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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현의 내 인생의 책] ⑤ 애도일기 | 롤랑 바르트
ㆍ아픔의 리듬을 반복하다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롤랑 바르트가 1978년 7월18일 일기에 적은 글이다. <애도일기>는 바르트가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에게 보내는 비가(悲歌)이다.
어머니가 사망한 다음날부터 적어내려 간 이 일기는 수년간 계속되었다. 바르트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파인 고랑을 굳이 메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슬퍼한다. 바르트의 애도는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슬픔을 슬픔이라고 부르고,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 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 봐 두렵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바르트는 이렇게 쓴다.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처럼 문학은 어쩌면 상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건지도 모른다.
몇 편의 소설을 쓰면서 누군가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죽음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냐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같은 이야기를 리듬을 변주하여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소설을 쓰다 보면 그 안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간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의 빈 공간을 어떻게든 채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일상성을 회복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슬픈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동시에, 누군가를 떠나보냈거나, 떠나보내는 중이거나,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해서 별것도 아닌 이 사실이 나는 아주 쓸쓸하고 서글프다. 그래서 자꾸만 당연하고 시시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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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1915~1980)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사상가이며 비평가. 20세기 후반 가장 탁월한 프랑스의 지성으로 꼽힌다. 1915년 프랑스 북부 셰르부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전쟁으로 해군장교인 아버지를 잃고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1953년에 [글쓰기의 영도], 1957년에 [신화론을 발표하면서 프랑스 지성계에 이름을 알렸고 [텍스트의 즐거움으로 반향을 일으키며 구조주의자로서 이름을 확고히 다졌다. 기호학, 신화학, 문학, 분류학 패션, 글쓰기, 사진, 독서론 등을 아우르는 전방위적 글쓰기를 했고, 1977년 출간한 사랑의 단상!으로 대중적 인기도 함께 얻었다. 1980년 2월, 교통사고를 당한 뒤 4주 후에 사망했다.
프랑스가 사랑한 현대 사상가 롤랑 바르트 그가 어머니를 잃은 이후 2년간 써내려간 지독하리만치 집요한 상실의 슬픔
1977년 10월 25일에 바르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977년 10월 26일부터 시작되는 바르트의 일기는 1979년 9월 15일에 끝난다.
(주요 문장 발췌)
결혼의 첫날 밤 그러나 애도의 첫날밤인가? 1977. 10. 26.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말은 영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 스스로도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으니까. - 21쪽 / 19771027
이틀 만에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 아무런 거부감 없이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다. - 22쪽 / 19771027
이상한 일이다. 그녀의 목소리,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목소리, 기억을 불러들이는 그녀만의 씨앗 ('그 사랑스러운 울림∙...)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나는 더는 듣지 못한다. 마치 청각 어딘가 마비된 것처럼...... - 24쪽 19771029
몹시 당황스러운, 그러나 조금 위안을 가져다주는 생각. 그녀가 나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 만일 그랬다면, 나는 아무런 글도 쓰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녀를 돌본 지난 6개월 동안에는 정말 그녀가 나의 '모든 것'이었다. 내가 글을 써왔다는 사실을 나는 완전히 잊어버렸었다. -26쪽 / 19771029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니까 그녀가 아프던 동안, 내가 간절히 바라던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이제 성취될 수가 없다. 만일 지금 그것들이 성취된다면, 그녀의 죽음은, 이 욕구들을 실현시켜 주는 만족스러운 일이 되고 마니까.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나를 바꾸어버렸다. 내가 욕망하던 것을 나는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다. 남은 건,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어떤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죽은 뒤의 욕망이. -28 쪽 / 19771029
애도의 한도에 대하여.
(라루스 백과사전, 메멘토): 아버지 혹은 어머니 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18개월이 넘으면 안 된다 - 29쪽 / 19771029
나는 이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 봐 두렵기 때문에. 혹은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 33쪽 / 19771031
나의 어떤 부분은 절망으로 잠들 줄 모른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나의 또 다른 부분은 생각을 하면서 끊임없이 하잘것없는 일들을 정리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건 병이라는 느낌. - 35쪽 / 19771031
아주 자주 나를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것: 딱딱하게 굳어버린 슬픔 - 경화증에 걸린 것처럼
[경화증에 걸린 슬픔은 깊이가 없어진 슬픔이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표면만이 있는 슬픔 -아니,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단단하게 둘러싸서 덮고 있는 각질층들: 그런 각질층들의 커다란 덩어리들] - 38 쪽 / 19771101
나는 지금 밑바닥까지 절망에 빠져서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울적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자주 더는 그렇게 견딜 수가 없어서 그만 '허물어지고' 만다. - 39쪽 / 19771101
내 슬픔은 삶을 새로 꾸미지 못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내 슬픔은 사랑의 끈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사랑의 단어들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아주 자명해진 내 슬픔의 이유...... -49쪽 / 197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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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처럼 안개가 짙은 일요일 아침. 혼자다.한 주 한 주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걸 느낀다. 그러니까 이제 나는 그녀 없이 흘러가게 될 긴 날들의 행렬 앞에서 있는 것이다. 1977.11.6
허우적거리면서 나는 겨우겨우 슬픔을 건너가는 길을 찾아나가고 있다 이 순수한 슬픔, 외롭다거나 삶을 새로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파인 고랑 모든 것들이 줄어든다. 글 쓰는 일도, 말하는 일도. 그 러나 이것만은 제외하고(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것).1977.11.9.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용기'를 가지라고. 하지만 용기를 가져야 했던 시간은 다른 때였다. 그녀가 아프던 때, 간호하면서 그녀의 고통과 슬픔들을 보아 맛했던 때, 내 눈물을 감추어야 했던 때. 매 순간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굴을 꾸며야 했던 때. 그때 나는 용기가 있었다 -지금 용기는 내게 다른 걸 의미한다: 살고자 하는 의지. 그런데 그러자면 너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 51쪽 / 19771110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스스로를 거부하고 있다. 나의 근심 걱정의 이유를 어머니의 부재 상태에서 찾으려는 일을. - 58쪽 / 19771114
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내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 - 60쪽 / 19771115
파리에서 튀니지까지 여행. 계속되는 비행기들의 정체. 라마단의 마지막 축제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 오는 튀니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항들에서 한없이 기다리기. 그런데 왜 그런 교통 정체의 날들은 슬픔에 잘 어울리는 걸까? - 68쪽 / 19771119
내가 놀라면서 발견하는 것 - 그러니까 나의 걱정 근심(나의 불쾌함)은 결핍이 아니라 상처 때문 이라는 사실. 나의 슬픔은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나는 모자라는 게 없다, 내 생활은 전처럼 아무 문제가 없다), 그 무엇이 상처받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 상처는 사랑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처라는 것. -75쪽 / 19771124
그 누구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까(그것도 대 답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품으면서)?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7-78쪽 / 19771128
그녀는 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은 채로 살아 있다. 이 사실은 무얼 말하 는 걸까 그런 내가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 미친 것처 럼 정신이 다 나가버릴 정도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의 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건 그 불안으로부터 한 발짝도 비켜날 수 없는 건 바 로그 때문이리라.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p.31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p111)
나는 독백 속에서 AC에게 나의 슬픔에 대하여 설명한다. 나의 슬픔이 얼마나 혼돈스러운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하여. 그래서 나의 슬픔이 흔히 말해지는,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그런 슬픔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정신분석학적인 슬픔은 결국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변증법적으로 느슨해지고, 조금씩 사라지면서, 마침내 '화해에 이른다.' 하지만 나의 슬픔은 그렇게 즉시 정화되지 않는다. 나의 슬픔은, 그와는 반대로, 물러가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AC는 대답한다: 슬픔은 원해 그런 거라고(그러면서 그는 앞의 주체, 수렴 의 주체가 된다) -나는 그 주체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나의 슬픔이 수렴되는 것, 일반화되는 것(키르케고르)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그건 마치 사람들의 나의 슬픔을 훔쳐 가버리는 것 같아서다. -81쪽/ 19771129
비타 노바Vita nova는 래디컬한 몸짓이다(어떤 단절을 수행하기 - 지금까지 살아왔던 길을 끝내기, 그 필연성)
내게 가능한 길은 둘이다. 그러나 서로 반대되는 두길:
1. 자유로워지기, 단단해지기, 진실을 따라서 살기 (과거의 나를 뒤집기)
2. 순응하기, 편안함을 사랑하기 (과거의 나를 더 강화하기) -84쪽 / 19771130
애도 :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 그 어떤 방어수단도 없는상황. - 91쪽 / 19771209
애도: 애도의 슬픔은 변하지 않는 슬픔, 특발적인 슬픔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안다. 이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슬픔은 지속적으로 머무는 슬픔이 아니기 때문에. - 105쪽 / 19780218
느낌의 예민함(점차 약해지는)과 슬픔 혹은 근심(들 그 자리에 있는) 사이에는 (끔찍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 114쪽 /19780323
절망: 이 단어는 너무 연극적이다. 언어의 영역 안 에있다.
돌멩이 하나. -121쪽 / 19780403
기록을 하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이렇게 기록을 하는 건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다. 아무 것도 자기를 이겨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 고통을. 돌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그 어디에 도, 그 누구에게도 없는 그런 것.
'기념비의 필요성 Memento illam vixisse. - 123쪽 / 19780412일경
여기서,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그 모든 시스템은 무너지고 없다. 그런데 그렇게 '집 밖에서', '그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족한 상태(?) 속에, 가벼운 마음의 상태 속에 있으면, 오히려 나는 더 많이 괴로워한다는 역설적인 사실: '여기서 너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어 있다.' 그런데 그럴수록 나는 더 많은 것을 잊을 수가 없다. - 127쪽 / 19780427
애도(지금 내가 겪고 있는 애도)의 슬픔은 래디컬하게 그러니까 새로운 방식으로 죽음을 길들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의식이 예전에는 그저 남에게서 빌려온 (졸렬한, 다른 사람들에게서 철학에서 얻어낸) 것이었다면, 지금 그것은 나자 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고통스러운 건 죽음의 의식 때문이 아니다. 그건 나의 애도 때문이다. - 129쪽 / 19780501
(마침내 글을 쓸수 있게 되는 날이 임박하다)
이제 끝이다! 심지어 나의 우울에게마저도 생명을 불어넣는 글쓰기, 그 글쓰기를 중단케 했던 곤비하고 길고 지루한 일들은 이제 끝이다, 마침내 -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나의 우울로부터, '사유'로부터 격리당하기)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에 [관한] 사색으로 나는 한껏 팔을 벌었다. - 131쪽 / 19780508
며칠 동안 밤마다 악몽들. 마망이 병들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미지들. 경악 지금 나는 내게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달린다. 참고할 것. 위니코트:무너짐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이 무너짐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났던 것이다. 1978.5.10.
마망의 죽음: 어쩌면 살아오면서 내가 처음으로 노이로제 없이 받아들였던 단 하나의 사건. 나의 애도는 히스테리적이 아니었고, 그래서 다른 이들은 나의 슬픔을 거의 알 수가 없었다(나의 슬픔을 연 극적으로 '마음껏 드러내 보이는 일'이 내게는 역겨 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더 히스테리를 부리는 일이, 나의 우울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 세상을 거부하면서 사교적인 관계들을 모두 끊 어버리는 일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러면 분명히 조금은 덜 불행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제 나는 안다, 노이로제를 안 갖는 일이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옳은 일이 아니라는 걸. - 138쪽 / 19780518
마망이 살아 있던 동안 내내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 동안 내내) 나는 그녀를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그게 나의 노이로제였다. 그런데 지금 (애도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 바로 이 사실인데) 나의 애도는 말하자면 노이로제가 아닌 단 하나 나의 부분이다: 이건 어쩌면 마망이 떠나가면서, 마지막 선물처럼, 나의 가장 나쁜 부분 나의 노이로제를 함께 가져가버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139쪽 / 19780525
오늘 아침에 생-쉴피스 교회를 지나다가 소박하 게 지어진 낮고 편편한 건축에 끌린다; 교회 건축 물 안에 머문다는 것 -나는 잠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건 일종의 본능적인 '기도'다.: 마망의 사진 에 관한 책이 부디 잘 끝나주기를 기도한다. 그러다가 깨닫는다. 늘 나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원하면서, 유아적인 욕망 때문에 미리부터 스스로 제 속을 썩인다는 걸. 앞으로 그 어느 알에는 이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아무것도 애쓰며 구하지 않는 날이 있을까...... 니체: 기도하지 말 것. 자기에게로 침잠할 것.
애도의 슬픔이 나를 데려가서 만나게 하려는 것. 그것이 이 깨어남이 아닐까? - 147쪽 / 19780609
내 경우 애도의 슬픔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그 어떤 진행의 과정도 거기에는 없다: 때문에 너무 이른 애도의 슬픔 같은 것도 없다(예컨대 위르트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파리의 집을 정리했었다: 이 일들 두고도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했으리라: 너무 이르군요). - 159쪽 / 19780616
프루스트, <생트-뵈브를 반박하면서>. 146쪽 프루스트가 어머니에 대해서 쓴 이런 문장: "어머니의 얼굴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표정... 기독 교적인 부드러움과 장세니스트적인(청교도적인) 담대 함이 함께 담겨있는 표정...1978.8.10
그녀가 병을 앓았고, 돌아가셨고, 지금은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방 한 곳의 벽에, 그러니까 침대의 머리 쪽이 기대어 있는 벽 위에, 나는 성화 한 장을 걸어 놓았다(물론 그건 경건한 신앙심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그 벽 아래 탁자 위에 늘 꽃들을 꽂아놓는다. 이제 나는 여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늘 여기에 머물 것이다. 이 꽃들이 시들고 마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1978. 8.18.
슬프기만 한 수많은 아침들 1979.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