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꼭 선진국으로만 가야 하나요”
개발도상국가들을 향한
이른바 ‘틈새이민·틈새유학’ 붐이 불기 시작했다. 올해부터 거세지기 시작한 이민열풍.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 ‘인기국가’를 찾는 발길이
줄어들 줄을 모르지만 말레이시아나 필리핀, 피지, 인도 등을 택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남미이주공사에 따르면 올해 들어 이 업체를
통해 개발도상국으로 이민을 떠난 가족은 모두 200여가구. 지난해 같은 기간의 이민가구수(60여가구)의 3배가 넘는다. 이민 문의 역시 작년
같은 기간의 3배에 가까운 하루 평균 60∼70건씩 들어오고 있다. 이주공사 관계자는 “다른 이민업체들의 경우도 우리와 비슷하다”고 밝혔다.
◇높은 삶의 질=틈새이민을 떠나는 이유는 한마디로 ‘적은 비용으로도 질 높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우선 개발도상국가들은
국내에 비해 물가가 싸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전정묵 피지 한인회장(55)은 “월
1백만∼1백20만원이면 4인가족이 중·상류층 생활을 누릴 수 있다”며 “한국에서 퇴직금만으로는 생활이 힘든 노부부가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러
피지로 이민을 오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말레이시아도 물가가 국내의 절반 내지 3분의 2 정도 수준이다. 한 교민은 “물가가
낮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엄두조차 못내던 골프 등 레포츠도 마음 놓고 즐기고 있다”며 “여유있는 교민들은 가정부를 2명 이상씩 두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 이민업체 관계자는 “고학력자들도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 초기에는 블루칼라 계통의 직업에 종사하며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나 개도국에서는 경제적 어려움을 덜 겪고 비교적 빨리 정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종차별이나 배타적인 분위기도 선진국들에
비해 훨씬 덜하다는 것이 이민자들의 공통적인 의견. 한 피지 교민은 “현지인들은 정이 많고, 한국인에 대해 대단히 우호적”이라며 “인종차별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좋은 교육여건=대부분 국가들의 교육여건이 좋은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공교육은 대부분 무상. 경제적
여건이 된다면 자녀를 국제학교나 사립학교에도 보낼 수 있다.
인도교육컨설팅업체 스쿨인디아 이상만 사장(40)은 “인도에는
100∼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사립 초·중·고교나 국제학교들이 많다”며 “학비도 미국이나 영국 사립학교의 20~35% 수준”이라고
말했다. 올해 초 딸을 인도의 사립초등학교에 유학보낸 이모씨(38)는 “엄격한 기숙사생활로 생활지도가 가능한 데다 승마, 골프, 악기, 미술 등
다양한 과외활동까지 할 수 있어 좋다”고 기뻐했다.
영국이나 미국 대학으로의 진학이나 편입도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주)스탬포드칼리지 정승남 사장(45)은 “말레이시아 현지 대학에서 취득한 학점이나 고교 성적 등이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인정되기 때문에
유수대학에 편입·입학하기가 수월하다”고 말했다.
대부분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한국 학생과 학부모들의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인 영어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된다. 게다가 현지 언어와 제2외국어도 덤으로 익힐 수 있다. 지난 4월 몰타로 이민간 김두용씨(34)는
“학교를 졸업하면 공용어인 영어와 몰타어는 물론 이탈리아어나 독일어, 프랑스어도 구사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고 전했다.
사립학교나
국제학교는 일종의 ‘예비 사교클럽’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정승남 사장은 “말레이시아 국제학교에는 동남아나 서남아 국가의 왕족과 외교관 등 고위층
자녀 유학생들이 많다”며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의도적으로 이들과 커뮤니티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극성’ 부모들도 가끔 있다”고 귀띔했다.
◇무한한 가능성=이들 국가는 외국인에 대해 규제도 적고 사업하기에도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이민자들은 입을 모은다. 경제성장
속도가 빠른 국가들이기 때문에 사업아이템을 잘 잡으면 발전 가능성도 그만큼 크다고 한다. 일부 국가들은 또다른 이민을 위한 ‘중간기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전정묵 회장은 “몇몇 사람들은 피지에서 3∼4년 살다가 호주나 뉴질랜드로 재이민을 가기도 한다”며 “피지에서 거주한 경력
때문에 쉽게 이민허가가 나온다”고 말했다. 또 내년에 유럽연합(EU)에 가입할 예정인 몰타와 일부 동유럽국가들에서 일정기간 거주, 시민권을
취득할 때는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영주권까지 취득하게 된다. 때문에 이민자격이 까다로운 다른 유럽국가로 이민을 가기 위해 이들 국가를
중간이민지로 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게 이민업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고려대 박길성 교수(사회학)는 “젊은 사람들이 미국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국가들의 장점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라며 “그러나 해당국가들에서는 불확실성도
높은 만큼 철저한 사전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사발췌: 경향신문(2003년 11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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