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민명자
툭, 시 한 구절이 가슴을 치고 들어온다. 문우 모임 단톡방에 회원이 자작시 한 편을 올렸다. 제목이 먼저 눈길을 잡는다. <의문사>다. 의문사? 누가 비명횡사라도 한 걸까. 심장 쿵, 요즘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불길한 일들이 잽싸게 꼬리를 물며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붉은 홑동백
한 송이가 툭
지나는 바람이
잡아 흔들지도 않았는데
직박구리가 가지에 앉아
다그치지도 않았는데
치열하게 싸운
생채기라도 남기든지
봄 가뭄 갈증에
시들기라도 하든지
때깔도 바래지 않은
곱다란 꽃잎 그대로
붉은 홑동백한
한 송이가 툭
-박찬정, 〈의문사〉 전문
아, 동백, 너였구나. 나의 섣부른 유추가 속견이었다. 역시 시인의 눈은 다르다. 이 시에서 방점은 "홀동백"과 "툭”에 찍힌다. 속절없는 낙화를, 생명과 죽음을, "툭"이라는 한 마디가 전부 끌어안았다. 마치 한세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꽃다운 어린 생명이 가듯, 툭, "곱다란 꽃잎 그대로”라서 더 처연하다.
붉은 동백도 하얀 목련도 송이가 클수록 떨어질 땐 온몸을 던진다. 살겠다고 버둥대지 않고 무심한 척 떨어진다. 그래도 저 낙화에는 겉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치열한 생의 아우성이 감춰져 있겠지.
시인은 화두를 던진다. 왜, 저 동백은 목을 꺾고 지상으로 낙하해야 하는가. 왜, 꽃잎이 져야만 씨앗을 남길 수 있는가. 왜,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가.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은 생의 진리에 대한 의문이자 안타까움이다. 만일 새로 오는 탄생만 있고 스러짐이 없다면 온 세상은 포화 팽창, 카오스 세계를 벗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렇다 해도 생성과 소멸을 자연의 순리로만 보기엔 신의 섭리로만 보기엔, 무조건 순응하기엔, 모든 죽음은 "의문사다. 한순간에 툭, 떠나가는 생명은 슬프다.
내가 아주 어릴 적,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안방 아랫목에 할아버지가 누워계셨다. 며칠 시름시름 노환 중이다가 갑자기 혼미해지신 할아버지, 가래가 걸린 듯 '갈그랑갈그랑' 몰아쉬는 숨소리가 어린 내 눈에도 무척 힘겨워 보였다. 친척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셔서 그 곁을 지키고 계셨다. 병원 이용이 여의치 않던 시절,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엄마가 집안 어르신을 모셔 온 거다. 할머니와 엄마랑 나도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도 시장에 돈벌이하러 나가셨던 것 같다. 모두 숨죽이며 할아버지를 지켜보고 있던 그 순간, 할아버지 머리가 갑자기 베개 한쪽으로 툭, 기울었다. 숨소리도 멎었다.
이내 할아버지 머리를 반듯하게 누인 어르신이 엄마에게 창호지 한 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한옥에 살 때라서 여닫이와 미닫이문에 바르는 창호지는 늘 있었다. 엄마가 다락방에서 꺼내온 한지를 어르신이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잘라 가늘게 찢더니 할아버지 코앞에 바짝 닿을 듯 댔다. 한지는 미동도 없었다. "돌아가셨네." 임종 확인이다. 할아버지 숨이 있으면 그 숨결에 한지가 흔들리는데 그렇지 않으니 돌아가신 거란다. "오래 고생 안 하시고 편히 가셨네, 복받으신 분이네." 할아버지는 그렇게 툭, 한순간에 가셨다. 어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고 겪은 죽음이었다.
그 후 대청 한쪽에는 하얀 광목을 두른 상청이 모셔졌다. 엄마는 조석으로 그 제상에 진지를 올리고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에는 곡비(哭婢)처럼 '아이고, 아이고' 곡 소리를 냈다. 그렇게 삼년상이 끝날 무렵, 이번엔 할머니가 가셨다. 이어 아버지가, 어머니가, 그렇게 가셨다. 소리 없이 툭.
툭, 가벼운 듯 무거운 단어다. 그게 어디 죽음뿐이겠는가. 누군가 가볍게 툭, 한 마디 던진다. 정말 가벼운 것인지 가벼움을 포장한 심중의 말인지는 알 길 없다. 그 의도가 어떠하든, 누군가는 그 툭, 한 마디가 목에 가시처럼 걸리거나 비수처럼 가슴 깊이 상처를 내기도 한다. 툭, 던지는 사람 탓인가, 받는 사람 탓인가. 툭, 한번 치고 들어오는 것도 버거운데 툭툭, 툭툭톡, 어쩌란 말이냐.
툭, 늘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다. 우연인 척 필연인 척, 제 맘대로 불시에 날아와 크고 작은 불씨를 지핀다. 어느 날, 친구가 돌부리에 툭 걸려 넘어졌다. 벌떡 일어나고 싶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운 내리막길에서 큰 대자(大字)로 엎어진 거다. 얼굴이 으깨져 피가 나고 팔다리도 성치 않았다. 온몸에 푸른 멍을 단 그녀, 병원 출입 외에는 한동안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고빗길에서도 수없이 돌부리에 걸린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있을 만큼만 넘어지면 좋겠다.
툭, 떨어졌다. 아차 하는 순간에 귀한 도자기를 손에서 툭 놓쳤다. 바닥에서 박살이 났다. 어쩌나. 한번 깨어진 것은 다시 붙이기 어렵다. 겨우 이어 붙여도 흔적이 남기 마련, 더욱이 도자기임에랴. 본래 면목 회복은 불가능하다. 갓끈 떨어진 선비 신세가 이처럼 누추할까.
툭 끊어졌다. 너와 나, 인연의 끈질기기도 하지만 툭하면 잘 끊어진다. 무엇이 그 끈을 자르는 가위 노릇을 할까. 한번 끊어진 끈은 다시 이어도 꿰맨 생채기가 남는다. 그나마 그 끈을 다시 이을 바늘과 실은 어디 있을까. 있기나 한 걸까. 의문사뿐 아니라, 인생은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툭, 손바닥만 한 플라타너스 잎새 하나가 어미 몸에서 떨어져 허공을 맴돌다가 내 어깨를 툭 건드리며 지나간다. 자네, 어디로 가는가? 자네도 나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길 따라 흔들리며 가야겠지. 나는 꿈꾼다. 무심한 길거리에서 어느 날 문득 내 어깨를 툭 치는 이, 그가 오래전 먼 길 떠난 옛 벗이라면, 그가 활짝 핀 꽃 같은 얼굴로 다시 살아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많이 힘들지? 험한 세상 어깨동무하고 같이 가자." 그렇게 말해 준다면, 힘 불끈 더덩실 춤이라도 추련만.
툭, 그 손길의 임자가 절망을 내치는 희망의 여신이라면, 불운을 내치는 행운의 여신이라면, 그 또한 좋으리. 그런 툭이라면 백 번이라도 꾸벅 받으련만. 만물 소생의 기운을 품고 오는 정령들이여, 어서어서 달려오시게나. 지친 대지의 등 줄기를 툭툭, 일으켜 주시게나․ 툭, 툭, 툭툭, 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