을 이어받았다. 궁궐에서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젓가락을 세로로 놓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육식을 주로 했으므로 식사 때는 당연히 칼을 사용했을 것이고, 칼끝이 자신의 몸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도록 했던 것에서 유래했다.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서양의 식사를 봐도 마찬가지다.
중국 삼국시대 벽화를 보면 돗자리를 깔고 그냥 바닥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언제부터 탁자와 의자를 사용한 것일까? 의자 역시 서역에서 전해진 것으로 호상(胡床)이라고 부른 이들 식탁과 의자는 송원(宋元)대 이후에 민간에도 보급되면서, 젓가락은 가로놓기에서 세로놓기로 변했다. 반면에 한국과 일본은 아직도 가로놓기를 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밥과 반찬 모두 젓가락만을 사용해 먹는다. 일본은 볶음밥이나 카레라이스는 숟가락으로 먹지만, 중국은 볶음밥도 젓가락으로 먹는다. 완탕이나 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다. 밥을 숟가락으로 먹던 당나라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지금도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편리 때문일까 고대의 자취일까? 저자는 후자라고 말한다.
고대에도 지금의 냉면 같은 긴 면을 먹었다는 자료는 없다. 고분이나 벽화에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면을 만들려면 간수나 소금이 필수적이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면은 한대보다 훨씬 후대의 일이다. 면은 한자로 납면(拉麵), 즉 잡아당긴다는 의미다. 하지만 물로만 반죽해서는 잡아당길 수 없다. 남북조 시대에도 면에 간수를 첨가하는 방법을 몰랐다. 이때의 면은 지금의 면과는 상당히 달랐다. 당시 탕병은 가늘고 긴 모양이 아니었다.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 맥승(麥繩)이라는 새끼줄 모양의 밀가루 식품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의 꽈베기 같지만 명확하지 않다. 길고 가는 오늘날과 같은 면 모양을 만들려면 자르든지, 늘리든지, 잡아당기든지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것은 원대에 들어서야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긴 면은 그렇다 치고 생일에 면(탕병湯餠-빵)을 먹는 풍습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신당서』에 당현종이 양귀비에 빠지게 되면서 총애를 잃은 황후 왕씨가 어느 날 현종에게 읍소했다. “폐하께서는 아충이 자주색 반비(半臂, 상의 맨 뒤에 입는 소매가 없거나 아주 짧은 겉옷)를 벗어 판돈으로 밀가루를 사서 폐하의 탄신일에 탕병을 만들어 올린 일을 잊으셨나이까?”아충은 황후의 부친으로, 현종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른 것이다. 탕병이 가늘고 긴 형태인지, 둥근 형태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자주색 반비는 금기색이라 할 만큼 고귀한 색으로 일반 백성은 사용할 수 없는 귀한 옷이었다.
북경에서 원나라 칸을 접견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칸이 주최한 향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칸의 식탁은 일반인의 식탁에 비해 훨씬 높게 만들어졌다. 그는 북쪽에 자리해 남쪽을 향한다. 칸의 옆 좌측에는 제1황후가 앉고, 우측 한 단 낮게 만들어진 곳에 참석자의 머리가 칸의 발아래에 해당하는 평면에 황태자, 황손, 황족, 제왕이 나란히 앉는다.(중략) 이하 중신들은 다시 한 칸 내려간 식탁에 앉는다. 향연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식탁에 앉는 것은 아니다. 무신이나 고관은 대부분 큰방 융단 위에 앉아 식사하므로 특정 식탁을 내어주지 않는다. 식탁이 이처럼 배열되어 있으므로, 칸은 앉은 자리에서 배석자를 훑어볼 수 있다. 배석자의 수는 엄청나게 많아서 큰 방 외에 또 4만 명 이상이 함께 식사한다.”
처음에 언급되었지만, 춘권이라는 음식이 있는데, 이름도 처음 듣지만 먹어보지도 못한 것이다. 원대 권전병(捲煎餠)이라는 음식이 있었다. 이것이 춘권과 같은 음식이다. “물로 반죽한 밀가루를 얇게 펴서 전병을 만든다. 그 위에 호두, 잣, 복숭아씨, 개암 열매, 연밥, 건시, 연근, 은행, 파람(芭攬)을 잘게 썬 것과 익힌 밤을 납작하게 썬 것을 꿀과 설탕으로 버무리고 다진 양고기와 파, 소금을 더해 소를 만든다. 이 소를 전병에 싸서 기름에 노릇노릇하게 튀긴다.”하지만 이것은 견과류나 말린 과일류를 사용한 월병에 가깝다. 아마 맛은 달달하면서 짭짤할 것 같은데, 단맛이 더 강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또 짠맛이 강하다고 하니까 지금 것보다 더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는 제비집 요리와 상어지느러미 요리가 있다. 상어지느러미는 가장 넓은 부분이 폭 5∼6㎝로 이 부분을 찜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자투리로 스프를 만드는데 사용한다. 스프는 질도 떨어지지만, 이를 먹어보고 상어지느러미 요리를 먹었다고 할 수는 없다. 상어지느러미 요리는 올려잡아도 400년을 넘지 못한다. 진시황이나 원나라 칸은 먹어보지 못했다. 1596년 저술된 『본초강목』에는 “옛날에는 교어(鮫魚)라고 불렀고 지금은 시어라고 부른다. 종류가 많으며 동남 연해에서 난다. 전부 물고기와 닮았고 파란 눈에 붉은 빰, 등에 딱딱한 지느러미가 있다. 배 아래에도 지느러미가 있는데, 맛이 대단히 좋다”라고 상어지느러미를 소개했다.
그런데 청대 소설 『홍류몽』에 제비집 요리를 포함해 40여 종이 나오지만, 상어지느러미 요리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다. 왜 그럴까. 만주족의 식습관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청나라 강희제는 사치를 멀리하여 하루 두 끼밖에 먹지 않았다. 대신으로부터 가뭄으로 인한 기근 상황을 보고 받고는 “너희 한인들은 하루에 세 끼를 먹고 거기에 술까지 마신다. 짐은 초원에서 싸울 때 하루 한 끼밖에 먹지 않았다. 지금도 한 끼는 일품으로 족하다”라며 대신을 나무랐다고 한다. 원래 만주족은 동북 내륙에서 살아 해산물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홍류몽』의 주인공들이 상어지느러미를 먹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해산물을 싫어한 때문일 것이다.
마라탕을 비롯한 사천요리의 대부분은 맴기로 소문난 음식이다. 처음부터 사천요리는 매움의 상징이었는지 모른다. 매움의 원조는 고추다. 고추는 우리도 그렇지만 중국도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멕시코와 아마존이 원산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명대 이서진의 저술인 『본초강목』에는 고추가 나오지 않는다. 중국요리에 고추가 사용된 것은 겨우 300년 남짓이다. 그렇다고 고추가 들어오기 전에 매운 맛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청대에 랄탕사(辣湯絲)라는 요리가 있었는데, 죽순을 채 썰어 만든 스프로 랄이 맴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도 고추는 사용하지 않았다. 겨자를 사용했을 뿐이다.
북경을 여행하면 반드시 들른 코스가 있었다. 진취덕이라는 음식점이 었는데,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만큼 번성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런지 쇄락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한국 관광객이 줄어든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저자는 “대신 신흥음식점인 대동고압점이 인기다. 이 음식점은 북경요리의 지방을 제거하고 담백하게 요리해서 판다. 부드러운 육질과 바싹한 껍질의 풍미에 심혈을 기울여 예전에 없던 식감을 낸다. 또 내부 인테리어도 과감하게 현대풍으로 바꿨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지금은 연일 만원사례로 대성황을 이룬다.”
진취덕이 옛 맛을 고수해서 오히려 손님의 발길이 끊겼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음식점은 소비자에게 외면당할 것이다. 가난한 시절에는 지방이 많은 요리가 최고였지만, 지금은 건강의 적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 오래라고 예외가 아니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마지막으로 ‘중화요리는 없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볼 차례다. 중국은 지역 사이 편차가 너무 커서 항상 생활하는 지역 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중국인은 보통 사천요리, 광동요리, 산동요리, 상해요리, 북경요리라고 말하지 중화요리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지역에 따라 떠올리는 요기가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화요리는 없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