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의 아들 융(隆)은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항복한 백제 왕자 융의 얼굴에 침을 맽고 모욕을 주는 대목입니다. 사비성을 함락하는대 있어 가장 먼저 성문을 열고 나당연합군에
내응한 이가 부여융이었습니다. 오히려 상을 주는것이 마땅한대 침을 주는 모욕감을 줍니다.
8월 2일에 주연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정방(定方)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隆)은 마루 아래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의자왕이 항복한 후, 의자왕을 단 아래에 앉혀서 계집처럼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항복한 좌평등, 여러 신하들 모두 울었다는 대목입니다. 항복한 적장들 조차 이 장면을 보고 분노를 삭혔다는 뜻입니다. 분명 이자리에는 흑치상지 같은 백제 부흥군 핵심인물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고 탈출해 부흥운동을 이끌었을 것입니다.
정방이 포로를 바치니 고종[上]이 꾸짖고는 용서하였다.
왕이 병으로 죽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상례(喪禮)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이 포로로 압송되어 험한 바닷길을 건너 당나라에 도착하자, 당나라 황제인 고종은 소정방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며 꾸짓습니다. 적장을 왕으로써 대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곧장 병사했다는 내용을 볼때, 배 안에서도 그의 대우는 매우 끔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포로로써 포박된채, 수개월을 배안 감옥에 갇혀지냈으니까요.) 즉, 의자왕을 포로로 압송해 온것은 당나라황제의 명령이 아니라, 소정방의 개인적 결정이었고, 이러한 결정에는 김춘추와 김법민에 의한 신라인들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신라가 단순히 백제를 국가를 구하기 위한 사명감만으로 백제를 멸망했다고 보았을때, 오랫동안 신라를 위협했던 고구려와 비교해
보는것도 재밌겠네요.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적 등이 이를 패배시키고,
200여 리를 쫓아와서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들이 이어졌다. 글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밑에
이르니, [이]적의 군대가 뒤를 이어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흰 기를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이]적이 예로써 접대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구려에서 보장왕은 오히려 예로써 접대하고 대접하였다고 나옵니다. 백제와는 상당히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당나라로써는
당태종 이세민에게 크나큰 치욕을 준 나라인 고구려의 항복한 왕을 예로써 접대하지만, 신라는 정 반대로 자신의 딸을
죽인 나라이기 때문에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고 계집종처럼 부리는 모욕을 준것이죠. 그래서 항복한 백제 장수들 조차도
모두 눈물을 쏟으며 후회하고 복수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당나라와 함께 정벌을 했기 때문에 신라가 이들 항복한 왕에게 대우를 해준 왕건의 경우와는 상황자체가
다르니 벼슬을 내려준다거나 후한 상을 준다거나 할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적어도, 백제왕자의 얼굴에 침을뱉고,
소정방이 계집처럼 술을 따르는 의자왕을 보고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리지 않고 오히려 같이 즐겼으며, 백제 백성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백제침공을 한 검일을 산채로 사지를 찢어죽이고, 의자왕이 당나라로 압송되었을때도 소정방으로 하여금 포박을 풀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심어주었다면?... 과연 그것이 국가를 위한 행동이라고 보이십니까?
이러한 멸망후 사후수습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백제 부흥군은 신라에 저항하였고,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에 붙어 당나라에 저항
하였죠. 사후 수습만 잘정리하고 잘, 처리하였다면 고구려 부흥군을 포용한것처럼 백제부흥군을 신라가 포용하여 당나라와의
전투에 유용하게 활용할수도 있었을텐대, 개인적 복수심이 그러한 것들을 그르치게 만든것입니다.
첫댓글 의자왕이 당의 내지로 끌려가는 데 있어 신라의 입김이 거셌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의자왕 처리문제는 신라에게 줬음 하는 것이 태종무열왕의 바람이었을 것이나, 당시 전쟁의 주력군은 분명 당이었기 때문에 의자왕 등의 처리에 대한 권한은 강대국이었던 당에게 있었지요. 게다가 당은 백제의 완전한 멸망이 아닌 친당 정권 수립이 목적이었으므로 당에 적대적이었던 의자왕 정권을 전복시키고 얼마 안 있어 옛 백제 땅에 부여융을 필두로 하는 친당정권을 수립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이 보장태왕을 예로 대접한 것은 당이 그를 대당강경파인 연개소문 정권의 허수아비로 봄에 따라 그저 연개소문 말에 따른 죄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료에도 나오지요.
당나라 소정방이 의자왕을 압송하는대 신라의 영향력이 크진 않았을 것이라는 明治好太王 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 부분은 앞뒤 정황상 제가 잘못생각한거 같군요. 죄송합니다.
고구려나 백제의 왕이나 왕족 또는 귀족관리들이 나름대로 당나라에서 대우를 받고 지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당시 고구려 왕족의 후예들, 연개소문의 아들과 손자등 흑치상지와 백제왕녀의 묘비문에서 그들은 이미 당나라에서 나름대로 중요관직이나 벼슬살이를 하면서 지냇던 것으로 보입니다...당나라라는 나라 자체가 비교적 개방적인 정책을 쓴 나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백제사랑님 백제부흥군이 신라에 저항하고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에 붙어 당나라에 저항 그것은 개인적 복수심이 (즉 무열왕을 지칭한듯?) 그르치게 만들었다고 단정하시는데 한마디로 역사공부가 전혀안된 무지의 소치라고 꾸중좀 해야 하겠습니다..백제 부흥군의 격렬한 저항이 김춘추의 개인적 원한과 관계가 되는지 질문을 하시든지?..아니면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라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에 대해 동의를 얻든지 반론을 얻어 배우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르겠지요..본문 마지막 부분이 잘못된 님의 결론이라는 것은 신라군에 투항항 좌평 충상과 상영이 백제부흥군 토벌에 앞장선다는 것입니다..
아~ 님의 글을 자세히 읽어보니 오히려 본인이 경솔했습니다...항복한 의자왕을 푸대접해서 백제 부흥군들이 더욱 악착같이 저항을 한 것이다?..재미있는 발상이며 그렇게 유추를 하니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그런 유추를 가지고 한번 생각 좀 많이 해볼 여지는 있다고 보여지는군요...^^*
님께서 무슨말씀하시는지 알겠고, 당나라에 백제나 고구려의 귀족들이 어느정도 대우를 받은것도 압니다. 제 주장의 핵심은 그게 아닌거 같은대요?.... 제가 당나라에서 백제관리가 고구려관리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고 쓴 내용은 어디에도 없는거 같습니다만...
저 역시 백제귀족이나 왕족들이 당에서 높은 관직에 오른 사실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개방적인 나라가 왜 유독, 의자왕에게는 술시중을 들게 하는 치욕감을 주고, 험한 바닷길을 가는대도 포박을 풀지 않고 포로로써 취급을 받았는지가.. 의문점이라는 것입니다. 고구려처럼 당에게 크게 맞선 기록도 없음에도 불구하고요., 또한 백제 왕족중 부여융과 그 후손 이외에 다른 왕족들에 대해 당에서의 역활이 미미하고요.(같이 당에 끌려간 부여효,부여태,부여연 등등..의 행적이 묘연하다는 점입니다.)
일단 지난 10월 17일 역사스페셜에 방영된 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태비의 귀환이라는 내용을 한번 보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의자왕을 술시중 들게 하는 것과 당나라의 개방적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죠..전쟁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나라 정책과는 별개의 상황이지요..그것은 무열왕 원한에 대한 보복성이라 보여지는게 일반적인 견해라고 생각됩니다
소호님 의견에 저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고요. 술시중이나 이런건 정말 무열왕 개인의 보복성 일환이라고 저 역시 주장하는 바입니다.(그래서 개방적인 당나라가 그러한 행동을 한것이 아니라 김춘추가 그렇게 부추겼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즉, 그러한 행동이 한나라의 왕으로써 응당 옳았느냐는 점이 제 의견이 핵심이기도 하고요. 저는 당나라가 백제왕들을 차별했다고 쓴 부분이 없는대.. 오해를 하신거 같습니다. 또한 역사스폐셜에 나오는 부여태비라는거 저 역시 봤습니다.
다만, 백제 왕족중, 부여융과 그의 후손들에 대해선 정말 높은 대우를 받지만, 그 외에 같이 당나라에 항복했던 태자 효나 연같은 나머지 왕들의 행방이 묘연한 부분에 대해선 조금의 의문점이 갖는다는 것입니다. 부여태비도 부여융의 손녀입니다.
생각해보니, 백제 태자나 왕자들의 행보에 대해서는 부여융만이 당나라에 항복해 높은 대우를 받았지만, 부여태는 사비성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항복했고, 부여효는 의자왕과 함께 웅진성으로 도망가, 후일을 도모하려 했던 행동등이 있어 나름 당나라에 저항했다는 괘씸죄를 적용받아 대우를 못받은 것 같군요. 부여융과 그 후손들만 당나라에서 높은 작위와 관직을 받았던 의문점이 조금 풀리는거 같긴 합니다.
고종이 꾸짖은 것은 소정방이 아니라 의자왕입니다. 고종은 의자왕의 행동을 책망한 것이지요
이도형님 지적이 옳습니다. 당고종이 꾸짖은 대상은 의자왕입니다. <구당서> 의 기록을 보면 더 명확합니다.
虜<義慈>及太子<隆>·小王<孝演>·僞將五十八人等送於京師, 上責而宥之.
(의자 및 태자 융(隆)과 소왕 효연(孝演) 그리고 위장(僞將) 59명을 포로로 잡아 경사로 보내자 상(당고종)이 그들을 꾸짖고는 용서하여 주었다)
패한 나라의 왕을 꾸짖고 용서하는 것은 중국사에서 자주 나오는 일종의 '의례' 처럼 생각됩니다.
그리고 당나라로부터 의자왕이 보장왕보다 '못한 대우' 를 받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의자왕이 죽었을 때 의자왕은 당에 의해 '위위경' 으로 추증됩니다. 그런데 보장왕이 죽었을 때에도 보장왕은 당에 의해 역시 '위위경' 으로 추증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의자왕이 보장왕보다 반드시 못한 대우를 받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의자왕을 결박했다는 기록 또한 없습니다. 아마 사극 연개소문이나 대조영 등에서 필요 이상 과장한 설정들을 그대로 믿고 계신 듯 합니다
네, 이도형님의 해석이 맞군요. 그리고 제 주장의 핵심은... 당나라에서 백제인들을 차별대우했다는게 절대 아닙니다... 왜 주장의 논점이 다른것으로 흘러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춘추에 의하여 백제인들이 고구려에 비해 차별대우를 심하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운동이 더 강하게 전개된것도 김춘추가 이러한 원인을 제공하여 주었기 떄문이다라는것이 제 견해입니다...
백제사랑님 가설은 일면 이해는 됩니다만 백제부흥군들의 활동에 있어서 사료를 꼼꼼히 살피시고 이런 가설을 했다면 좋은 가설이 될뻔 했습니다만 백제부흥군들의 활동에 있어서 후백제의 견훤처럼 그가 활동했을때의 명분과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는 것입니다..님이 말하는 가정처럼 그러한 명분이 존재하엿다면 복신과 도침의 내분이 그리 쉽게 일어낫다는 것도 님의 가설을 무력화 시키는 부분입니다.
이에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면서 무리들을 불러모으니 그 형세가 더욱 떨쳤다. 사람을 보내 인궤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듣건대 당나라[大唐]가 신라와 서약(誓約)하기를 백제인은 늙은이 젊은이를 묻지 않고 모두 죽인 연후에 우리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하니 [앉아서] 죽음을 받는 것이 어찌 싸워서 죽는 것만 같으랴? [이것이 우리가] 모여 스스로 굳게 지키는 까닭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정도면 충분한 명분이 된다고 보이는 대요?..
아니 사료이해가 그렇게 안되십니까??..님이 근거로 하고 있는 사료가 저번에도 님의 가설을 부정하는데 쓰일수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사료도 마찬가지 입니다..도침이 신라가 주체가 아닌 당나라가 주체이면서 백제인은 늙은이 젊은이를 묻지 않고 모두 죽인 연후에 우리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라고 말하면서 당나라의 그런 약속이 부당하다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요?
당나라의 그런 약속은 누가 정했겠습니까? 신라가 그렇게 해달라고 빈거 아닙니까?.. 그러니 백제입장에서는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더 커질수 밖에요., 또한 이때의 당나라의 주체는 신라 김인문이 보좌해주는 소정방이라고 보아집니다. 어디까지나 신라의 입김이 강했다고 볼수 밖에 없다고 사료됩니다. 덧붙여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할 때에 상지(常之)가 거느린 무리를 들어 항복하였다. 그런데 정방이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하자 상지가 두려워하여 좌우(左右)의 우두머리 10여인과 함께 달아나, 잡혔다가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산(任存山)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매, 열흘이 채 안 지나 합세하는 사람이 3만이나 되었다. <삼국사기> 흑치상지 열전입니다.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을 일으킨 원인이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 하였다는 대목까지 나옵니다. 이는, 백제 멸망이후 당나라와 신라가 사후처리를 크게 잘못했다는 것이죠.
백제사랑님은 자신이 여태껏 주장하신 부분을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번복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자신의 글에 책임있는 내용을 쓰라고 한것입니다..일전에 바로 이곳 백제방에서 님께서 직접 작성한 170번 글에서 바로 댓글중 님의 글에서 웅진도독부 때문에 당나라 땅이었다고 주장했지요..그러면 그런짓은 당나라가 주체가 된 것 아닙니까??..이전에 그런 주장을 안하셨다면 물론 지금의 주장을 고려해 봄직도 하겠지요!
복신과 흑치상지의 사례에서 처럼 이들의 명분은 노략질과 늙은 의자왕에 대한 가혹한 처사, 백제의 왕위를 끊는점이 었습니다. 충분히 사료상에 나와 있는 대목이고, 추론해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당(소정방)이 그렇게 가혹하게 백제인들을 다루었던 것은 김춘추가 옆에서 더 부채질 했기 때문이 아닐지,...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의자왕이 당나라에 가고 나서부터는 그때서야 부여융에 의한 백제 정권이 세워지고, 백제인들을 대우해주죠. 그전까지는 백제인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다가 말이죠.
??? 소호금천씨님 대체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이렇게 과민반응하시는건지요? 전 당나라(소정방)가 당연히 주체로써 백제인들을 핍박한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그러한 행동들이 김춘추나 김인문등에 의해서 더 부추겨졌다고 추론되어진다고 했을텐대요??? 항상 제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대응하시는듯 합니다.
제가 과민반응으로 보여셨나요?..그렇다면 미안하군요..^^*..다만 님의 토론된 댓글을 천천히 살펴보시고 님의 논리에 일관성이 있는 것인지?..아닌지? 그것만 이해하시면 됩니다..제가 님에게 과민반을을 보일 하등의 이유도 없습니다..계속 님께서 반론을 연장시키기 때문입니다..그러한 행동들이 김춘추나 김인문등에 의해서 더 부추겨졌다고 추론된다는 논리가 님의 논리를 부정하는 앞서 제가 지적한 이곳 게시판 170번 게시물의 댓글이지요..170번 댓글에서 그부분에 대해 님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호님의 말씀은 곧, 170번 게시물 댓글에서 제가 의자왕을 핍박케 한 주체는 당나라라고 제가 주장했는대, 여기에 와선 오히려 신라가 그러한 행동을 했다... 라고 쓴건가요?.. 제가 이해력이 좀 부족한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