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일 없을 것 같던 하루였지만 생각보다 고된 시간이었다.
제천에서 일보고 나니 벌써 3시가 훌쩍 넘었다. 다시 무언가에 쫒겨 허둥지둥하기 일쑤였다.
마지막인지 ing인지 모를 목적지는 단양이었다.
조금 오래전에 개량되어 울퉁불퉁 구불구불한 4차선 길을 따라 열심히 달리다,
시멘트공장도 구경하고 도담삼봉과 남한강변 공사판을 지나서 조그만 단양읍에 차를 세웠다.

단양 역시 참 오랫만에 밟아본 동네다.
무엇을 하러 왔는지보다 주변 풍경이 더 인상깊었던 곳이었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오면서 구경할 수 있는 대형 시멘트 공장, 도담삼봉, 남한강의 위엄은 쉽게 눈길을 떼기 힘들었고,
남한강을 굽이굽이 끼고 경사진 곳에 자리잡은 특유의 풍경도 인상깊다.

그러나 읍내는 많은 것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충청북도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시골 중의 시골이지만, 가장 빠르게 바뀌는 곳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단 중심 도로부터 싸그리 단장하는 중이다. 5년 전만 해도 허술했던 보도블럭과 택시정류장이 말끔히 다듬어져 있었다.
그리고 높은 곳에 있었던 낡은 버스터미널은 온데간데 없고 저 밑으로 넓은 주차장과 새로 만든 건물이 있었다.

처음 단양을 왔을 때 버스터미널의 모습을 보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있다.
크기는 쓸데없이 크면서 황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던지라, 왠지 무섭고 싸늘한 인상을 주었던 곳이기 때문.
대낮에도 라이트를 켜야 했을만큼 너무도 어둡고 칙칙한 냄새마저 났던 곳이 이렇게 바뀌었다.
주차장을 도로변에 맞대어 버스 출입이 쉬워졌고 훨씬 환해졌다.
더욱이 바로 옆엔 큰 규모의 관광안내센터를 지어 볼 거리를 많이 만들어놓았다.

같은 위치지만 구조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버스터미널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사뭇 달라졌다.
그 어떤 지방 시골 터미널처럼 사방이 꽉 막힌 듯 답답했던 내부가,
이제는 버스 기다리면서 단양대교와 산이 어우러진 멋진 절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아침에 오면 일출마저 볼 수 있을 정도. 다만 강 쪽은 펜스를 잔뜩 쳐놓은 바람에 지금은 물줄기를 볼 수 없다.

전체적인 규모는 예전과 비슷하지만 관광시설을 옆에 만드는 바람에 대합실 크기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사진에 담긴 것이 사실상 대합실의 거의 전부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늦더위를 식히며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초딩(?)들과 어르신 몇 분,
그리고 표를 사기 위해 수시로 왔다갔다하는 청년과 아저씨 등등.
대부분 노인밖에 볼 수 없는 시골 터미널들과 비교하면 활기가 넘치고 다양한 사람들이 오간다.
예전의 단양터미널 내부와 비교해봐도 확연한 차이다.

또 하나 달라진 것은 표 파는 곳 옆에 관광센터로 직접 이어지는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것.
TV와 팜플렛 옆에 조그맣게 있지만 거울 덕에 쉽게 눈에 띈다.
여기뿐 아니라 승차장에서도 바로 들어갈 수 있을만큼 가깝게 지어놓았는데,
도시의 관문에 바로 이어지게 해서 관광객을 쉽게 끌어모을 수 있게 한 것이 좋다.
여기 관광센터가 아쿠아리움, 호텔, 전시장, 휴양시설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특징.
이 모두가 버스터미널을 새로 지으면서 같이 만든 것이다.

그에 비해 아직 버스터미널의 입지는 그리 훌륭한 편은 아니다.
바로 옆에 제천이라는 교통의 요지가 있기 때문에 그 쪽으로 승객이 많이 빠진다.
제천보다 사람이 적어 노선이 적을 수 밖에 없는데다, 그리로 가는 시내버스가 10분 간격으로 이어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실.
거기에 날이 갈 수록 빨라지는 중앙선까지 경쟁하는 처지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래도 동서울을 비롯해 원주, 안동, 충주, 청주 등 이웃한 동네로 가는 버스는 제법 있는 편이다.

제천이라는 교통의 요지에 중앙선이라는 경쟁작이 있기에 개조 전에는 그야말로 파리 날리는 수준이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대낮에 새벽 분위기를 감상할 수 있을만큼 음침했을 정도로 관리도 안 되고 이용객도 적었다.
그러다가 남한강변으로 옮기는 굴욕(?)까지 버텨가며 개조를 한 후로는 승객이 상당히 늘어난 것 같다.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눈길도 쉽게 가고, 무엇보다 버스를 타는게 무섭지 않다는 거다(!).
지역적 한계 때문에 아직까지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군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투자는 다 해준 것 같다.

옆에 있는 관광시설은 바로 '단양나누리센터'.
단양에서 밀고 있는 아쿠아리움을 비롯해 들어갈 수 있는 어지간한 문화시설은 다 있다.
한 곳에서 물 속 구경, 어린이 체험, 목욕, 숙박까지 모두 해결되니 이처럼 편한 곳이 없다.
거기에 단양읍내 한복판이어서 주변에 음식점과 상점도 널려있고 강만 건너면 그 유명한 고수동굴도 있다.
바로 앞엔 남한강이 흘러 경치도 죽인다. 수상스키, 페러글라이딩도 같이 할 수 있다.

예술의전당 보는 것 마냥 으리으리한 생김새다. 읍내 한복판에 이렇게 큰 건물 짓는 것도 아무나 못할 짓인데..
시간 때문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꼭 다시 와보고 싶다. 저 앞에 물고기 형상도 참 귀엽고.
이게 다 산과 강을 끼고 있는 조그만 읍내이기에 가능한 것일테다.
'단양'이니까 할 수 있는, '단양' 아니면 감히 시도조차 못 할 멋이다.

이렇게 바뀌어가는 단양이라는 동네가 남한강의 삶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 어쩌면 우리네 인생과도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 존재하는 강과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똑같이 생긴 건 하나도 없다.
모두 저마다의 색깔이 존재하고, 저마다의 개성을 뽐낸 채 그렇게 살아간다.

70억명의 인간 중 단 한 명도 지문이 같은 사람이 없는 것 처럼,
비슷한 강은 있어도 똑같은 유량, 똑같은 길이, 똑같은 환경, 똑같은 지류를 가진 강은 단 하나도 없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도 같다. 그 어떤 강과 사람이던 'Birth'와 'Death'가 없는 경우는 없다.
알 수 없는 조그만 계곡, 엄마 뱃 속에서 연약하게 태어나는 것도 같고, 바다와의 만남과 숨의 멎음이라는 최후의 장면도 닮았다.

한강으로 말하자면 '짧고 굵은 강'.
강원도 북쪽의 수많은 계곡이 모여지면서 조금 가파르게 흐르는 '북한강'
강원도 남쪽의 수많은 계곡이 역시 모여져 어느새 잔잔하게 흐르는 '남한강'
이 둘이 합쳐져 서울이라는 심장을 지나 다시 임진강, 예성강이라는 큰 강과 함께 서해로 흘러드는 꽤나 사연 많은 강이다.
길이는 짧아도 여기저기서 모여드는 물줄기가 꽤 큼직한 것들이 많아서인지 상당한 유량을 자랑한다.
대도시 한 복판에 너비 1km나 되는 큰 강이 흐르는 것조차 세계적으로 유례없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니..

반면 나일강처럼 '가늘고 긴 강'도 있고 아마존강, 양쯔강처럼 '굵고 긴 강'도 있다.
사막에서 비 올 때만 흐르다 없어지는 이름 없는 '와디'도 전세계에 널렸으며
시작은 알프스지만 매연이란 매연은 죄다 쓸어담는 '라인강'도 있으며
'황하'처럼 한 번 빠지면 평생 깨끗해 질 수 없다는 전설을 가진 강도 있다.
'갠지스강'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신성시되는 영적인 강도 물론 있다.
그랜드캐니언이란 웅장한 협곡을 남기지만 정작 제 명에 죽지 못해 사막 어디선가 사라지는 콜로라도 강도 있다.

이처럼 저마다의 스토리텔링을 가진 강들이 수없이 존재하는데 사람도 어쩌면 그와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일강처럼 강한 임팩트는 없지만 오래 살면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아마존강처럼 모두가 기억하는 굵고 긴 인생,
한강처럼 짧지만 강렬한 삶,
콜로라도처럼 유명인사가 되고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죽는 인생,
황하처럼 수없는 굴곡을 가진 조금은 불결한 인생,
갠지스강처럼 모두에게 존경받는 신성한 인생,
그 외에 저마다의 얼굴을 남기며 살고 죽는 절대다수의 이름 모를 삶 등등.

생각해보면 오글거릴 수도 있는 비유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왠지 자꾸만 들었다.
태어남과 죽음까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운명까지도 닮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아라는게 있다.
주어진 환경을 바꾸기는 어려울지언정, 그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내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강이라는 미물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만의 특권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한껏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산을 넘어갈 것만 같은 아찔한 페러글라이딩을 타는 저 순간만큼은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나만의 자유로움을 맘껏 펼치는 쾌감의 순간일 것이다.
수상스키를 짜릿하게 즐기는 사람들, 유유자적 낚시를 하는 사람들, 강변에서 산책하며 운동하는 사람들 모두.

모든 것들은 나와 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존중해줄 필요가 있고 다름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이 인정하는 상식이지만 정작 이를 지키며 사는 사람은 많이 없는 것 같다.
나 또한 마찬가지고. 다르다고 배척하고 차별하고 '같은 사람'을 만들기 위해 무작정 바꾸려 들고.
심지어는 운명적인 '다름' 자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이 세상 모든 갈등이 어쩌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작은 다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강처럼 주어진 것에 불만없이 순응하고 흘러가는 삶을 살고 싶다.
'나'와 '너'가 다르다고 불평하지 않는,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삶.
그러면서 내 스스로의 앞에 놓인 상황을 조금씩 개척할 줄 아는.
참 말로는 쉬우면서 가장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일이다.
강따라 인생따라 흘러가는 것. 그 것이 가장 필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길이다.
- 6부에서 -
첫댓글 갈수록 필력이 넘치시는듯 합니다. 늦은시간에 잘보고 갑니다~ 단양 터미널은 아직 들린적이 없네요. 올해는 어떻게든 한번 방문해야겠군요.
터미널 말고도 주변에 볼 것이 많습니다. 꼭 한 번 가보세요. 시간이 늦어 구경을 못한걸 아직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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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D 저도 고수동굴 가보고 싶네요!
그동안 .pc로 접속을 안하고 스마트폰으로 하다보니 맥시멈님의 여행기를 못보고 지나쳤네요^^ 애들 데리고 단양에 두번인가 다녀왔는데 다음에 갈땐 터미널옆의 아쿠아리움도 보고 와야겠네요! 잘봤습니다.
아쿠아리움도 한 번 가보시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것 같습니다. 저도 가보진 못했지만 주변을 참 잘 꾸며놨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