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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능 조사의 핵심사상이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 무념이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집착하지 않음을 의미하고, 무상이란 상을 짓
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음을 의마하고, 무주라는 것은 대상에 집착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 결국 '집착하지 않으면' 자신이 부처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생각이 생각이 아님을 알고, 의도가 의도가 아님을 알라. 그러면 집착에서 벗어나리라.'
* "해탈에도 매이지 말고, 해탈이 아닌 것에도 매달리지 말라"
六祖壇經의 禪 思想과 實踐
설 우
1. 序言
돈황본 육조단경의 제목은 「남종 돈교 최상대승 마하반야바라밀경 육조혜능대사어소주대범사 시법단경 일권 南宗 頓敎 最上大乘 摩訶般若波羅蜜經 六祖慧能大師於韶州大梵寺 施法壇經 一卷」이다.
육조단경은 能祖師의 선 사상과 실천 수행에 관한 설법집으로 제자들에 의해 기록된 어록이다.
혜능(638~731)의 속성은 노(盧)씨이고, 그의 본적에 대해서는 왕유(王維)의 육조 能禪師의 비명에도 언급이 없으며 단지 모군 모현 사람이라고만 말하였다.
이렇게 중요한 인물의 본적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왕유는 「 법에는 중앙과 변방이 없어 중국 본토에만 머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불법이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지역적 구별에 상관하지 않으므로 그가 어느 곳의 인물인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미루어 볼 때 혜능은 일반사람이 경시하는 하천한 변방사람임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돈황본 단경에는 본관은 범양(현 북경 탁현)으로 부친 노행도와 모친 이씨 사이에서 당(唐) 정관 12년 (638년) 2월 8일 자시 영남 신주현 (嶺南 新州縣, 현 광동성 신흥현 (廣東省 新興縣)) 에서 늦둥이 외아들로 태어났다. 범양에서 관리를 지내고 있던 그의 부친이 백학이 쌍을 지어 날고 방안에 향기가 가득한 태몽을 꾸었다고 육조대사연기외기에 기록되어 있다. 혜능이 태어난 날 먼동이 틀 무렵 두 명의 스님이 찾아와 그의 부친에게 어제 밤 아이를 얻었을 터인즉 이름을 혜능(惠能)으로 지으라고 하고, 왜 그렇게 이름을 지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혜는 법을 베풀어 중생을 제도하고, 능은 불사를 능히 해낼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 후 어디론가 가버렸다. 혜능은 3살 때 부친이 별세하자 어머니를 따라 남해로 이사했고, 물려받은 재산도 전혀 없어 연세든 노모님을 모시고 가난에 찌든 소년가장으로서, 늘상 인생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고난스런 현재의 생활을 떠난 초연한 세계를 동경했을 것으로 [曹溪大師別傳]에는 전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 혜능이 처음 발심하게 된 결정심과 출가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자.
보리심을 발하여 출가할 때에는 가장 먼저 생사심을 해결하겠다는 굳은 결심과 일체 중생을 이고득락케 하고자 하는 보살의 서원과 원력으로 출발한다. 그리고는 바깥 세계와 나의 심신이 모두 인연으로 이룩된 거짓 존재일 뿐 그것을 주재하는 실체는 없다는 연기적 현상을 직시하는 믿음이 확실해야 한다.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서 쾌락의 유혹을 털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관이 먼저 바뀌어야 된다고 본다. 그 예로서 부처님의 출가가 그러했고 ,또한 달마에게 위법망구를 한 혜가의 단비(斷臂)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明나라 동기창(董其昌)의 용대별집(容臺別集) 1권 2에서 보듯이 집에 재산이 많이 있었으나 그것을 모두 흐르는 상수(湘水)에 내던져 버리고 말하기를 “나에게 번거로움을 일으키는 재물은 타인도 번거롭게 해서 안된다. 세상 사람은 금을 중히 여기나 나는 순간의 고요함을 사랑한다. 금이 많으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조용해지면 참된 성품이 나타난다. 도를 배우는 자는 우선 먼저 청빈함을 즐겨야 한다”고 한 방거사의 물욕을 멀리함이 그러했다.
여기서 노모님을 홀로 두고 출가를 결심하게 된 혜능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기 까지의 많은 고뇌의 아픔을 살펴야 한다. 이것이 上之上人의 진정한 발심이다. 이러한 발심이 있었기에 나무 파는 필부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언구에 마음눈이 열렸다. 이것이 의상스님의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이다.
삶의 가치관에 대한 확고부동한 정립 위에서 이루어지는 발심이 무엇보다도 수행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정리하면서 이번 동화사 담선법회에서 나에게 주어진 육조스님의 사상과 실천이라는 논제에 대해서 먼저 몇 가지 정리하고자 한다.
선의 뿌리는 당연히 인도에 있다. 그러나 중국 선종의 성립사를 살펴보면 인도의 선이 보리달마 이후 달마 - 혜가계의 선법을 계승한 능가종, 도신 - 홍인의 東山宗, 우두 법융의 牛頭宗 등 다양한 종파 활동이 펼쳐지면서 중국화를 모색하는 시기를 겪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육조 혜능스님에 와서 중국적 조사선 사상과 실천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선불교의 중국화를 이룩한 육조 혜능스님의 육조단경 사상을 살펴보면
첫째, 불성을 알아 연기법을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 초기경전에서도 <연기를 알면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본다 >고 했다.
두번째, 유전돈법(唯傳頓法)으로 점수를 배격하고 오직 돈오법만 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경에서 강조되는 불성사상과 돈오정신이다.
셋째, 정혜불이로 정혜가 한 몸인, 내외명철로 안팎이 사무쳐 밝아야 참된 견성의 경계라 했다.
넷째, 단경의 실천 수행인 무념위종으로 무념의 상태가 되어야 올바른 宗을 얻은 것이라 했다. 무념. 무상. 무주는 단경 전반에 걸쳐서 드러나고 있는 반야공 사상의 실천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섯째, 불오염수(不汚染修)로 물듦이 없이 닦는 것이 진정한 닦음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단경의 대의를 개괄적으로 요약하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고, 반야(般若)의 자연지(自然智)가 구족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면 곧 바로 돈오이기에 진여법계엔 무타무자인 참된 진아의 세계를 체득하므로 보살의 서원과 원력으로 회향할 수밖에 없는 자비의 삶이 실천된다.
2. 六祖壇經의 禪 思想
(1) 불성사상
불성이라는 말은 열반경(佛本涅槃經 卷二十一 高貴德王菩薩品 및 卷二十七 獅子吼菩薩品)에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의미를 풀어보면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며, 중생심의 본질적인 자성을 일러 불성이라 한다.
불성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말한다. 이 깨끗한 마음은 본래부터 중생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해서 중생 속에 무엇인가 감추어져 있다기보다는 중생 속에 부처의 작용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사물의 궁극적 이치를 직관하는 지혜의 안목으로 정의할 수 있다.
불성사상에 관해서 단경에서 살펴보면, 황매에 도착한 혜능이 오조 홍인대사를 친견하면서 나눈 문답 중에 선림에 널리 전해오고 있는 유명한 불성무남북(佛性無南北)이라는 선문답을 들어보자
『홍인화상이 혜능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온 자이며, 나에게 무엇을 구하고자 이렇게 찾아 왔느냐 (弘忍和尙 問慧能曰 汝何方人,來此山禮拜吾 汝今向吾邊 復求何物 ) 」
혜능이 대답하였다. 「제자는 영남에 사는 신주 백성으로 화상을 찾아 뵌 것은 다른 어떤 것도 구하는 바 없고 오직 부처가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홍인화상이 힐책하는 어조로 반문했다. 「너 같은 영남의 야만인이 어찌 감히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혜능이 답했다. 「사람에게는 남북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불성에야 어찌 남북의 분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야만인인 저와 화상의 신분은 비록 같지 않습니다만 불성에야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장경각발행 돈황본단경 3권 p.93 이하, 人卽有南北 佛性卽無南北 獦獠身與和尙不同 佛性有何差別 ) 』
혜능은 항상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라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혜능은 단경에서 「불종성(佛種性)의 이 법문을 비방하면 백겁만겁 천생토록 불종성을 끊는 것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에서 불종성의 원래 뜻은 우리 모두가 부처의 혈통을 갖춘 사람들로서 붓다의 가족(씨족)을 가리키므로 불종성은 부처의 혈통을 갖춘 사람들과 부처 일가를 이룬 것을 말한다.
단경에서 혜능은 「불성의 성질은 청정공적하다 」(장경각발행 돈황본단경 p.110 佛性常淸淨) 고 말한다.
불성의 공적한 성질에 대하여 혜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에게 법이 있는 데 이름도 글자도 없고 눈도 귀도 없으며 몸도 마음도 없고 말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며 머리도 꼬리도 없고 안과 밖과 중간도 없으며 오고 감도 없고 청. 황. 적. 백. 흑색도 아니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다」(曹溪大師別傳에서 我法有 無名無字 無眼無耳 無身無意 無言無示 無頭無尾 無內無外 亦無中間 不去不來 非淸黃赤白黑 非有非無 非因非果)라고 말한다.
또 「마음의 본성은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는 데 어떻게 청정공적하다고 부를 수 있는가. 다만 억지로 이름 지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마음의 본성이 청정하다>는 말은 마음이 본성으로서 청정하다라는 말이고, 무엇인가의 청정한 마음이 실체시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성으로서>라는 말은 본래적으로 또는 원래부터라는 의미이고, 청정하다는 말은 마음은 연기적 존재이고 그 본성은 공성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중생에게 청정한 불성이 있다>는 말은 중생과 여래가 본성이 공성(空性)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다는 의미를 지닐 뿐이지 불성이 불변의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 小川一乘 지음,고승학 옮김 불성사상, 서울 경서원 2002년 p.34)
그러므로 불성이 본래 청정하다는 말은 불성은 본래적으로도 연기공(緣起空)이다 라는 의미로 봐야한다. 또한 청정하다는 말은 연기적 존재이고, 그 본질은 공성이다 라는 의미이며, 불성은 공성이며, 공성이 바로 청정임을 알 수 있다.
혜능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 있는 사람이나 불성은 본래 차별이 없다. 단지 미혹함과 깨달음에 따라 다른 것이다. 미혹하면 어리석은 것이고, 깨달으면 지혜를 이루는 것이다」(지묵 강설 돈황신본 육조단경 p.71 愚人智人 佛性本亦無差別 只緣迷悟 迷卽爲愚 悟卽成智)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단경에서는 이 불성이 공성이나 청정의 의미를 넘어 반야 곧 지혜의 작용(自然智)까지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
불성론의 출발점과 최종 결론은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화엄경에 「여래의 지혜를 갖추지 않은 중생은 하나도 없지만, 망상의 집착 때문에 증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여의면 모든 자연지와 무애지가 나타나느니라」(八十華嚴 第 五十, 無一衆生而 不具如來智慧 但爲妄想執着而不證得 若離妄想 一切自然智 無碍智 則得現前 )고 말씀하셨고,
또 대반열반경에 「모든 중생들이 불성이 있으나 ,번뇌에 덮혀서 이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느니라.」(大般涅槃經 第 七, 一切衆生 悉有佛性 煩惱覆故 不知不見 ) 「이와 같은 불성은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느니라」(大般涅槃經 第七, 如是佛性 唯佛能知 ) 「불성을 봄으로써 무상정각을 이루느니라」( 大般涅槃經 第七, 因見佛性 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 고 말씀하셨다.
위와 같은 글들은 여래의 지혜는 불성을 말함이니, 불성을 가리고 있는 망상을 버리면 불성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불성은 망상이 다 끊어진 부처만이 볼 수 있으니 이것이 무상정각이다.
혜능은 단경에서 「선지식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色身에 있는 스스로의 法性에 三身佛이 있음을 보게하리라. 이 삼신은 불성으로부터 나온다」( 장경각 돈황본육조단경 p.139~p.140 令善知識 於自色身 見自法性 有三身佛 此三身佛 從性上生 )라고 하셨으며, 또한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으니 自佛이야말로 眞佛이다」( 장경각 돈황본육조단경 p.276 我心自有佛 自佛是眞佛 )라고 하셨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렇게 청정한 불성이 번뇌에 가리워져 있기에 어떻게 이 불성을 드러내는가하는 이 문제가 불성사상을 밝히는데 핵심이 된다고 본다.
혜능의 불성사상에 있어서 <수행>을 부처가 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출발하느냐 아니면 본래 부처로 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느냐 하는 것은 바른 정견을 세우는 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로 갈라진 것이 북종선과 남종선이다.
혜능은 부처는 보통 사람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높은 곳에서 중생을 내려다보고 중생이 머리를 들고 바라보아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른바 부처는 중생 자신이고, 불성은 본래 각자 사람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등급 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밖으로의 권위는 부정되었으며, 원래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중생은 없으며, 머리를 들고 바로 서야 한다는 이야기다.
혜능의 사상은 부처를 천국에서 인간으로, 피안에서 차안으로 끌어 내렸으며, 부처를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끌어들여 <중생 즉 부처>, <번뇌 즉 보리>, <즉심즉불의 본래불>을 깨달아 자기 부처를 바로 보아야 한다는 해방선언이며, 높고 낮음이 없는 평등선언이다.
혜능은 단경에서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하기를 바란다면 결코 이룰 수가 없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선지식을 알아야만 곧바로 해탈을 얻을 수가 있다」(장경각발행 돈황본단경 p.176, 若取外求善知識 望得解脫 無有是處 識自心內善知識 卽得解脫 )고 했다. 그러므로 혜능의 사상은 불성 작용의 여러 측면 중에서 깨달음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여 모든 중생들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지혜 작용을 단박에 깨달을 수 있도록 자신감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 佛性사상의 源流
올바른 인식은 올바른 실천을 드러내고, 올바른 실천은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깨달음은 열반으로 이어진다. 결국 열반의 성취는 올바른 인식을 출발점으로 하여야 한다.
불성이라는 말과 함께 불성사상을 소의로 하는 열반경과 대승기신론, 불성론 그리고 능엄경의 여래장(불성사상)등 대승경전을 살펴보면 불성이라는 단어를 인격화함을 볼 수 있다.
불성사상의 근간이 되는 원류를 찾아본다면 초기경전에서는 사제법(四諦法) 외에도 삼법인을 설하고 있다. 삼법인에는 諸行無常(모든 현상은 흐르는 강물과 같이 항상 흘러서 변한다)과 諸法無我(일체법은 고정된 개체가 없고 또한 영원성을 가진 실재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涅槃寂靜(생멸을 생멸로 볼 줄 아는 진리의 눈을 갖추면 생멸을 여의지 않고 바로 고요한 열반에 든다), 一切皆苦(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으로 보지 않고 무아를 무아로 보지 않으면 모든 법이 고통으로 이어진다.)가 있다. ( ▶잡아함에서는 삼법인을 모르면 이것은 바로 근본무명이라고 했다 )
◆ 무명은 ①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무지 ② 안과 밖의 모든 생멸에 대한 무지 ③ 고집멸도에 대한 무지 등으로 정의한다. 초기 경전에서는 고통의 최종적인 원인을 무지와 무명에서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초기경전에서 보는 삼법인의 사상은 결국 연기법을 말하는 것이다. 붓다의 49년간의 설법은 모두 연기설의 응용이라 할 만큼 연기와 관련된 것이다
연기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간결한 연기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此滅故彼滅
이 간결한 문장을 연기의 법칙성이라고 한다. 모든 연기의 형식은 이것을 응용한 것에 불과하다.
중관철학의 개조 용수는 중론 서두 게송에서 연기법(불성)의 작용에 대해서 <사라지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끊어지지도 않고 이어지지도 않는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연기법이란 서로 연관 관계를 맺으며 서로 의존하며 서로 상즉상입하며 공생공멸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다.
제행이 무상하여 고정된 실체성이 없으므로 무아라고 한다, 초기경전의 무아사상이 반야사상에서는 공성으로 전환되고, 후기 대승경전에 들어와서는 공성은 불성으로 인격화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선종에 와서는 불성사상은 평상심의 조사선 가풍으로 자리매김한다.
(2) 돈오사상
■ 본래 부처라는 존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육조스님의 사상과 정신을 말한다면 불성사상과 돈오사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불성사상에 대하여 심도 깊게 논리정연하게 파헤치기에는 본인의 부족한 수행으로는 역부족임을 통감하면서 주어진 논제의 틀을 갖추는 의미에서 여기서는 돈오사상에 대해서 본인의 우둔한 뜻을 피력해볼까 한다.
불교의 수행론을 거론하다보면 먼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사상이 서로 대립하는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두 수행법을 대립적인 양상에서 논쟁하는 글이 아니고 혜능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을 이해하는 정도까지만 접근할까 한다.
돈오돈수라는 말은 단박에 깨쳐 단박에 닦아 마친다는 뜻이다.
여기서 깨쳤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원래 완전무결한 부처라는 것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고 철저히 체득하여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박에>라는 말은 깨침이건 닦음이건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찰나간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청정한 진여일심이 번뇌에 가리워져 있는데 본래 부처로 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먼저 수행을 부처가 되어 가는 과정으로 믿고 출발하느냐 아니면 본래 부처로 되어 있는 존재라는 믿음에서 출발하느냐 하는 문제다.
왜냐하면 바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한 정견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도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체험을 통하여 확인된 믿음이 아닌 자신의 의지와 이성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사정과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며,처음에 세운 의지의 강도가 판단의 변화에 따라 약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현재 이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부처라는 믿음은 체험을 통한 확인된 믿음이다. 이것은 깨친 자의 지혜, 즉 보리에 근거한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을 일으켰다는 자체가 이미 깨쳤고 불도를 성취했다는 뜻이다.
<나는 부처이다>라는 믿음은 아마 그럴 것이라는 짐작의 믿음이 아니라 그러한 체험세계의 확인된 믿음이다. 일단 진실이 확인된 이상 그 믿음은 변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불변의 믿음이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는 어떻게 하면 변할 수 있는 믿음을 변함없는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바꾸느냐 하는 것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결론적으로 믿음이라고 본다.
불교 수행은 먼저 올바른 믿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야말로 자신의 잘못된 의욕을 제거하고 집착을 버려 보살의 끝없는 행원을 일으켜서 마치 멈춤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부처의 행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이 굳건해야 닦음의 과정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결단력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정진에 매진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믿음이란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체험을 통해서 확인된 믿음이란 바로, 부처는 연기의 세계, 즉 모든 법이 인연으로서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는 세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부처다> 함은 곧 <나는 연기적 존재이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연기법을 깨닫는 것이 바로 돈오이다. 그래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본다」고 초기경전 아함에서는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 돈오돈수의 수증론
많은 세월을 살아온 사람에게 지난 날 어떤 삶이 가장 행복하였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을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삶에 있어서 행복이란 자신이 하고픈 일이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탐. 진. 치 (貪, 瞋. 痴)의 삶의 틀에서 벗어나 마음 바탕에 부끄러움 없는 정명(正命)의 삶을 살고파서 출가를 선택한 사람은 그 순간부터 가장 가치 있는 행복감 속에서, 날이면 날마다 자신이 선택한 삶에 감사할 것이다.
본래 내적 경험이란 ,남은 몰라도 경험하는 자기 자신만이 즐기면서 혼자서 미소 짓는 그런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기쁨으로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가치관의 변화에서 오는 돈오라고 할 수 있으며, 깨어 있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깨어 있는(돈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럼 여기서 혜능의 가치관을 게송에서 찾아보자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菩提本無樹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明鏡亦無臺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佛性常淸淨
어느 곳에 때와 먼지가 끼겠는가 何處有塵埃
이 게송은 불성작용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털고 닦을 것이 있다고 인정하는 무명의 실체성에 대하여 힐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불성작용을 돈오한 삶(돈수)이야 말로 항상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때와 먼지가 낄 수 있겠는가?
흐르는 물에 몸을 씻고서 어떤 물이 자신의 몸을 씻은 물이라고 정할 수 있겠는가?
잠시도 멈추지 않고 항상 흐르기 때문에 무상이라 한다.
무상하기 때문에 고정불변의 실체성을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을 무아라고 한다.
모든 법이 무상하고 무아인줄 알면, 밖으로 드러난 일체 현상과 안으로 일어나는 모든 생멸심에 집착하지 않는 열반묘심(涅槃)을 깨닫게 된다. 초기경전에서는 이것을 삼법인이라고 하였고 ,삼법인은 또한 연기의 법칙성으로 본다.
혜능은 단경에서 연기의 법칙성을 불성이 항상 청정하다고 말한다.
이 뜻을 정리하면 불성이란 연기의 법칙성인 연기법으로서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는 세계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부처라 함은 곧 나는 연기적 존재>라는 뜻이다. 혜능은 이러한 이치를 깨달은 것을 돈오라 하고, 돈오 즉 부처의 행을 돈수라고 정의한다.
무명을 인정한 중생심은 중생과 부처라는 이원적 구조로 된 삶을 살 수 밖에 없고, 연기의 법칙성을 돈오한 성자의 입장에서는 번뇌와 보리를 동일 진성으로 보기 때문에 불오염수(不汚染修)로 수행을 삼는다. 이러한 이치를 알고 믿어서 기쁜 환희심으로 세세생생토록 이 길을 가야겠다고 보살의 서원을 세우는 자를 진정한 발심자라고 할 수 있다.
보리심을 일으킴이 이와 같을 때 비로소 스승이 본래 마음달을 들어보이면 (直指人心) 발심자는 이러한 기연을 통해 본래 마음달을 체득하는 변정각(言下頓悟 見性成佛)을 이루게 된다. 혜능스님이야말로 참으로 발심수행자의 모범이 된다.
■ 혜능의 見性 체험
여기서 혜능의 견성 체험을 살펴 보기로 하자.
「오조 홍인대사께서 밤중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었다. 혜능은 한번 듣고 말 끝에 바로 깨달았다」고 한다. (장경각발행 돈황본단경 p.113 )
또 혜능은 대범사 법당 설법에서 「선지식들아. 나는 홍인화상의 회하에서 한번 듣고 말 끝에 크게 깨달아 진여 본성을 단박에 보았다.
그러므로 이 교법을 후대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에 깨닫게 하여 각자가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장경각 돈황본단경 p.175~p.176, 善知識 我於忍和尙處 一聞言下大悟 頓見眞如本性 是故將此敎法流行後代 令學道者頓悟菩提各自觀心 令自本性頓悟)라고 말씀하셨다.
이 내용을 보면 혜능은 말을 듣고 바로 깨달아 돈오한 것이다.
단경의 내용에 따르면 혜능의 견성은 오랜 기간의 좌선 수행 끝에 견성한 것이 아니라 홍인화상의 금강경에 대한 법문을 듣는 중에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起心>이라는 내용의 이치를 확연히 깨달아 견성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홍인화상께서 들어 보인 직지인심(直指人心)의 기연을 통하여 혜능은 자신의 불성(마음달)을 언하에 돈오한 것이다.
이러한 혜능의 돈오돈수의 사상은 훗날 상당설법이나 선문답을 통하여 스승은 직지인심을 드러내고, 이러한 기연을 계기로 해서 제자가 견성 성불하는 조사선의 가풍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면 여기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도리를 체득한 혜능의 오도송을 보자. (덕이본 불광출판부 육조단경 p.89)
성품이 어찌 본래 스스로 청정한 것임을 알았으리까
성품이 어찌 본래 스스로 생멸없음을 알았으리까
성품이 어찌 본래 스스로 구족함을 알았으리까
성품이 어찌 본래 스스로 흔들림 없음을 알았으리까
성품이 어찌 능히 만법을 내는 줄을 알았으리까
何豈自性 本來淸淨
何豈自性 本不生滅
何豈自性 本自具足
何豈自性 本無動搖
何豈自性 能生萬法
이러한 혜능의 오도송을 듣고 홍인화상은 혜능이 돈오 견성 하였음을 아시고 바로 조어장부요 천인사불(調御丈夫 天人師佛)이라고 인가를 하였다. 혜능의 어록이 육조단경이란 경제(經題)가 붙게 된 것도 홍인화상께서 천인사불이라 인가를 하신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 오도송을 통하여 살펴보면 궁극적으로 혜능은 불성이 본래 구족하여 항상 청정한 도리임을 체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소득의 본래 구족한 불성을 깨달은 것이다. 즉, 얻을 바가 없는 연기의 도리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무소득에 관한 매우 유명한 말이 있다. 黃龍祖心의 제자인 靑原惟信 선사의 게송에 ((주) 五燈會元 17권 )
노승이 30 년 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았을 때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뒷날 선지식을 친견하여 入處가 있어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휴식처를 얻어 전과 같이
산을 보면 산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이 물이다
老僧三十年未參禪時
見山是山 見水是水
及至後來 親見知識 有個入處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而今得個休歇處 依前
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
이 게송은 수행하는 자들이 직관하여 소홀히할 내용이 아니다.
3. 육조단경의 실천론
혜능은 모든 중생은 스스로 반야지(般若智)를 본래 구족하고 있다는 자성청정을 설법을 통하여 계속 강조하셨다. 중생들은 불지견은 모든 불보살님들만 갖추고 있는 것이고, 중생들의 현재심은 번뇌와 더러움에 덮혀 있기 때문에 불지를 증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불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혜능은 이러한 불지견이 중생의 마음 속에서 본래 자연지(불성)로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믿을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어두움에 속박된 것은 본래 없다. 원래 마음은 구속된 것이 아니다. 한번도 속박된 일이 없는 자성청정을 단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돈오 경계가 놀라운 것이다.
지금까지는 혜능의 불성 사상과 돈오 사상에서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춘 본래 부처임을 살펴 보았다.
혜능은 단경에서 불성사상의 구체적인 실천사상으로 무념,무상,무주를 설하셨다. 중생 자신이 바로 불성을 갖춘 부처이기에 부처로서의 실천행으로 모든 생각을 하지 않고 의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생각이라도 어느 한 경계나 사물에 대하여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無念, 相에 있어서 相을 떠난 無相, 사람의 본래 성품이 한 생각에도 머무르지 않는 無住 思想을 설하셨다.
이제부터 남종돈교의 실천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無念
무념, 무상, 무주에 대해서 혜능은 단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예부터 모두가 생각없음을 세워 宗을 삼으며, 모양없음으로 본체로 삼고, 머무름 없음으로 근본으로 삼느니라 」(장경각 돈황본단경 p.126~p.127 善知識 我自法門 從上已來 皆立無念爲宗無相爲體無住爲本)
이 내용을 보면, 무념으로서 종을 삼고, 무상으로서 체를 삼으며, 무주로서 근본을 삼는다고 큰 뜻을 먼저 밝혀, 혜능의 선법인 남종돈오법이 초조인 달마조사의 정법안장 열반묘심 (正法眼藏 涅槃妙心)의 조사의(祖師意)에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정견의 법통을 이었기 때문에, 혜능의 법이 바로 달마의 선법임을 밝히고 있다.
혜능은 단경에서 「無念法이란 일체법을 보되 그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일체처에 두루하되 일체처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 나가게하나 ,육진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 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장경각돈황본단경 p.179 無念法者 見一切法不着一切法 遍一切處不着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從六門走出 於六塵中不離不染去來自由 卽是般若三昧自由解脫 名無念行) 고 하여 무념을, 한 생각이라도 망념이 없으며, 일체법 일체처 그 어느 곳에도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이 무념법은 중생 누구나 본래 구족하고 있는 청정한 진여불성으로, 창조적인 부처의 삶을 살아가도록 그 길을 제시한 실천사상인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혜능은 남종선의 종지는 무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무념을 종지로 한다고 하여 무념에 집착하여 무념을 버리지 않으면 무념은 有念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래서 혜능은 단경에서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망념)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有念이 없다면 무념 또한 세울 것이 없다」(장경각 돈황본단경 p.130 世人離見 不起於念 若無有念 無念亦不立 )고 하였다.
무념이란 모든 생각을 하지 않고 의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이라도 어느 한 경계나 사물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아니하고 불성은 본래 청정하여 일체 경계에 오염되지 않음을 밝게 사무쳐 아는 것 (內外明徹)을 말한다.
그러면 없다는 것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며,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은 二相, 즉 주관과 객관, 생멸, 유무, 자타 등의 속진에 구속을 받는 양변 대립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생각한다는 것은 본래 구족한 진여본성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양변에 대한 집착은 결국 무명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혜능이 남종의 종지인 무념의 법문이 남에게 잘못 이해되어져 잘못 전수될 것을 염려하여, 百物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을 다하여 一念(한 생각)이 끊어져 없음을 무념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이것은 죽은 것이지 살아 있는 유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라빠진 고목식의 수행은 생각마저도 없애버리므로 사람이 사람의 도를 이루지 못하고 결국 윤회에 떨어지게 되므로 생사윤회를 초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혜능이 주장하는 무념은, 다 타버린 죽은 재와 같이 적적한 경계에만 집착하는 외도선이 아니고, 성성적적하면서도 적적성성한 이른바 자재 대해탈의 무념행을 말한다. 마치 표주박이 큰 파도는 크게 타고 ,잔물결은 그 경계에 맞추듯, 임성 소요하는 삶의 대자유행을 말한다.
과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내려와 왕궁에 태어나시고, 설산에 들어가 샛별을 보고, 허깨비 같은 중생을 깨우쳐주신 일들이 모두 이 무념행를 벗어나지 않으셨다.
부처님은 항상 무념속에 살면서도 무념이란 이름을 세우시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교화 하였으나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하셨으며,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 하신 말씀은 무념의 본체를 잘 드러내어 놓은 소식이다.
혜능은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하였다.
(2) 無相
단경에서 혜능은 무념위종을 설하고 바로 무상위체(無相爲體)를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본체를 삼느니라」(장경각발행 돈황본단경 p.128 善知識 外離一切相 是無相 但能離相 性體淸淨 是以無相爲體 ) 고 설하셨다.
무엇을 무상이라 하는가?
무상은 상에 있어서 상을 떠난 것(離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상을 떠났다는 것은 二相의 망념이 없음을 뜻한다. 따라서 무상은 상에 있어서 二相의 망념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의 마음에 망념이 없으면 바로 자성청정심인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금강경의 대의와 상통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육조스님 금강경해(解)의 서문을 보면 「무릇 금강경은 무상으로 종으로 삼고 무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으니 달마가 서쪽으로부터 이 경의 뜻을 전해 사람들로 하여금 이치를 깨달아 성품을 보게 하였다. 단지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성품을 보지 못하므로 견성하는 법을 세우나 만약 세상 사람들이 진여의 본체를 보아 버리면 법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불광출판사 금강경오가해 p.36~p.37 夫金鋼經者 無相爲宗 無住爲體 妙有爲用 自從達磨西來 爲傳 此經之義 令人悟理見性 祗爲世人 不見自性 是以立見性之法 世人若了見 眞如本體 卽不假立法 ) 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금강경 사구게로 잘 알려진 「무릇 있는 바 모양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 보면 곧 여래를 보게 되리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는 말씀과 그리고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자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고 하신 말씀은 이 무상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사상적 밑바탕은 역시 금강반야바라밀경의 <상에 있어서 상을 떠났다>는 무상의 이론이 기초가 된 제법공성의 사상이며, 혜능은 단경에서 대승보살계를 받는 수계의식으로서 또한 자성불을 바로 깨닫게 하는 돈오(실천)사상으로 무상을 정의하였다. 이것은 신수의 점수적 수행이 자성을 바로 보는 정견이 아님을 밝히고, 혜능이 견성 오도송에서 밝힌 바 본래 구족한 불성사상의 돈오종지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무상계 법문을 특별히 설하신 것이다.
「선지식들아, 모두 모름지기 자기의 몸으로 모양없는 계를 받되 다 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의 삼신불을 보게 하리라」(善知識 惣須自體 以受無相戒 一時 逐慧能口道 令善知識 見自三身佛)
「나의 색신의 청정법신불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화신불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보신불에 귀의합니다」하라고 하시면서 혜능은 선지식들을 위하여 無相戒(無常心地戒)를 설하신다.
색신은 집이므로 귀의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앞의 세 몸(청정법신불. 천백억화신불. 당래원만보신불 )은 자기의 법성 속에 있고 세상 사람이 다 가진 것이나 미혹하여 보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밖으로 삼신불을 찾지 말고 자기 색신 속의 삼신불을 볼 것을 강조하신다.
「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의 부처라고 하는가? 선지식들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의 성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을 행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착한 행동을 닦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 속에 있어서 자성은 항상 깨끗함을 알라」( 何名淸淨法身佛 善知識 世人 性本自淨 萬法在自性 思量一切惡事 卽行於惡 思量一切善事 便修於善行 知如是一切法 盡在自性 自性常淸淨 )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느니라. 세상 사람의 자성이 깨끗함도 맑은 하늘과 같아서, 慧는 해와 같고 智는 달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 법문을 열어 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사무쳐 밝아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나니,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 이름하느니라」(日月常明 只爲雲覆蓋 上明下暗 不能了見日月星辰 忽遇慧風 吹散卷盡雲霧 萬像森羅一時皆現 世人性淨猶如淸天 惠如日智如月 智慧常明 於外著境妄念浮雲蓋覆 自性不能明 故遇善知識 開眞法吹却迷妄 內外明徹 於自性中萬法皆見 一切法自在性 名爲淸淨法身 )
「어떤 것을 천백억화신불이라고 하는가? 생각하지 않으면 자성은 곧 비어 고요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착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고 독과 해침은 변화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는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지혜는 변화하여 윗세계가 되고 우치함은 변화하여 아랫나라가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거늘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를 못한다. 한 생각이 착하면 지혜가 곧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자성의 화신이라고 하니라」(何名爲千百億化身佛 不思量性卽空寂 思量卽是自化 思量惡法化爲地獄 思量善法化爲天堂 毒害化爲畜生 慈悲化爲菩薩 智惠化爲上界 愚癡化爲下方 自性變化甚多 迷人自不知見 一念善智惠卽生 此名自性化身 )
「어떤 것을 원만한 보신불이라고 하는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나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착함을 물리쳐 그치게 하고 한 생각의 착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물리쳐 없애나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착함을 보신이라고 이름하느니라」(何名圓滿報身佛 一燈 能除千年闇 一智能滅萬年愚 莫思向前常思於後 常後念善 名爲報身 一念惡報 却千年善止 一念善報 却千年惡滅 無始已來 後念善名爲報身 )
이상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무상계는, 세상사람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자기 색신 속의 자성 삼신불에 귀의하게 하여 청정한 마음달이 바로 자성불임을 확신하면서 바로 지금 즉신성불할 것을 강조하셨다.
(3) 無住
혜능은 지금까지 밖으로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모양이 없는 것을 본체로 삼는다는 설법을 마치고 이제부터 無住로서 근본을 삼는다는 법문을 하신다.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의 생각이 생각 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장경각발행 돈황본단경 P.127~P.129 無住者爲人本性念念不住 前念今念後念 念念相續 無有斷絶 若一念斷絶 法身卽是離色身 念念時中於一切法上無住 一念若住念念卽住名繫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卽無縛也 是以無住爲本 )
위의 법문에서 혜능은 無住는 사람의 본성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고 前念, 今念, 後念이 생각마다 상속하여 끊어짐이 없는 것이다 라고 설했다.
혜능은 한 생각이라도 일체법에 머무르게 되면 계박(繫縛,얽매임)이라 부르고, 머무르지 않으면 無縛이라고 하였다. 이 무박이 바로 無住心인 것이다. 혜능이 말하는 無住는 사람의 思惟상태의 연속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혜능은 이것을 사람의 본성으로 보았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見聞覺知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견문각지가 본성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작용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법에 집착하지 않고 법에 머무르지 않으며 어떠한 경계에도 멈추지 않는 것이 본성을 바로 보는 것이다.
일체의 경계나 일체법에 대하여 한 생각도 머무름이 없는 무주사상은 혜능이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언구를 듣는 순간에 마음 눈이 열리게 된 것처럼 반야사상의 실천사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대주혜해(大珠慧海)선사는 무주의 사상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마음이 어느 곳에 머물러야 바로 머무는 것입니까 心住何處卽住 」라고 어느 학인스님이 묻자 대주스님은「머무는 곳이 없는 데 머무는 것이 바로 머무는 것이니라 住無住處卽住」라고 답하였다. 또한
「무엇이 머무름이 없는 곳입니까 云何是無住處 」라는 물음에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함이 곧 머무는 곳이 없는 데 머무는 것이니라 不住一切處 卽是住無住處 」라고 답하였으며
「어떤 것이 일체처에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까 云何是不住一切處 」라는 물음에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한다 함은 善惡,유무,내외,중간에 머물지 아니하며, 空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空 아님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禪定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禪定 아님에도 머물지 아니함이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함이니, 다만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는 것이 곧 머무는 곳이니라. 이와 같이 얻은 것을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無住心이 부처님의 마음이니라. 不住一切處者 不住善惡有無內外中間 不住空亦不住不空 不住定亦不住不定 卽是不住一切處 只箇不住一切處卽是住處也 得如是者 卽名無住心也 無住心者是佛心 」라고 답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 無住에 대한 대주스님의 견해는 혜능스님의 뜻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에 한 생각이 하나의 법에 머무르고, 하나의 법에 집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마치 허공을 나는 새가 날개 짓을 멈추면 반드시 추락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무념. 무상. 무주의 뜻을 혜능은 금강경의 반야바라밀의 정신에 의거하여 남종선의 실천사상으로 정리했다.
혜능은 이러한 실천을 돈오돈수의 입장에서 부처가 부처의 경계에서 부처행을 바로 드러내는 一切衆生 悉有佛性을 강조하였다.
4. 結語
혜능은 중생심의 본질적인 자성을 일러 불성이라 하였으며,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고 했다. 마음의 본성이 청정하다면 청정으로부터 나오는 삶의 질도 필연적으로 청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혜능의 돈오돈수 법칙성이다.
중생이 스스로 본각성을 가지고 있다는 본래 성불론은 열반경의 <일체중생 실유불성>에 바탕한 사상이다. 혜능이 말하는 내용 중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는 속뜻은, 나는 불성이 있지만 타인에게는 불성이 없을 것이라는 중생의 오만한 차별심을 쓸어버리고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남도 부처일 수밖에 없다는 평등심을 강조하고, 부처와 부처는 서로 공경하여 부처의 본성인 대자비심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 부처가 스스로 부처라는 것을 믿어 조금도 의심이 없다면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깨침이다. 그러므로 본래 부처가 부처의 삶을 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혜능이 설법하는 단경의 내용은 부처가 부처의 모습을 드러낸 평상심인 것이다.
그러한 평상심의 삶의 실천속에 무념, 무상, 무주라는 본질성이 있다는 것이다.
단경에서 보는 혜능의 사상은 부처의 본 면목인 본질을 드러내 놓은 것이지 중생을 말하고 닦음을 논하는 부처 아닌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다. 그래서 不修之修 ( 닦음없는 부처 삶), 無修無悟 (닦음도 없고 깨침도 없다)라는 조사선 가풍의 기틀을 세웠다.
조사선의 가풍은 자비심을 바탕한 행위이다. 마치 어머니가 한 순간도 放逸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지속적으로 외동아들을 보호하듯이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모든 생명체들에 대하여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