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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경언어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친밀함
제16강 성령님께 민감하여 순종하는 삶
요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주일 낮예배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의 삶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자원으로 삶인 것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믿음에 의한 삶 전적으로 은혜에 의한 삶 전적으로 십자가에 의한 삶 전적으로 믿음에 의한 삶입니다.
그 중에서 은혜에 의한 삶 십자가에 의한 삶을 지난 주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에 의한 삶은 얼마전에 화요모임을 통해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넘어가려고 합니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라고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부터는 한달 정도 성령에 의한 삶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몇 달 전에 말씀과 성령의 조화에 대해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미 살펴본 부분은 놔두고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의 요소 주에 핵심적인 요소가 성령에 의한 삶인데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신앙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한 삶인데 성령에 의한 삶을 크게 두 부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에 민감하여 성령께 순종하는 삶 또 하나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는 삶입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성령께 민감해서 순종하는 삶을 나누겠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과 관련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성령께 민감해서 우리가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길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 알리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조명이라고 합니다.
다음주에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는 것인데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기 위해서 이제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능력을 부으시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성령께 민감한 삶을 삳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목적과 길을 계시하시는데 이것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필수입니다.
그 부분을 보면 우리 신앙이 전반적으로 성령님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성령이 반드시 필수적인분임을 볼 수 있습니다.
1.구원을 위해서 성령의 조명이 필수입니다.
우리중 일부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는 믿음을 성경에 나와있는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진리들을 지식적으로 동의하고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면 그것이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 즉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그런 종류의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지식적으로 믿고 받아들이니까 그 고백을 기뻐하시면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리라고 말씀하심. 이 부분을 보면서 구원받는 믿음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베드로의 고백은 그런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이론적으로 지식적으로 받아들인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아직 신약성경이 쓰여지기 전이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에 보면 너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믿어라는 말은 머리(mind)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 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어 할 때 마음은 가슴(heart)을 말합니다. 머리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의 지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믿으려면 당연히 성령의 조명이 필수입니다.
뿐만아니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사도바울이 직접 복음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 구절입니다.
고전4장 5-6절에 나옵니다.
거기서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예수의 주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추리라 하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추셨느니라.
고전1장에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진리나 사실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복음이었습니다. 그분이 능력이요 지혜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되 단순히 구세주로 뿐만아니라 주인으로 전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성경을 보면 이렇게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태초에 어두운 가운데 빛이 비추라 하신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깨닫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빛을 비추셔서 바꿔말하면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 눈을 밝히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성경적인 지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 예수님을 내 죄의 용서와 구원을 위해 내 삶의 구원주로 영접하는 것을 성경이 말하는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위해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비추십니다. 그것이 없이는 구원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가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을 위해 성령은 필수입니다.
2.우리의 성화를 위해서도 성령님은 필수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펴보면서 이 부분을 다루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화를 거룩한 삶을 하고 안하고에 둡니다. 예를 들면 내가 술을 끊고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물론 담배를 끊고 술을 끊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거룩함과 성화의 열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성화를 거룩함을 그렇게 이해했을 때 우리보다 많은 규정들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잘 지켰기 때문에 자기들은 누구보다 의롭고 거룩하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작 그들을 회칠한 무덤으로 비유했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인 모양을 누구보다 잘 가추고 있으되 그 속에는 온갖 탐심과 이것이 우상상배입니다. 세상사랑 이것은 영적인 간음입니다. 시기 질투 간음 미움 다툼 거짓 음란이 너무너무 가득한 온갖 죽은 사람의 썩은 것과 뼈가 가득한 것처럼 되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화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화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바꿔 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 자신과 목적들과 길들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더욱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핵심적으로 말해주는 구절이 고후3:18절입니다.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사도바울이 성화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를 말합니다.
하나씩 보십시오.
먼저 주의 영광을 본다는 말은 주의 선함을 본다는 것입니다. 주의 선함을 본다는 말은 성령께서 주의 성품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출3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갈 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17절에 보면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 너를 알기 때문에 너의 하는 말은 내가 듣겠다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18절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세요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19절에서 하나님이 내가 나의 모든 선함으로 네 앞에 지나가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내 얼굴을 보고 살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너를 바위 틈에 감추었다가 내 뒷모습을 보게 하겠다고 하시고 출34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하십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합니다.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주의 성품을 본다는 말인데 주의 성품을 본다는 말은 하나님 그 분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은혜로운 분 자비로운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고전 3장으로 가면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볼 때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화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변화될 때 사용했던 단어와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영광에서 더욱 큰 영광으로 주님의 형상을 닮아 우리가 점점 더 변화되게 되는데 그것이 주의 영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번 컨퍼런스 동안에 개인적으로 귀한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나누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 목표를 더욱 뚜렷하게 보이셨습니다.
컨퍼런스 전에 우리 지체들이 다윗의 장막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이 있는데 그대로 하셨어요.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셧는데.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인데요. 스캇 언더우드가 왔을 때 둘째날 낮시간에 경배와 찬양을 하면서 스판테네송이라고 각자가 하나님께 경배함으로 나아가는 시간인데 제가 앉아서 주님을 바라보며 구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용암과 같음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전에 일어났던 몇 가지 사건들을 보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며 제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기뻐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보이시더라구요.
그러면서 다시한번 하나님께서 저의 아빠가 되시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어요. 너무너무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구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은 제 노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로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안식이 있고 그러면서 제가 잠잠이 있고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원하는 것 같아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전날 다른 형제에게 나에 대해 주셨던 환상에 대해서 생각나게 하시면서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경구절을 주시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이시는데 감격 가운데서 눈물만 흘리는 것 같더라구요,
제가 자주 인용하는 부분인데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고 하는 죠나단 에드워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737년 내 건강을 위해 숲속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말에서 내려 내가 늘 하던 대로 한적에 곳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에 나는 특이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다. 이 영광을 보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비추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놀랍고 위대하고 충만하고 순결하고 달콤한 은혜와 사랑, 온유하고 겸손한 낮아지심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그처럼 고요하고 달콤하게 나타났던 이 은혜는 하늘보다 크게 보였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여서 모든 생각과 관념을 다 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탁월하게 보였는데 내가 판단하기로는 거의 한시간 가량 그런 일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 시간 내내 거의 대부분을 나는 눈물의 홍수에 빠져있었고 흐느껴 울었다. 내 영혼이 텅 비어 기절하여 먼지 속에 누워 그리스도로만 충만하여지고 거룩하고 순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은 격렬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것을 달리 표현한 길이 없다. 그를 섬기고 따르고 그저 완전하고 거룩하게 되고 신적이고 천상적인 순결함으로 깨끗하게 되고 싶은 영혼의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다른 때도 여러번 바로 그런 성질에 속하는 것을 많이 체험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것은 똑같은 효과를 발하였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길들을 계시해주실 때 우리 중심에서부터 그분을 사랑하기 원하는 열망, 중심에서부터 그분을 닮기 원하는 열망, 중심에서부터 그분처럼 되기를 원하는 열망이 샘솟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표면적으로만 바꾸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중심에서부터 그분처럼 되기를 원하는 열망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령께서 우리를 주님의 모습으로 더욱 바꾸어 가십니다.
성화요?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특별히 성령님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길들을 비추시는 일들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3.우리의 예배를 위해서도 성령님의 역사는 필수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주일날 단정한 옷입고 와서 젊잖게 앉아서 순서 잘 마치고 나서 돌아가면 예배를 잘 드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려면 의식과 본질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의식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본질인 인격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알고 존재를 다해 그분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시대에 이사야 시대에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의식이 헌신이 아무리 많을지 몰라도 그 본질이 없으면 이런 의식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배도 의식입니다.
그래서 예배순서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서 본질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24:6절에 보면 예배에 대해서 말하면서 예배를 구하여 나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마음껏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하여 기뻐하며 중심에서부터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의중과 목적을 알기를 열망하고 주님이 의도하신 바를 깨달아 우리도 그 가운데 동참하기를 원하여 주님을 구하여 나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모델이 하늘의 예배입니다.
계4장 5장에 나옵니다.
거기보면 4장에는 하나님의 보좌 5장에는 예수님의 보좌가 있고 스랍들이 날며 찬양하면 24장로들과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한 목소리로 큰 물소리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하나님께 중심에서부터 경배와 예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스랍들이 날개 여섯인데 온 몸에 눈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불쌍한 장로들 보십시오. 앉아서 면류관을 쓰고 있다가 스랍들이 찬양하면 면류관을 벗어던지고 엎드려 경배합니다. 예배가 끝나면 일어나 털털 털고 앉아서 쓰고 앉아 있습니다. 또 곧바로 경배하면 벗어던지고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러다 예배 끝나면 일어나 앉습니다. 곧바로 예배가 시작하면 벗어던지고 엎드립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예배받으려고 만든 로봇같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가 아까 뭐라고 말씀드렸느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되 거울을 보듯 희미하게 봅니다. 이땅에서는요.
당시 거울은 구리거울이라 형체만 보이지 정확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땅에 육신의 모양을 가진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고 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세 같은 경우도 가리고 뒷모습만 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적인 용어로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죠나단 에드워드같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 선함을 우리에게 비추실 때 그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 실실하심 은혜로우심, 자비하심 은혜롭고 거룩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여로와 이래되시고 여호와 샬롬되시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이 그분의 성하심과 신실하심과 사랑 등을 일부만 비추셔도 진짜 그 앞에서 경배하기만을 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만을 원하고 하나님처럼 되기만을 원하는 열망이 샘솟게 됩니다.
그런데 스랍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얼굴과 얼굴을 향하여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날에는 이렇게 예배할 것입니다. 24장로들도 그렇고요.
그러니까 그들이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간절한 열망이며 특권이며 기쁨이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히브리서 12장에 볼 때에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무엇이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하고 말합니다.
거기 보면 합당하게 섬길지니라는 말은 예배할지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계시하셔야 합니다.
누구처럼? 그러니까 아까 34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니까 모세가 그 앞에 납작 엎드려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배하며 하나님 우리 가운데 거하소서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이 백성을 용서하소서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라고 주님을 사모하며 열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모하여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온전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성령께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길들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시는 것이 필수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빌립보서 3장 3절에서 참된 성도의 한 가지 특징을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봉사한다는 말이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며라고 대부분의 영어성경을 번역합니다.
제 이야기 잘 들으십시오.
주일날 빼먹지 않고 우리들이 점잖게 앉아서 예배드릴지 몰라고 성령님의 도움을 통한 하나님과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예배가 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정성을 쏟았을지 몰라도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기를 너희는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말씀하시며 사람의 교훈으로 교훈을 삼아사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라고 말합니다.
모양뿐인 본질인 하나님과 만남이 없는 예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로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종교적인 순서나 의식을 하고 돌아가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예배는 성경에서 정확하게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가 되려면 성령님의 역사는 필수입니다.
4.우리의 믿음을 위해서도 성령님의 역사는 필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온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을 지식적으로 믿고 동의하면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믿음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데 너희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약2장은 참된 믿음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그대로 지식적으로 동의한다고 그래서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실제로 귀신들은 영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진리를 압니다. 얼마나 확실하게 믿는냐면 확실히 믿기 때문에 그 앞에 벌벌 떨만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을 가져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틀림없이 일점일획 어김없이 다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전혀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뭐냐?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을 우리 전 존재를 다해 신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위해서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비추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분을 믿을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다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 말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에 동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치고 필요가 생기면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사람을 의지하고 돈을 의지합니다. 그러니까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전혀 안믿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성경적인 진리에 동의할지 몰라도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전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분을 전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은 고아가 2000명이 넘었는데 아무 에게도 자기의 필요를 알리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심지어 그 다음날 양식이 없어도 저녁시간에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식사 시간을 10분도 어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왜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성령을 통해서 고아의 아버지되심을 계시해주셨고 그리고 자기 자녀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기뻐하시는 능력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을 계시해주셨기 때문에 필요가 있을 때마다 고아들의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자녀들의 필요를 구하고 그분이 채워주시도록 믿음으로 신뢰할 수 있었고 그처럼 믿음으로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 전혀 기대하지 않는 방법으로 자녀들의 필요를 어김없이 채워주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믿고 동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필수입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믿음이 불가능합니다.
6.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서도 성령의 조명은 필수입니다.
예를 들면 기도의 응답을 보십시다.
오늘날 왜 많은 성도들이 기도의 응답을 못받는 줄 아십니까?
그래서 못받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할 때 먼저 자기들이 계획을 세웁니다.
조금 성숙했다는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되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합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합니다. 때로는 금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설득시켜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것을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기도응답을 못받습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표를 세워놓고 그것을 도와달라고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 계획 내 주장 내가 선호하는 바를 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지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여 내 삶을 조정해서 그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동참할 때 그때 여러분은 놀라운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내 삶을 조정해서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려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목적과 행하심을 여러분에게 보이지 않고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된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헌신된 사람들도 뭐라고 하느냐면 하나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세요 제가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되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기 위한 계획을 세워놓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의도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내 삶을 조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뒷받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드린 데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왜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거기에 동참하기 보다는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계획을 세워놓고 하나님을 설득하여 그것을 하게 하시도록 하려고하니까 전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7.우리의 사역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자신과 하나님의 목적과 길을 계시해주시도록 성령을 통해
이번 컨퍼런스 동안에도 여러번 나왔습니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의 사역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 중에서 누구 하나 자기 계획을 세워놓고 하나님을 설득하여 사역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길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목적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목적 뿐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방법까지 계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들 들면, 기드온을 통해서 미디안을 물리친 것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먼저 나서서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시대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민족을 구원하시려나 보다. 여러분 보여라. 우리 이렇게 해보자.
아닙니다. 그렇게 했다면 기드온은 아무 것도 못했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전혀 따라갈 엄두도 안나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그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드온 자신은 할 수 없기에 믿음으로 참여했습니다.
이제 기드온에게 너 알아서 한번 해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군대를 모으는 일 군대를 선택하는 일 다시 돌려 보내기 위해서 시험하는 방법 등등을 모두 지시하셨습니다.
300명만 남았고 이들에게도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을 지시하십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순종해 갈 때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여러분 여기를 보십시오.
제가 이번 주간에도 지난 주간에도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포도나무의 사역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어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하나님이 행하심을 보고 모든 삶으로 동참하는 것.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지 30년 40년 50년 되었어도 우리나라 기독교인이 850만이 있고 집사님 장로님 권사님이 있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기도 금식 십일조 등등을 신실하게 잘함으로 교회에서 신앙좋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많을지 몰라도 이런 것들은 자체가 본질이 아니고 수단입니다.
그런데 정작 성경에서 말하는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그리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 온 삶으로 동참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 이런 용어 자체가 낯섭니다.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 이런 이야기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습닏.
그만큼 우리의 신앙은 껍데기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 속에 실제가 없습니다. 모양 뿐입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우리 사역을 위해서도 성령님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8.회개를 위해서도 성령님은 조명은 필수입니다.
회개를 위해서도 성령님의 비추심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규례와 규칙에 있어서는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일은 성령이 없이도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회사사정상 접대도 해야 하고 그래서 토요일 밤에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주일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머리는 띵하지 명색이 집사인데 술취해서 교회에 가려고 하는데 죄책감도 들고 그래서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경배와 찬양 시간에도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하고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술 안먹나요. 또 먹습니다. 그리고 또 용서해주세요 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 이야기 잘 들으세요.
그렇게 해서 회개한다고 회개가 전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회개는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황에서 세상사랑은 영적인 간음이요 탐심이요 우상숭배라고 하는데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한 두가지 회개했다고 그것이 회개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근본적인 회개는 아닙니다.
근본적인 회개가 언제 일어나는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비추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 길을 비추셔야 그 앞에 드러난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강팍하고 자기 언어가 포악하고 자기 마음이 냉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자기는 형식뿐이고 실제가 전혀 없고 중심에서부터 교만하고 사람들을 의식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얼마나 자기 입술에 거짓이 가득하고 자기 행실이 사람들에 잘 보여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하지 않고는 자신의 모습을 절대로 알 수 없고 회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이 우리에게 비추어져야 그리고 그 앞에 드러난 우리의 모습이 보여야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을 알기를 그래서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가기를 하나님 그분이 내 목표와 목적으로서 하나님 그분을 더 알기로 추구할 때 우리 마음의 눈이 밝혀지고 그때에 성령의 조명이 있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비추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없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어떻게 성령님의 조명이 필수인가를 나누었습니다.
조명이라는 말은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 자신과 목적과 길들을 우리에게 비추어주시는 것이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어떻게 필수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없이는 우리 신앙에 가능한 것이 한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님이 없이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종교만 남습니다.
우리 신앙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전적으로 오직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하나님이 자기를 새언약의 일꾼되기에 만족하셨다고 말씀하면서 새언약은 문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특별히 신약시대에는 성령에 의한 삶이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더 성령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의 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들과 성도들의 삶은 성령님은 축도에만 나옵니다.
그러니 무슨 승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원에 의한 삶인데 그 한 부분은 오직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에 의한 삶의 한 부분은 오직 성령께 민감하여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어떻게 우리에게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가?
어떻게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으시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