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지안(이지아 분)은 건설회사의 비정규직 직원이다. 지안은 좋은 학력은 커녕 변변한 이력도 없다. 거동 못하는 할머니 외엔 버팀목 되는 가족도 없다. 지안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여느 사람들과 다르기로 작정했다. 세상에 날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고 살아간다. 회사 조직이 이런 지안을 좋게 받아줄 리 없는데, 박동훈 부장(이선균 분)이 의외의 제안을 한다. 정규직들 회식 자리에 비정규직을 초대한 것이다.
“같이 가 고기 먹으러”
“회식 자리에 같이 가자는 그 단순한 호의의 말”에 이지안은 “처음으로 사람 대접 받아 봤고 어쩌면 내가 괜찮은 사람일 거란 생각을”하게 된다. 비정규직 지안은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던 시간을 정규직들과 함께 하는 평범한 회식자리에서 경험한다.
현실 속 세상은 드라마와 다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여성, 비장애인과 장애인, 선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구조적 차별은 존재한다. 간혹 희소한 사람들의 특별한 호의에 구조적 차별이 가려지긴 하지만, 드라마 속 박동훈 부장 같은 사람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환타지다.
이런 현실을 잘 알았기에, 청년 강유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비교적 허들이 낮은 서비스직에 종사했다. 힘들기도 했고, 배우기도 했고, 깨닫기도 했다. 일은 힘들었고, 손님들에게 배웠고, 서비스직이 적성에 맞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직장 생활이라는 게 배움이나 깨달음보다 훨씬 더 많이 힘들기 때문에, 10여 년을 일해도 일이 쉬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드라마 속 박동훈 부장 같은 사람을 직장에서 만나는 행운은 없었다. 어느 땐가 직장 생활이 힘들어 교회 예배도 드리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힘든 게 지나쳐 너무 힘들게 되니까 다시 교회를 찾게 되었다.
너무 힘들어져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찾게 된 교회 청년부엔 또래 중심으로 모이는 부서모임이 있다. 오랜만에 와서 쭈뼛거리는데, 소모임 리더가 (부서모임에) “너도 같이 가” 라며 해준 한 마디에 교회에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 직장과 달리 교회엔 현실과 다른 환타지가 작동되었다. 학력, 경력, 성별로 구별되지 않는 “그냥, 사람”들의 만남이 교회 내에 있다.
교회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교회 내 좋은 사람들로부터 돌봄을 받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기도 했다.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돕기도 하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이런 풍성한 교제를 경험하며,
다시 세상이 보였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강의 듣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차츰 회복되었다. 회복된 몸과 맘으로 사회에서 양심적인 사람들을 만나 기후 위기에 대해 눈을 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그 세상이 기후 위기를 맞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었다. 사회적·경제적 약자가 기후 위기의 첫 번째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상 기후로 인한 홍수나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터전 상실, 식량난이 닥치면 상승하게 될 식료품값, 기후 위기가 전쟁으로 발전할 경우 여성이 겪어야 하는 폭력 등, 기후 위기로 약자들이 치러야할 대가를 생각하니 섬뜩했다.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청년으로서, 구조적 차별이 여전한 대한민국에 사는 여성으로서, 기후 위기의 첫 번째 피해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뭐라도 해야 했다.
무얼 해야 할까.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하릴없이 산책을 하다가 ‘공간’을 만났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뭔가 할 만한 공간이었다. 임차비를 알아보니, 수익을 내지 못해도 다른 곳에서 알바하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뭐라도 하자.
집 근처 자주 산책하는 길 대문 옆에 할머니들이 고무다라에 분꽃을 심어 가꾸고 계셨다. 자주 다니는 길에서 만난 분꽃은 폈다가 오그라들고 다시 폈다가 또 오그라들었다. 오그라들었던 봉오리가 다시 핀 것을 보고 할머니께 꽃에 대해 여쭈었다. 분꽃은 오후 4시쯤 핀다고 한다. 시계가 없던 옛날, 분꽃이 피면 저녁 밥 지을 준비를 하셨다고 대답해주신다.
작은 고무 다라에서 자신의 존재를 피워내며 시간을 알려주는 분꽃처럼, 작은 공간에서나마 기후 위기에 직면한 지구의 시간을, 알려주고 싶었다. 2020년 7월, 코로나가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로 세상 복판에 군림하고 있을 때, 백신도 치료제도 개발되지 않았을 때, 강유민 대표는 기후 위기를 극복해야할 시간이라고 분꽃처럼 말해주고 싶어, 고무다라 화분같이 작은 가게를 연남동에 차렸다.
연남동이지만, 그 연남동은 아니다. 소위 핫한 연남동은 아니란 말이다. 경의선 숲길이 통과하고 유수의 맛집과 카페가 즐비한 연남동이 아니라, 행정구역상으로만 연남동이라, 그 연남동을 아는 사람들은 여기도 연남동이야 라고 반문하게 되는 곳이다. 그 연남동의 끝자락에 월세 30만 원짜리 4평 공간에 ‘유민얼랏’이라는 제로웨이스트샾을 차렸다. 그 연남동과는 다른, 연남동 끝자락에서 옹기종기 일터를 만든 사람들이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다. ‘끝남동.’
연남동의 끝이란 뜻과 함께, 그 연남동과 구별되는, 새로운 동네를 브랜딩한 것이다. 이젠 그 연남동을 찾은 사람들이 끄트머리에 있는 끝남동을 들러가는 게 아니라, 끝남동을 일부러 찾아오기도 한다. 연희동 남쪽 연남동에서 새로운 창조가 있었고, 연남동 끝 끝남동에서 역시 새로운 창조가 있겠다. 창조는 늘 변방에서 일어났으니까. 큰 강 중심의 문명은 작은 샘에서 발원했으니까.
창세기에 의하면 에덴동산에서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강이 발원하지 않았는가(창2:10~14). 유브라데는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문명이 시작된 강줄기다. 에덴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처럼 큰 강이 흐르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평지가 아니라, 작은 샘이 시작되는 높고 험한 지형이었겠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땅은 아닌 것이다. 거기 에덴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선 여전히 주류(a main stream)가 아니라 좁은 땅 적은 수가 서 있는 변방에서 새 흐름(the new stream)을 창조하신다. 끝남동 4평짜리 제로웨이스트샾 유민얼랏은 에덴을 닮았다. 하나님의 창조가 일어날 공간이다.
진짜 그럴까. 진짜로 하나님께서 끝남동 4평 공간에서 새로운 창조를 감행하실까. 기후 ‘위기’를 고작 4평짜리 가게를 운영하는 청년이 극복할 수 있는 걸까. 이런 작은 사업을 하며, 기후 위기라는 거대 담론에 참여하는 게 가당키나 한 걸까.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 기원전10~54) 때에 ‘천하에 큰 흉년’이 들었다(행11:28;12:25). 식량 ‘위기’였다. 위기가 분명하지만, 로마 황제는 제국 변방의 흉년을 굳이 해결할 맘이 없었을 거다. 세금을 걷지 못할까 염려할 뿐, 로마 황제는 흉년으로 배고픈 식민지 사람들을 염려하진 않는다. 당시 유대 왕은 글라우디오의 친구 ‘헤롯 아그립바’였다. 헤롯 아그립바는 에돔족 출신인 헤롯대왕의 손자요, 글라우디오가 황제가 되도록 공을 세운 공신이다. 로마 황제는 헤롯 아그립바를 좋아했겠지만, 유대인들이 좋아할만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정통성 없는 권력은 희생양을 찾아 잔인하게 다룬다. 에돔의 후손이며 로마 황실의 꼭두각시라 유대인들에게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던 헤롯 아그립바는 유대 백성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예수님의 직계 제자인 야고보를 처형했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투옥시켰다(행12:2~4). 온 세상 사람들이 흉년이라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거기에 더해 교회는 정치적으로도 박해를 받고 있어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이렇게도 죽고 저렇게도 죽을 수 있는 ‘위기’다.
대중은 글라우디오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헤롯 아그립바가 기획한 경기에 환호하며, 헤롯 아그립바를 신이라 외친다(행12:22). 죽을 것 같은 때에 대중은 왕이 기획한 서커스에 환호한다. 위기의 때에 헤롯 아그립바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율이 오히려 상승한다. 기후 위기 시대에 핵발전소 추가 건립을 공약한 이가 대통령이 되는 우리 시대와 닮았다.
위기의 때에 소망이 없는 것은 암울한 정치·경제적인 상황 때문이라기보다, 스포츠와 연예인과 드라마와 심지어 종교에 중독되어있는 우리들 때문이다. 흉년과 박해라는 거대한 ‘위기’ 때문이 아니라, ‘위기’를 ‘위기’로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들 때문에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때에’, 안디옥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흉년으로 배고픈 사람들을 구제한다(행11:29). 글라우디오의 황궁이 아니라, 안디옥 교회 예배당이 ‘큰 흉년’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또 ‘이와 같은 때에’ 교회 지도자마저 죽거나 갇혀있는 때에도 소망이 있었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12:12)” 기도하는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는 이름도 나와 있지 않다. ‘로데’라는 여자 아이 외에는 함께 기도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모른다.
2년 전에 세례 받은 30대 청년 강유민 대표의 4평짜리 ‘유민얼랏’에선 한 달에 세 번 5명 전후의 사람들이 모여 기후 위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고, 책을 읽으며 대화한다. 종교적 예전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별과 그 위에 살아가는 약한 사람들이 모여 궁리하며 대화하는 것 역시 기도 아닌가. 글라우디오 때에 닥쳤던 식량 위기와 박해의 시간에 ‘로데’라는 여자 아이의 이름이 기록되었듯, 전 지구적 기후 위기의 시간에 제로웨이스트샾 ‘유민얼랏’과 30대 청년 ‘강유민’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기록하시지 않겠는가.
가게 이름 ‘유민얼랏’은 2018년 교회로 이끌어준 친구가 지어 주었다. ‘당신은 소중하다’는 뜻이 담긴 유민얼랏(You mean a lot)을 소리내서 읽으면, 대표 강유민의 이름도 들린다. 친구가 이름을 지어줄 때 ‘유민이는 소중해’라는 의미도 담았겠다. 친구의 격려와 자기 긍정, 그리도 세상 모든 타자들(You)은 소중하다는 선언이, ‘유민얼랏’이라는 이름 속에 담겨있다.
쓰레기를 줄이는 실천으로 지구별의 기후 위기를 극복해보자며 워크샵과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함께 하는 사람이 있을 때 강유민 대표는 행복하다. 혼자서 월세를 걱정해야 하고, 생활할만한 수익이 보장되지 않을 땐 마음이 어렵다. 함께 궁리할 때 행복하고, 혼자 고민할 때 힘들다. 행복과 고민은 반복되겠지만, 연남동 487-342 3호 유민얼랏 간판 아래 서 있는 청년 강유민의 자리가 에덴을 닮았다면, 분명 하나님께서 보시고 참 좋다 하시겠다. 고무다라 화분에서 피고 지며 오후 4시를 알려주는 분꽃처럼, 기후 위기의 시간을 알려주는 당신은 소중하다 하시겠다.
글/ 김영준
김포에 산다, 민들레교회와 협동조합 달팽이학교가 운영하는 공간 민들레와달팽이를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