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발
바깥잠을 자는 여행을 못 한 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여느 해 출발보다 설렜다. 알람을 못 듣고 늦잠을 잤다. 생각해 두었던 니트 상의는 찾아도 없다. 결국 평상시 출근복을 입은 채 집을 나섰다. 여행의 즐거움이 살짝 반감된다. 날씨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서울역 화장실에서 원피스 안에 받쳐 입은 민소매 폴라티를 벗었다. 파스꾸찌는 사람들이 가득한데 파리그라샹은 한산하다. 파리그라샹에서 베이글 하나로 아침을 먹는다. 이럴 때 난 참 찌질하다. 밝아오는 차창 밖은 노랗게 변신 중인 들판이다. 가을이 깊숙이 들어서고 있다. 부산은 빗길 흔적으로 조금 번들거리다가 곧 화사해지기 시작한다. 바람이 불었다. 딱 기분 좋을 만큼!
** 영화 : 전처의 결혼식
젊은이들의 사랑 방정식을 유쾌하게 그렸다. 로맨틱 코미디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저렇게 극진하게 나를 위해 살아주던 그 누군가가 나의 청춘의 어느 날에 하루라도 있었던가. 그러나 사랑은 어긋나기 마련이다. 사랑의 본질은 영속성이 아니다. 사랑은 당의정처럼 영원을 발라 달달하게 노래하지만 단맛은 곧 소멸하고 쓴 속맛이 혓바닥을 불편하게 한다. 쓴맛을 어찌 잘 견뎌 몸과 마음의 자양분으로 삼느냐는 전적으로 두 사람의 몫이다. 사랑은 다크초콜릿 같다. 여배우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은 옳다. 두 번째 결혼인데 확신 없이 할 수는 없다. 이럴 땐 머뭇거리고 망설이는 게 정답이다.
** 감독과 배우
저녁은 해운대 끝자락 ‘테라스’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이럴 땐 내 입맛쯤은 살짝 유보하는 게 센스다. 주방장 솜씨가 좋은가. 맛있게 먹었다. 서서히 어둠이 몰려오고 광안대교도 불을 밝힌다. 대각선으로 한 자리 건너 박찬욱 감독과 김옥빈 배우가 보인다. 김옥빈은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 배우는 정말 보통사람과 다르구나, 실제로 첨 알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얼굴과 달리 좀 컸다. 그러고 보니 박찬욱 감독은 부산영화제에서 두 번째 본다. 화장실 앞에서 딱 마주친 감독에게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머쓱했다. 그도 그랬겠지. 나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얼굴 붉히며 ‘안녕하세요.’대답한다. 하하하하! 영화제에 놀러온 기분이 제대로 난다. 박쟁 동생이 여친과 같이 들어선다. 두 테이블 밥값을 모두 계산했다. 돈을 쓸 때 어른이 되는 것 같다.
** 맥주
박쟁의 친구는 먼저 올라갔다. 나는 밤바다 근처에 좀 더 있고 싶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러 자리를 옮겼다. 피노키오님은 센텀시티에서 소주 한 잔 마시고 있단다. 지아님은 함께 마실 남자를 섭외하지 못했다. 지아님의 너른 인맥을 깔깔거리며 비웃으며 우리끼리 마셨다. 말들이 성큼성큼 오가지 못했다. 살짝 들떴을 때는 남자와의 수다가 즐겁다. 혼자 해변가를 잠시 걸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의 뒷모습이 영화 같다. 여름 밤바다의 게걸스러움이 없어서 좋다. 그림 엽서 한 장이다.
** 숙소로 가는 길
달맞이고개 지나 청사포를 향했다. 일 년 새에 달맞이고개 음식점들은 죄다 커피집으로 바뀐 듯했다. 사람들이 꽉 꽉 차있다. 정말 대한민국은 커피공화국이다. 청사포 그곳에 우리를 재워줄 그렇게 행복한 집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일 아침 밝은 날이 기다려졌다. 단잠을 잤다.
첫댓글 나는요, 당신이 어른이라서 참 좋아요ㅡ ?히히히??ㅎ히 :)
더 큰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예를 들면 '박쟁, 이번 휴가는 비엔나로 갈까. 비행기표 예매해. 결재는 내 카드로...'하하하
잘 다녀오셨어요?^^ 한때 제 일상속에 있었던 지명들이어서 더 반갑습니다. 이석원의 저 노란책, 5월의 향기인 줄만 알았는데 넌 10월의 그리움이었어~♪ 언니네 이발관 노래로만 듣다가 책을 냈다길래 한걸음에 달려가서 만졌었죠. 여행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카가 권해서 읽기 시작했어요. 음악에 무관심하다 보니 사실 누군지도 몰랐어요. 늘어지거나 분칠한 듯한 화장기가 없는 글이라서 좋더군요.
글을 읽다보니.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넘쳐나네요. 이 석원, 스파게티,박찬욱, 김옥빈가을밤바다..// 이석원의 책을 못읽어봤는데, 읽고싶어요., 너무, 글도 참 어련히 솔직하게 잘 썼을까요. 요즘 듣는 노래 중에 가사에 집착하면서 듣게 되는 그런 노래 중의 하나에요. 담백하고도 청아한 느낌의 목소리, 마음 간지르는 어쿠스틱기타의 잔잔함, 쥐는 너야를 줄창 들으면서 마음 아렸던 가을날이 생각나네요. /김옥빈을 보셨다니 넘 부러워요. 보고싶은 배우중의 한명인데. 처음 데뷔했을 때 이국적인 느낌에 처음 연기인데도 넘 잘 해서 너무 기대를 많이 했는데. 너무나 쉽게 내리막길 걷는 거 보고 정말 저도 충격 많이 받았습니다. 박쥐
에서 나름 열연했는데도, 좀처럼 살아나질 않는듯해 넘 개인적으로 안타깝습니다. 논리적으로 전혀 설명이 안되는 타고난 그 느낌만으로 사람의 정신을 흔들 수 있는 몇 안되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배우라는 느낌이 드는 배우인데. ㅠㅠ,// 가을의 바다는 여름의 그 복잡함에서 벗어나.. 고요한 정적, 그 느낌이 참 좋은데.. 밤바다 한번 보러 요번 주에 길 나서야겠어요. / 스파게티는 제가 젤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인데 다여트 4개월 하는 동안 입근처에 한번 못갔어요. ㅠㅠ, 미루님 저 살 마니 뺐어요. 미루님 부탁대로요. ㅎㅎ //글 보는 내내 많이 설레였어요. 감사해요.
다이어트에 성공하셨다니 축하해요. 살짝 숨어 있던 본래의 아름다움이 살아났을 테니 이제 눈부셔서 못 쳐다볼 것 같아요. 이석원의 글은 참 맛갈났어요. 감상의 겉치레 없는 글이면서도 건조하거나 거칠지 않았지요. 나는 김옥빈으,ㄹ 박쥐 보면서 처음 알았어요. 앞으로 그녀의 활동을 눈여겨 보아야겠어요.
마치 밀월여행이라도 다녀 오신 듯 글 곳곳에 행복이 흐릅니다.... 흰 벽과 마루, 파격이다 싶게 위치한 쪽창과 그를 통한 푸른 빛 나는 바깥 정경, 그 모두의 절묘한 어울림......
아침에 일어나 마장에 나갔을 대아, 한눈에 들어오는 바다와 하늘과 자잘한 꽃들과 좁은 골목길과....... 다음 사진 기대하세요. ㅎㅎ
다음 사진 기대하라시면.... 아, 절 아예 부러움에 까무러치게 만드실 작정이로군요 ㅠㅜ 두 분의 눈빛을 볼 수 있는 사진이면 더 좋겠습니다.
아아~ 부산 정말 가보고 싶네요...........^^
부산, 좋아요. 나는 태종대와 달맞이고개를 특히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