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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배따라기>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대동강으로 봄 경치를 구경하러 갔다가 ‘영유 배따라기’를 부르는 ‘그’를 만나 사연을 듣는다.
조그만 어촌에 부자이며 배따라기 노래를 잘 부르는 두 형제가 산다. 형제는 모두 장가를 들었고 부부사이에 못지않게 의가 좋았다. 형인 ‘그’는 영유 사람으로, 아름다운 아내와 늠름한 동생을 두었다. 성품이 쾌활하고 친절한 젊은 아내가 미남인 동생에게 특히 친절한 것을 못마땅해 하며 질투심에 아내를 자주 괴롭힌다. 그 후 아내와 아우 사이의 관계가 유난히 원만하자 형은 둘 사이를 의심하게 되고 기회만 있으면 꼬투리를 잡아 혼내 주려고 벼른다. 그런 참에 아우가 영유에 자주 출입 하면서 첩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가 형에게 동생을 단속하라고 보채자 의심은 더욱 깊어진다.
어느 날, 아내에게 줄 거울을 장에서 사 들고 집에 들어오다가 아내와 동생이 방에서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로 씩씩대는 것(사실은 방에서 쥐를 잡느라고 그리 된 것)을 보고 오해한 나머지 둘을 등을 밀어 내쫓았다. 저녁 때 방에 들어와 성냥을 찾던 형은 낡은 옷 뭉치에서 쥐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했으나 다음 날 낮쯤 아내는 시체가 되어 바다 위에 떠오르고, 이 때문에 아우는 집을 나가 행방이 묘연하게 된다. 결국 형은 20년 동안 배따라기 노래를 부르며 뱃사람이 되어 떠돌아다닌다는 동생을 찾아 뱃사람으로서 방랑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그 후 1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바닷가에서 동생을 만난다. 그러나 그저 다 운명이라는 말을 하며 환상처럼 떠나 버리는 동생. 그리고 다시 10년 세월을 유랑하지만 동생을 다시 만나지는 못한다.
그날 밤, ‘나’는 ‘그’의 숙명적 경험담에 잠 못 이룬다. 다음날 아침, ‘그’를 찾으러 대동강에 나갔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김동인의 배따라기는 운수좋은 날 같은 비극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한국인의 바탕에 흐르는 정서인 한을 잘 표현해낸 이 작품은 마치 한 섞인 구슬픈 배따라기를 직접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평생 한을 삭이지 못하고 떠돌며 사는 그를 보며 한편으론 <참을忍>자가 3개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던 속담을 생각나게 하고 또 한편으론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든다.
<감자>
농부의 딸인 복녀는 돈80원에 팔려 나이가 저보다 스무 살이나 더 되는 홀아비에게 시집을 갔다. 생활은 말이 아닌데다 남편은 게을러서, 기어코 평양 교외의 빈민굴로 밀려나와 구걸로써 목숨을 이어 가게 되었다. 마침, 그 때 기자묘 솔밭에 송충이가 뒤끓어 평양부에서는 그 퇴치에 나섰다. 복녀도 그 인부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복녀는 열심히 송충이를 잡았다.
어떤 날 그녀는 몇몇 아낙네들이 감독과 더불어 웃고 놀며 소일하면서, 품삯은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받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녀도 감독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었으며, 그 날부터 다른 아낙네처럼 놀아날 수가 있게 되었고, 정조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가을이 닥쳐왔을 때 복녀는 빈민굴 아낙네 들을 본받아, 이번에는 중국인 감자밭에 감자를 도둑질하기 위해 드나들기 시작했다. 어떤 밤이었다. 그녀는 감자 한 광주리를 훔쳐서 막 일어나려는 찰나 중국인 왕 서방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복녀는 중국인을 따라가서 몸을 허락하고 얼마간의 돈을 얻어 돌아왔다. 그 후부터 그녀의 집에까지 왕 서방은 드나들게 되었다. 그들 부부의 생활에는 약간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복녀의 집에 왕 서방이 오면 복녀의 남편은 복녀가 마음을 놓고 몸을 팔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인 왕 서방이 장가를 들게 되었다. 새로 색시를 사왔기 때문이다. 복녀는 타오르는 질투를 참지 못해 혼인을 치르는 날에 왕 서방을 찾아가서 자기의 집으로 가기를 청했다. 결혼식장은 점점 수라장으로 변해 갔다. 복녀는 손에 낫을 쥐고 대항하다가 피를 뿜고 죽어 갔다. 이 날 밤 왕 서방은 복녀의 남편과 의사에게 각각 30원과 20원씩을 주었다.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의 진단으로 공동묘지로 실려 갔다.
착한 복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지 생각을 해 보았다. 첫 번째로는, 무능력하고 극도로 게으른 남편으로 인한 가난. 두 번째로, 부도덕한 사회 환경. 세 번째로, 복녀 자신의 본능 이라고 해야할까... 아마도 가난과 부도덕한 사회 환경으로 인해서 이런 일에 중독 되었기 때문에 왕서방에게 시집온 색시를 분노 한다고 표현해도 되겠다. 네 번째로, 복녀의 삶을 타개하고자 하는 의지의 박약과 무지가 있겠다.
아무래도 이 중 가장 큰 이유를 택한다면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될 것이다. 김동인의 작품들을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부도덕한 사회 환경과 가난한 환경 때문에 이런 일을 많이 겪는 것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김동인은 자연주의, 환경 결정론자니까...
<광화사>
화가인 솔거는 추악한 얼굴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존재이다. 두 번에 걸친 결혼생활에서도 실패한 그는, 자신에게 자애로우면서도 미인이었던 어머니의 모습에 매달리고, 어머니의 모습을 재현해 미인도를 완성하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남들과 달리 잘해준 사람은 어머니였기 때문이며, 그의 어머니는 당대의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는, 산골에 사는 눈먼 처녀에게서 순수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녀를 모델로 미인도를 그린다. 눈동자만을 남겨두고 그림을 완성한 채 밤을 맞은 솔거는, 처녀와 사랑을 나눈다. 이튿날, 솔거는 그림을 완성하려 하지만, 이미 애욕에 들뜬 처녀의 눈동자에는 순수한 빛이 사라지고 없다. 그는, 처녀에게 눈을 떠준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역시 바뀌지 않는다. 분노한 그가 처녀를 밀어 넘어뜨린 것이 벼루에 부딪쳐 그녀가 죽게 되고, 그 때 튄 먹물로 그림에는 원망스러워하는 듯한 눈동자가 찍힌다. 이후, 솔거는 광인이 되어 미인도를 품에 안고 방황하다가 죽는다.
<광화사>의 주인공 솔거에게 있어서는 작품이, 방화나 살인 같은 파괴적 행위와 맞바꾸어지는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사람들로부터의 소외를 지워주는 한 방편, 유년의 그리운 추억인 어머니의 모습을 되살릴 수 있는 한 방편이다. 너무도 추한 얼굴을 가졌기 때문에 사회에 정상적으로 적응하지 못한 솔거.
시인이나 화가 같은 예술가들은 본래 저주받은 영혼, 어딘가 광기를 가지고 있어 세상에 적응할 수 없는 인물이며 그러한 인물이라야 뛰어난 예술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솔거는, 모성애의 기억에 매달린다. 자애로우면서도 아름다웠던 어머니의 얼굴을 되살려 화폭에 담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 그가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세속적인 욕망이나 이해타산을 초월한 아름다운 얼굴이다.
사람들이 그를 배척한 이유가 못 생긴 얼굴 때문이었으며, 그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이유 역시 어머니가 그런 가치와 욕망을 떠나 자신을 사랑한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솔거가 어머니의 얼굴을 발견한 곳은, 산골에서 자란 눈먼 처녀에게 서다. 세속의 어떤 욕망도 배우지 않은 처녀의 얼굴이 어머니의 얼굴로 비쳤던 것이다. 그러나 솔거는, 미인도의 완성을 앞에 두고 그 영상을 스스로 깨뜨린다. 그 자신이 처녀에게 세속의 욕망을 가르침으로써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떠 다시 미인도를 완성하려는 예술의 혼에 사로잡힌 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처녀를 죽이게 된다.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는, 스스로 그것을 망치고, 다음에는 그 때문에 파괴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살인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살인의 결과와 광기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온다.
이런 예술가상을 보여주면서 예술가의 일대기로서 소설의 뼈대를 삼고 있다는 점에서, <광화사>와 다음에 나올 <광염 소나타>는 ‘예술가 소설’ 이라 할 수 있다.
<광염 소나타>
김동인의 소설 광염소나타는 섬뜩하면서도, 음악적천재성을 지닌 한사람의 비애가 그려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유명한 음악 비평가 K씨가 한 사회교화자에게 “어떤 사람이 그의 심성과 무관하게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것이 죄가 되느냐”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사회교화자는 그것은 분명 죄이고, 그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K씨는 천재성이 너무나 아깝지 않느냐며 그 사람을 옹호한다.
혼자 자리에 앉아서 깊게 생각을 했었다. 참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간의 천재성, 그리고 사악한 면모에 덧붙인 잘못된 예술성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 하지 않을 수 없다. ‘기회’라는 것이 범죄와 천재성과 함께 연관지어진다면, 그것이 올바른 기회인 것인가? 그 기회를 잡아야 옳은 것인지, 아니면 필연적으로 놓쳐야만 하는 것인지. 보통사람이 이런 문제가 자기한테 닥쳤을 때 한번쯤, 아니 수 천 번은 고뇌하며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가늠하며 힘들어할 테지만 주인공 백성수는 일체의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즉흥적으로 일으킨 살인과 방화. 그 속에서 피어나는 천재적인 곡들.
한 사람을 죽일 때 마다 하나의 곡을 작곡해온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사람을 죽여야만 끔찍하게도 아름다운 악상이 떠오른다면 예술가로서 사람을 죽이고 음악을 얻어야 그것이 진정한 예술가인 것인가? 내 생각엔 아닌 것 같다.
방화를 하면서 문뜩 떠오른 악상에 광포한 연주를 하고, 그것을 악보에 옮기면서 그는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 것이 예술이라면 나는 예술을 저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을 죽이고서 얻어내는 음악이 누군가를 감동 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란 참으로 오묘하고도 미묘한 감성과 그리고 자신의 천재성을 믿으면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것 같다. 누구도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는 없다. 그건 <신>만의 영역이다. “확증되지도 않은 자신의 천재성을 믿으며 남의 생명을 빼앗고 작곡을 한다.”라는 그 자체가 예술가로서 가당치 않은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고, 감동시킬만한 것을 창조해내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가의 면모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방화,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명곡을 하나씩 지어냈던 음악가 백성수에 대해, 화자가 “있으나 없으나 한 쓸데없는 목숨보다는 위대한 음악이 더 소중하지 않느냐”> 라는 물음을 나에게 한다면, 나는 솔직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음악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하며 또한, 그것을 만들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본다.
첫댓글 대일님, 수고하셨어요.훌륭합니다. 언제 혜성처럼 나타나실 날만 기다리고있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_()_
독후감이 올라갈 때마다 돈 나가는 것 때문에 가슴이 덜컹하지만 그래도 이쁘답니다. 대일 거사님!방학동안 화이팅~~
전 저축하고 있답니다.언젠가의 해후를 위하여...
대일님 정말 부럽다 무진당님 ㅎㅎㅎ 한 번 당해 보세요. 전 벌써부터 강탈 일보직전입니다요
ㅎㅎㅎ.그래도 책 읽고 독후감 쓴 후 강탈해 가는 것은 눈감아 줍시다~~^^*
^^ 즐거운 비명~
방학동안 무수 사람들의 삶을 책으로... 대일 부처님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_()_ 아미타불!
대일님 덕에 감자 쪄 먹으면서, 뱃노래 듣고, 그림과 음악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_^ 가히 동인문학상을 받을 미래의 작가님의 눈에 비친 단편들을 봅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