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순웅 목사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은 작년 5월이다. 아내이자 조각가인 정혜레나 사모가 감리교신학대학교 100주년기념관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 동행했던 것. 16년째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사는 농군이지만 얼굴은 학자같다. 강원도 홍천 동면교회에서 박순웅 목사를 만났다. 농촌 목회의 기본은 ‘농사’라고 말하는 박 목사. 홍천터미널에서 만난 박순웅 목사는 농사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침나절 감자밭 잡초를 뽑았노라고 했다. 땀에 쩔은 옷가지와 흙 묻은 손발이 그 고단함을 대신 말해주었다. 박 목사는 농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농부인 지역 주민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고학력 목회자 사절이요
농촌 목회에 대한 비전을 품은 박순웅 목사는 3년간 강원도 주천의 도천교회에서 목회했다. 1994년 1월 강원도 홍천군 동면에 위치한 동면교회로 왔다. 부임할 당시 교인들의 반대가 심했다. ‘고학력자’라는 이유에서였다. 동면교회는 50년이 넘은 교회지만 2~3년에 한 번씩 목회자가 바뀌고, ‘박사’학위 가진 목회자들은 목회보다는 공부하느라, 강의하러 다니느라고 바빴다. 그러는 사이 교인들의 마음 문도 점점 닫히고 있었다. 연세대 연합신학원을 졸업한 박순웅 목사와 서울대 출신의 조각가 정혜레나 사모의 조합은 교인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부임 후 1년간은 무척 힘들었다. 지은 지 4년 된 예배당에서는 비가 새고, 수리비로 충당할 재정도 없었다. 교인들은 농사일로 바빴다. 예배를 줄였다. 새벽기도, 금요 철야 예배를 없애는 대신 한 번이라도 정성껏 예배드리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박순웅 목사도 농사를 짓겠다고 말했다. 권사 한 분이 1,500평 하천부지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세금만 대신 내는 조건이었다.
|
◇ 십자가와 촛대는 정혜레나 사모의 작품이다. | 첫해에는 옥수수와 감자를 심었다. 목돈 400만 원이 들어왔다. 예배당을 수리하고 소년소녀 가장, 백혈병 환우 등을 도왔다. 어떤 이는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을 돕는다고 나서기는”하면서 비웃기도 했다. 사실 재정 형편도 열악한 시골 교회에서 아이 넷 딸린 목사가 본봉 60만 원 받는 처지에 남을 돕는다고 나서는 게 좀 우습기도 했을 터였다. 그러나 박순웅 목사는 지치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매년 적게는 400만 원에서 많게는 700만 원까지 수입을 올렸다. 그 수입으로 폐차 직전의 교회차를 대신할 중고차를 사는 데 쓰기도 하고, 탈북 어린이를 돕는 데 100만 원씩 200만 원을 기탁하기도 했다. 화재나 수해를 당한 마을 주민도 도왔다. 해가 바뀔 때마다 이제 떠날까, 저제 떠날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교인들이었지만 10년을 넘기자 박 목사를 마을 주민이자 농군으로 인정했다. 여느 마을 주민처럼 흙범벅이 된 모습, 비가 많이 오면 작물이 잘 영글지 않을 까봐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서서히 동질감을 느껴갔다. 그 동질감은 교회 안정과 맞물려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30여 명이었지만 17년이 흐른 지금은 50여 명으로 부흥(?)했다.
아버지만한 목회자 되기도 힘들어 박 목사의 아버지 박상수 목사도 충남 아산의 시골 교회를 섬겼다. 박 목사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어르신 한 분이 머리에 쌀을 이고 사택을 찾았다. “목사님! 별것 아니지만 맛있게 드세요.” 어린시절 박 목사는 그런 모습이 싫었다. 맨날 얻어 먹기만 하니 창피한 생각이 들었던 것. 아버지께 소리쳤다. “제가 목회를 하면 아버지처럼 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그러나 박 목사가 농촌에 눌러 살게 된 것도 양식을 나르는 어르신의 손길과 무관하지 않다. 처음으로 농촌 목회를 시작한 도천교회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젊은 목사가 아무것도 없는 시골 교회에 와서 목회하겠다고 내려와 두문불출하니 걱정이 된 교회 뒷집 어르신이 쌀자루를 어깨에 메고 찾아왔다. “젊은 양반, 밥은 먹고 사나.”하며 내려놓고 갔다. 그 어르신의 한 마디 때문에 농촌에 뿌리박게 됐다.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썼다. “노인 하나가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이라고. 박 목사는 노인 한 분 한 분의 지혜를 박물관에 비유한다.
“제가 보름달이 무척이나 밝습니다했더니 교회 어르신께서 ‘목사님도 참, 달이 밝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맑으니까 달이 밝아 보이는 거지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 때 정말 지혜로우신 분들이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 씀씀이도 달라요. 우리 교회 터를 기증해 주신 분 묘에 추석 전에 가서 벌초를 해요. 같이 간 어르신들은 우리 묘뿐만 아니고 위아래 묘도 다 벌초를 합니다. 길목도 낫으로 깨끗이 베고요. 제가 ‘바쁜데 그건 왜 해요.’하면 ‘이웃간인데요. 깨끗하게 해야죠.’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어르신들과 살면서 그 지혜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사실 종교의 본질이 그분들의 생각과 삶 속에 다 녹아 있는 거죠.” 박 목사는 어르신들에게 지혜를 배우고 농사農事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더 가까이 알아간다. 이제는 앞 다퉈 하는 어르신들의 “목사님 나 죽으면 장사지내줘.”하는 부탁 때문에라도 쉽게 이곳을 뜰 수가 없다.
까치의 안위도 생각하는 녹색 교회 올해 6월에는 기독교환경운동연대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생명·윤리위원회가 환경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맞게 환경을 지키고 가꾸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교회에 시상하는 ‘녹색교회’에 선정되었다. 2002년부터 해온 어린이 생태기행과 ‘아나바다’장터, 6곳의 도시교회를 초청해 진행한 농활 등을 인정받은 것. 특히 2009년부터 에너지 절약과 이산화탄소 저감을 위해 교회 십자가를 소등, 지역 농가에 호응을 얻은 것이 높이 평가받았다. “십자가 밑에 까치가 집을 지었어요. 밤새 십자가가 켜져 있으니 싫었나 봐요. 네온을 쪼아서 못쓰게 만들었더라고. 까치집을 해체하고 올라가서 고쳤는데 뒤에 두 번 더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러겠나 싶어 5년째 안 켜고 있어요. 까치가 이제는 이층집을 지었어요.” 정 사모는 7년 전부터, 박 목사는 4년 전부터 우유나 달걀도 입에 대지 않는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됐다. 농사를 짓다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식성이다. 농촌에도 희망이 있다 박 목사는 기독교대한감리회 농도생활협동조합www.ndcoop.net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직접 짓는 농사는 물론 주위분들에게도 유기농법과 친환경농법을 권하는 등 자연을 살리고 농촌과 도시 직거래를 장려해 지역 경제를 살리는 데 한몫하고 있다. “농도생활협동조합은 소농을 살리자는 의도에서 시작했어요. 한국 농업이 기업농으로 바뀌면서 구제역 등 문제가 많이 생기고 있는데 정부는 대책이 없고, 교회에서도 관심이 없어요. 기업농이 물량은 나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문제가 생기게 될 거예요. 타교단에서도 생협을 시도했지만 다 문을 닫고 지금은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농도생활협동조합밖에 남지 않았어요. 교회의 관심이 절실합니다.”
박 목사에게 함께 유기농업을 하는 목회자들은 친구 이상이다. 홍천 지역에도 교회에는 오지 않지만 뜻을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을 박 목사는 ‘교회 밖 신자’라고 부른다. 한옥을 짓는 도편수, 목공소 사장, 한지 공방을 운영하는 이, 소나무 숯을 굽는 사람 등 다양하다. 이들과 연계해 친환경 농사 현장을 체험하러 온 청년들에게 홍천의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게 한다. 더불어 농촌 청소년 사역도 심혈을 기울여 꾸려간다. 방학이나 농한기 때 농촌 청소년들이 미국이나 캄보디아 등지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한 것. 농촌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의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고백한다. 박 목사가 첫 목회를 시작한 영월에 우박 피해가 났을 때 농민들과 군청에서 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 이 시위 기사를 미국에서 사역하는 이동수 목사가 보았다. 이 목사는 박 목사와 인근 지역 농촌 교회 목회자, 교인들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물론 체류비 일체를 그쪽에서 책임지면서. 다음해에는 박 목사가 미국의 이 목회자 일행을 초청했다. 그 후 꾸준히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이 이어져 오고 있다. 1999년부터는 미국 내 세 교회가 연합하여 청소년들을 초청하고 있다. 미국의 교회와 학교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한국에서 준비해 간 전통 악기와 놀이로 한국의 문화를 소개했다. 최근에는 장소를 캄보디아로 바꿔 미국과 한국의 청소년들을 위한 수련회 형식으로 개최하고 있다. 교류프로그램의 진행은 정 사모가 맡고 있다. 정 사모는 미국에 다녀온 이후 인근 초등학교 영어선생님으로, 미술 교사로, 본업인 조각가로 바쁘게 산다. 이제는 도시로의 이주를 아이들과 정 사모가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농촌 청소년들에게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사교육 한 번 받지 않았지만 꿋꿋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잘 해내고 있습니다. 농촌 청소년들을 자본주의 세상에 포획되지 않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내는 당찬 청년들로 키우고 싶습니다.”
한국 교회에 신선한 영성을 보급하는 농촌 “중세시대 교회가 타락했을 때 사막 교부들이 영성의 물줄기를 제공한 것처럼 농촌 교회도 도시 교회에 신선한 물줄기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농촌 교회들이 다 동면교회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지역마다 특성이 있고, 환경이나 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게 대처해야겠지요. 그러나 농촌에 교회를 개척한다면 꼭 농사를 지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저처럼 1,500평을 시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집 앞에 조그만 텃밭이라도 일상적으로 가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면교회에는 농촌을 우리 마을이라고 일컫는 목사와 그런 목사를 우리 목사님이라고 인정해주는 마을주민이 있었다. 언젠가 박 목사 자신도 “젊은 양반, 밥은 먹고 사나.”하며 다른 청년에게 영향력을 끼칠날이 오길 기대한다. 박 목사의 농촌 목회 비결은 굳은 살 배긴 그의 손에 있었다. 상처난 그의 발에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