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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의성향토사연구회
 
 
 
 
 
카페 게시글
♪향토사 이바구 살짝 찍어 봤습니다.
김종국 사랑의집 추천 0 조회 38 11.06.07 10:45 댓글 1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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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6.07 13:44

    첫댓글 김선생님께 사진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1-5번은 서 있는 돌로서 선돌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집 주인이 화단의 조경을 위해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6-10번은 고인돌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선생님께서는 무슨 근거를 갖고 선돌, 고인돌로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 작성자 11.06.07 15:56

    1-5번은 제가 그 마을에서 18살 정도까지 살았고 당시에 담벼락이 훨씬 더 안쪽으로 있었답니다. 6-10번은 김홍배 회장님께서도 본적이 있으며 그래서 고인돌로 확인을 하였으며 마을 어르신네들의 애기로는 아주 오래전에 부터 있었다고 하네요. 1번-5번은 이번 답사때 한번 확인을 해봤으면....오상리 동강서당에서 3-4분이면 가볼수가 있는데..

  • 11.06.07 22:19

    작승초교는 저의 어머님과 외삼촌, 이모님들께서 다니신 학교입니다. 저 역시 외가가 사곡면 오상2리입니다. 저도 대학, 대학원 재학시 작승리에 있는 황씨 어른을 찾아뵙고 마을명이 작상이 작승으로 바뀐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고인돌을 판단하는 근거는 뚜껑돌이 아니라 아래에 받침돌의 유무 입니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 바둑판식 고인돌로 남방식 고인돌로 추정됩니다만, 현장을 보지 않고서는 무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한 가지 주의하실 것은 뚜껑돌에 움푹 패인 굼 또는 성혈은 청동기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계속 행해진 민간신앙임으로 뚜껑돌의 파임만으로 고인돌로 보기는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11.06.07 22:35

    이번 6월 현장답사시 제 고향마을과 사곡면 이필곤(진성 이씨=진보 이씨) 의병대장 기념비, 동강서원(퇴계 이황의 삼종손 이희정) 등을 보신다고 들었습니다. 오상1리 못안에는 동강서원과 더불어 진성 이씨 세거지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농사짓는 전답이 사곡면 오상들(귀내들)에 있기에 자주 가 본 곳입니다. 오상1리(귀천)에 가시면 구멍가게 길 건너 언덕에 돌 거북이 있습니다. 거북등을 손으로 두드리면 속이 비어 있어서 울립니다. 그래서 이 거북바위 뒤쪽에 마을이 형성되어서 귀내, 귀천 등으로 불리웠습니다. 거북바위는 본디 마을회관 자리에 있었는데 회관을 지으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 놓았습니다.

  • 11.06.07 22:24

    제가 선생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고인돌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고인돌이 위치한 지형과 주변 유적과의 거리, 받침돌의 유무, 유물의 존재 유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고인돌로 판단해야 실수가 적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애향심이 지나쳐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아마추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경남의 20개 시/군을 다니면서 기존에 고인돌로 보고된 곳을 직접가서 확인해보면 고인돌로 볼 수 없는 것을 고인돌로 보고한 건이 많이 있습니다. 왜 고인돌이라고 했는지 의문이 드는 건이 있습니다. 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도 이렇게 실수를 합니다.

  • 11.06.07 22:29

    이러한 점 때문에 단편적인 사실을 갖고 고인돌로 추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5번 사진의 선돌은 돌 표면에 낀 이끼나 풀 등으로 돌이 오래된 것은 알겠습니다만, 돌의 재질, 돌의 형태, 돌이 위치한 곳의 입지와 지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전 시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는지, 본디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 등을 문헌기록과 인근 주민들의 전언 등을 수집한 후 그 자료들을 분석하여 판단했을 때 실수가 줄어들 것이라 사료됩니다. 좀 장황하고 길게 댓글을 달았습니다만... 향토사 하시는 분들의 70~80% 분들이 단순한 사실을 부풀

  • 11.06.07 22:38

    리거나 침소봉대하여 사실을 뻥튀기하는 경우가 있어서 제 고향에 계신 선생님들은 그런 점에 주의를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의도로 댓글을 장황하고 길게 달았습니다. 이점 양해말씀 올립니다. 저는 타 시/군을 현장답사하면서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는 그 지역에 사는 주민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분들은 모른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의 중요도를 모를 뿐이지 제가 여쭈어보면 다 알고 답을 해주십니다. 의성의 역사와 문화는 의성향토사연구회 선생님들보다 더 잘 알고 연구할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이 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시고 의성을 공부하고 현지답사하며 연구해 주시길 당부의 말씀을 올립니다.

  • 11.06.07 22:43

    제가 의성에 있었다면 반드시 의성향토사연구회에 가입을 하여 활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저 역시 아직은 모르는 것이 많고 민속학을 공부하여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삶을 현지답사하며 배우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제가 자주 하는 생각이 속도 보다는 방향이라는 생각입니다. 남보다 빨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올바른 방향인지 입니다. 다른 사람이 고인돌이라고 해서 고인돌로 아는 것보다는 내가 고인돌을 공부하여 고인돌을 보는 기준을 마련하고 그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 돌이 고인돌로 추정된다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남이 뭐라 카더라 보다 남이 뭐라 카던데 당신의 생각은 어떤데?라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 11.06.07 22:48

    위의 긴 글은 김선생님께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고고학에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삼국시대, 통일기 등등의 시대구분을 하는데 그 시기구분의 기준은 무엇인지? 무엇을 갖고 그렇게 시기구분을 하는지 참 궁금합니다. 저 역시 민속이 무엇인지? 민속학은 어떻게 연구를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올바른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행하게도 민속학을 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민속학을 하지 않았다면 김종우 선생님과의 인연도, 의성문화원과 의성향토사연구회 선생님들과의 인연도 이어지지 못했을 테니까요.

  • 11.06.07 22:51

    저도 기회가 되면 현장답사시 참석을 하고 싶습니다. 경남지역으로 답사를 오신다면 함안답사때보다 더 준비를 많이 해서 안내를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5월에 있은 함안답사시에는 함안군지 집필 등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먼길을 달려와주신 선생님들이 너무나 고맙고 반가왔습니다. 덕분에 또 새로운 인연을 이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음에도 또 인연을 잇고 싶습니다.

  • 11.06.08 09:13

    이 선생님 지적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효선리 고인돌은 재작년에 우리 회 박위호 선생님과 같이 가서 확인하였은데, 고인인돌의 위치가 변경된 것 같았으며 일부는 성혈도 보여 고인돌로 판정을 하였습니다. 박 선생님은 고인돌을 연구한 전문가로 판단 기준은 이 선생님이 지적한 대로 이며, 돌의 위치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위 사진에 있는 선돌도 길로 인해 위치가 변경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금성산 입구에 있는 큰 돌은 고인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장품이나 괸 돌을 확인하기 전에 섣불리 단정하기는 함들다고 하겠습니다. 어쩌든 의성에는 고인돌이 경북 어느 시군에 비해 많은 지역입니다.

  • 11.06.08 12:52

    대구대학교박물관에서 1988년 의성군 문화유적 정밀지표조사 보고서가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현황파악을 하는데는 참고할 좋은 책입니다. 제가 석사학위논문을 쓰면서 배운 것은 '내 생각이 틀릴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남이 쓴 글을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남이 쓴 글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그 만큼 연구와 공부를 해야 비판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 입니다. 남이 쓴 책에 대해 한 칼에 비판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만, 그 책을 쓰기위해 고생한 저자의 노력과 열정을 존중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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