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바깥마당으로 나오면서도 종손 어른을 뵐 수 있는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풍뢰헌
운장각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초조한 맘 가눌 길 없어 촛점을 잃은 눈동자로 안내문만
응시하고 있는 중에 사랑채 문이 열리면서 무인풍이 역력한 모습의 어르신이 나오신다.
학봉의 14대 종손 김시인 어르신이 분명할 것 같아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여기서 잠깐 13대 김용환이 아들이 없어 시인 어른이 학봉의 종손으로 입적되는
과정을 진위 여부보다는 흥미진진해서 윤학준의 양반 문화 탐방기에서 발췌해 보겠다.
[종통을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는 양반 집안에서 후사가 없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양자를 들여야겠는데 썰렁한 집안에 양자로 오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문중의 유지들이 안달이 나서 백방으로 수소문해보았지만 재산도 없고 찬바람이 감도는
덩그런 기왓집과 사당이 있을 뿐인 집에 오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명가를 잊는 자가 아무라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학봉 종손으로서 체통을
유지할 수 있는 인격과 풍채를 겸비한 인물, 일족을 통솔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학봉 종가는 시인 어른의 선친은 물론 조부도 양자로 들어온 종손이었기에 가까운 친척이
있을 리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칠촌에게 양자 빌 듯 한다" 라는 속담이 있다.
안되는 것을 억지를 써서 애걸복걸하는 것을 비유해서 하는 말인데, 양자를 들일 때는 그
야말로 손발이 닳도록 빌어야 한다.
'아무튼 학봉 종손으로서 손색없는 인물을...' 하고 장기간에 걸쳐 물색을 한 결과 문중 어른들의 눈에 든 어떤 사람에게 점이 찍혔다. 그 마을에 갈려면 안동읍을 거쳐서 70리를 더
가야하는 두메산골이었다.
때문에 '양자빌이'의 노인 일행은 어떤 때는 3, 4명 어떤 때는 10여 명이나 되는 대부대였다
노인들이 당사자의 집에 도착하면 사랑방 문 앞에 멍석을 펴 놓고 앉아 버틴다.
요즘 말로 연좌농성을 하는 셈이다.
이런 의식을 거추장스럽게 하면 할수록 또한 횟수가 거듭되면 될수록 더 권위가 서는 것이다.
어떤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 마을에 가려면 조그만 내를 건너야 하는데 좀 돌아가면 다리도
있고, 또 양반들의 행차라 동네의 젊은이 동원 업혀서 건널 수도 있었건만 이 노인 일행은
성의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바지 가랭이를 걷어올리고 내를 건넜다.
얼음에 정강이를 베어 피가 흘러 내려도 노인 일행은 철철 흐르는 피를 딱지 않고 그 후보
자의 집에 당도하여 문 앞에서 앉아 버티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을 맞는 주인측의 대응이 또한 걸작이다.
피가 흐르든 말든, 살을 에일 듯한 추위에 떨고 있든 말든 모른 체 하고 내버려두었다.
도무지 일가의 노인들에게, 더구나 장유유서를 지상 명제로 삼고 있는 유가의 법도로
봐서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태도인데, 이 것 역시 권위를 격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의 김시인 어른은 이런 과정을 거쳐 대부분의 양자들이 미혼으로 입적하는대 비해서
두 아들과 같이 한 가족이 입양된 것이라 한다.
그러시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화초에 물을 주려는 듯 물을 받고 계신다.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나서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난 아주 정중하고 공손하게 질문을
여쭌다.
-. 불천위 제사는 언제 모십니까?
-. ..........
-. 사당은 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져 있습니까?
-. 정침 동쪽으로 하게 되 있어
-.주자가례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요놈 봐라 하는 듯이 처음으로 눈길을 내게 주신다)
또다시 대화는 단절되고 무거운 침묵이 뜰에 내려앉는다.
어르신 제 고향이 성주인데 동강 김우옹 선생님과 심산 김창숙 선생님도 의성 김씨
아닙니까? 하였더니 우리 일가 맞지! 하시곤 입을 다무신다.
할 수 없다. 종손 어른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는 욕심에 외람되지만 자극적 질문을
던질 수밖에...(병호시비 까지는 아니더라도)
-. 윤학준 씨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노기를 띤 큰 목소리로) 그 사람 빨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