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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맨의 우상'으로 군림하던 김우중회장이 몰락의 위기를 맞았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세계경영의 기치를 높이 내걸었던 김회장이 기업 경영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우 몰락에 음모는 없는가.
99 년 7월25일. “예기치 못한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맞아 대우그룹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많은 애로를 겪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초심으로 돌아가 무욕(無慾)의 자세로 혼신의 힘을 다해 대우그룹 경영을 조기에 정상화함으로써 국가경제에 미치는 부담을 없애고,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도록 제 모든 것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김우중회장 성명서)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라는 IMF 체제의 혹독한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내달리면서 “세계를 경영하겠다”던,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적잖은 희망과 위안을 주던 김회장의 야심찬 드라마는 끝내 종영(終映)이 선언됐다. 지난 7월19일. 김우중회장으로부터 차세대 주자’로 촉망받던 정주호 대우구조조정본부장은 “김회장은 자동차 부문을 정상화시킨 뒤 대표이사 회장 등 경영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이 말은 ‘정상화 의지를 담은 최후의 배수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대우사태가 악화되면서 지금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하나같이 ‘퇴진’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런 분위기 조성에 큰 몫을 하고 있다. 대우는 비장의 카드로 추진해온 미국 GM(제너럴 모터스)과의 자동차 사업 합작프로젝트가 98년 9월 돌연 연기되면서 구조조정 타이밍을 놓쳤다. 대우가 구조조정에 나선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2월부터. 그러나 대우에 대한 불신과 끊이지 않는 악성 소문은 대우의 몰락을 재촉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지난 6월말 금융시장에서 6조원의 대출금이 연장되지 않고 회수된 일이었다.
대우사태는 68조2천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부채 규모(대우 발표), 국내 2위권의 거대기업으로 부도가 날 경우 다시 한번 국가위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심각한 경고와 함께 해결방안이 다각도로 모색됐다. 청와대와 정치권, 금융당국이 나서서 가능한 한 조용하게 이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구조조정에 대한 대우의 버티기와 채권단의 비협조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대우는 결국 손을 들었다. 채권단의 지원을 받는 대신 1조2000억원 규모의 김우중회장 재산과 10조원이 넘는 계열사 자산을 담보로 제공하는 데 동의한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와 (주)대우 중심의 전문그룹’으로 재편하기 위해 다른 계열사의 매각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대우사태 해결을 위한 숨가쁜 협상과 공방속에서 대우증권, 건설 등 알짜 기업에 대한 대우의 ‘마지막 미련’도 정부와 채권단의 몰아치기와 한계를 보인 스스로의 능력에 따라 포기했다. 8월10일께부터 시작된 채권단과 대우의 공방은 금융시장을 불안케 하고 해외의 부정적 평가를 초래했다. 결국 채권단은 8월 중순 대우그룹을 ‘자동차 중심의 6개 계열사’로 탈바꿈시키기로 결정했다. 대우가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끝낼 경우 대우의 계열기업은 대우자동차(자동차 생산), 대우자동차판매 (자동차 국내 판매), 대우캐피탈(자동차 할부금융), 대우통신(자동차 부품), (주)대우 무역부문(자동차 해외 판매), 대우중공업 기계부문(경차생산)만 남게 된다.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그룹 총수에 오른 김우중회장의 성장신화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인가. 김회장은 ‘정상화 뒤 퇴진’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정상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물론 자동차가 있으나 이 역시 칼자루는 투자를 결정할 미국 GM이 쥐고 있다. 대우 자동차가 정상화한다 해도 김회장 자신이나 대우 사람들이 바라는 경영자로서 ‘마지막 열정’을 꽃피우거나 ‘재기의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은 현재로선 희박하다. 정부와 채권단은 “김회장의 진퇴여부는 시장이 결정할 것”이라면서도 ‘실패한 경영자’의 퇴진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를 맞은 지금 김회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창업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쉰 적이 없다. 일요일은 물론이고, 결혼해서도 신혼여행이라고 가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오후에 올라왔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날이 유일하게 쉰 날이었다”며 “일속에서 찾는 즐거움은 골프의 홀인원보다 크다”는 일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후회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성공한 사람, 성공한 기업의 공통된 특징은 열정이다. 기업이 국제경쟁을 헤쳐나갈 수 있는 무기는 생산성과 품질밖에 없다. 일에 대한 열정 없이 이것을 확보할 수 없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앞을 내다볼 수 있고,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를 활용할 수 있다. 그런 사람, 그런 조직만이 항상 꿈을 가질 수 있다”는 남다른 열정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가 처한 현실은 안타깝다. 그는 몰락한 다른 그룹 총수들과는 아주 다른 점이 있다. ‘그룹총수가 아니라 경영자’로 평가받고 싶다고 말하던 그의 경영자세와, 일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열정, 남다른 행보로 ‘압축성장’의 신화를 만들어온 그의 30년 경영인생은 저무는 한세기와 함께 하나의 전설로 남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대우가 탄생한 것은 67년이다. 한성실업이란 섬유업체에 입사해 일하던 김회장은 이 회사의 하청기업인 ‘대도섬유’ 사장과 합작해 독립을 꿈꾸게 된다. 그해 3월22일 ‘대도’의 ‘대’자와 ‘김우중’의 ‘우’자를 따 ‘대우실업주식회사’가 탄생하게 된다.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5명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잇단 인수합병으로 ‘신화 만들기’에 주역으로 등장한다. 무역만 하던 김우중은 68년 6월 부산 동래에 봉제공장을 세워 그해 10월 가동에 들어갔고, 이듬해에 한양섬유, 고한실업, 세창직물 등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인수합병을 통한 고속성장이란 대우 역사의 서막을 연다. 창업 이래 수출 전문기업으로 출발한 대우는 72년, 수출 실적 2위를 기록하는 등 고속성장했다. 무역으로 돈을 번 그는 70년대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과 맞물려 건설, 조선, 기계, 금융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기 시작했다. 73년에는 한국투자, 동양증권(현 대우증권), 동양투자금융 등 비제조분야의 계열사를 확보했다. 무역업에 이어 금융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사업에 대한 ‘김우중방식’을 잘 보여준다. 김회장은 수출을 하면서 다양한 금융기법을 배우게 됐고, 이것은 후에 ‘런던스쿨’(런던지사) 출신 금융담당자들이 고속 성장을 하고 대우가 세계경영의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74년 들어 대우는 건설, 전자, 기계, 금융 등 고른 사업구조를 갖춘 13개사로 확대되었고, 규모면에서도 국내 10위권의 회사로 성장했다. 자본금 5백만원으로 창립한 회사가 7년 만에 13개사를 거느린 그룹이 되는 ‘김우중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국내 기반을 갖춘 대우가 세계시장을 상대로 나선 것은 93년. 세계경영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4년. 세계경영은 절정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세계경영의 가시적 성과는 김회장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해외 거점은 세계경영 출발 당시 175개에서 94년 257개, 96년 430개, 97년 600개 등으로 급속히 늘어났다. “세계경영을 통해 해외산업기지 1000개 이상, 총매출액 1780억 달러(해외 매출 890억 달러), 총 고용인력 35만 명(해외 현지인력 25만 명) 이상을 달성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도 나왔다. 특히 해외공장의 고용인력이 국내 인력(10만명)을 넘어서면서 대우와 김회장은 세계적인 뉴스메이커로 등장했다. 김회장은 “5000년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수만명의 외국인, 특히 백인들을 고용한 적이 있느냐”며 그 의미를 강조했다. 당시 대우의 매출액은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의 12%에 육박하는 56조원으로 늘어났으며,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빠르게 성장한 기업’이 됐다.
대우의 역사는 ‘압축성장’으로 표현된다. 김회장의 성공은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는 ‘신화’였다. 물론 최근 대우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외줄 자전거 타기를 하는 서커스 단원이며, 그의 경영철학은 세계 경영이라는 이름의 도박”(배준호 한신대 교수)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지만 2년 전까지만 해도 ‘제2의 신화’를 의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세계경영’은 단순히 대우의 전략이라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으며, 이제 한국경제의 확실한 대안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애국적 차원에서 사명감을 갖고 추진되어야 하며, 국가 경쟁력과 수출증대, 고용확대를 위해 세계경영을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97년 새해 김회장은 최고경영자 회의에서 이렇게 외쳤다. “저렇게 늘리다 어떻게 수습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던 경쟁기업들조차 ‘대우가 2005년 국내 최대의 그룹이 될 것’이라는 유력 종합지의 기사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정도다. IMF 한파 속에서도 감량이나 구조조정과는 거리가 먼 대우는 주요 그룹 회장들에게 경이를 넘어 경악의 대상이었다. 97년 3월22일. 대우 창업 30주년 기념일은 축제 분위기였다. 김우중회장은 “대우의 30년은 농밀(濃密)한 시간의 축적이었다”고 자신의 30년 경영인생을 정의했다. 그는 또 “대우의 역사는 신화도 환상도 아닌 창조 도전 희생의 대우정신이 땀으로 교직된 정합이었다”고 말했다. 2년이 지난 99년. 대우는 너무 달라졌다. 김회장에게 쏠리던 찬사와 경이로운 눈길, 신화의 주역에 대한 젊은이들의 존경은 돌변했다. “그의 눈에는 보통 사람들에겐 문젯거리 밖에 안돼 보이는 낡은 공장들이 노다지로 보인다. 무너지는 회사도 그의 손을 거치면 되살아난다. 그는 마이더스의 손을 갖고 있다”던 언론의 평가는 “그는 수년간 국제정세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로 바뀌었다. 지난 30년간 ‘1분을 하루처럼 쓰고, 1시간을 1년처럼 쓰면서’ 고속성장을 해온 무대에서 김회장은 쓸쓸하게 퇴진해야 할 기로에 섰다. 김회장과 대우가 처한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사람들이 난감해 하고 있다. 우리 경제사에서 전설처럼 회자돼온 ‘김우중 신화’가 끝나는 것이냐는 물음 앞에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김회장과 대우의 위기는 다른 재벌그룹이나 총수들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우선 김회장은 창업자다. 30대 재벌그룹 가운데 창업자가 활동하는 곳은 한손에 꼽을 정도다. 김회장은 30대 그룹 가운데 ‘가장 뒤늦게 창업해 가장 고속으로 성장한 기업인’이다. 벤처기업들의 성공스토리가 늘어나는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다. 그는 부의 세습이란 우리나라 재벌의 관행을 거부하고 있다. “자식에게는 단 한푼도 주지 않겠다”는 경영관을 여러차례 밝혔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 이것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정 명예회장은 2세들에게 경영권과 재산을 물려주고 있다. 김회장은 또 ‘은둔의 황제’로 불리는 이건희 삼성 회장과도 딴판이다. 그는 경영의 전면에 나서서 일을 처리했다. 군림이 아니라 근로자들과 함께 하는 경영인상을 보여왔다. 대우조선 회생을 위한 현장경영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87년 이후 만성적인 노사분규로 대우 옥포조선은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노사문제를 반드시 해결해 보자는 꿈을 갖게 됐으니까.” 김회장은 근로자들의 냉담한 반응속에서도 “한번 해보자. 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능력의 120%를 발휘할 수 있다. 해보지도 않고 왜 안된다고만 하느냐”며 설득했다. ‘회생불가’의 빨간 딱지가 붙었던 대우조선은 서서히 되살아났다. 세계를 무대로 구축된 그의 인맥은 국가 경제를 위해서도 상당히 소중한 자신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각국 대통령, 총리 등 국가원수를 가장 많이 아는 경영인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그의 경영철학은 세계를 향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복음서로 통했다. “그를 ‘실패한 경영자’에 포함시켜 퇴진으로 몰아가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 될 수 있다”는 재계 원로들의 지적은 그가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IMF 사태 이후 재벌들이 무너진 이유중에는 부동산에 현금이 묻히거나, 총수의 지나친 욕심, 비도덕성 등 오너문제가 많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대우의 그룹해체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 ‘김우중 회장은 어디로 가는가’.
미국의 저명한 기업 분석가 대니 밀러는 많은 기업들의 성공과 몰락을 지켜본 뒤 저서 ‘이카루스 패러독스’에서 기업 흥망의 이유를 ‘이카루스의 역설’로 표현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를 간단히 살펴보자. ‘이카루스는 그의 아버지(다이달로스)가 만들어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았다. 높은 곳을 날아 다니는 날이 늘어나면서 그는 점점 오만해졌다. 끝내 태양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태양에 너무 접근하자 밀랍으로 만든 그의 날개가 녹아내렸고, 이카루스의 오만은 에게해에 떨어진 그의 몸뚱이와 함께 사라졌다.’ 대니 밀러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 어느날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이것을 ‘이카루스의 역설’이라고 표현했다. 한 기업을 성장시킨 결정적인 요인이 어느날 그 기업을 몰락으로 몰아넣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성공 자체가 실패로 이끄는 요인이 될 수 있다”며 흥망의 요인으로 네 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장인 기업이 수선공 기업’으로, ‘건설가 기업이 제국주의자 기업’으로, ‘개척자 기업이 도피주의자 기업’으로, ‘판매인 기업이 표류자 기업’으로 변질될 때 위기를 겪고, 최악의 경우 망하게 된다고 그는 분석했다. 대우의 성장과 위기과정을 지켜보면 ‘건설가 기업’의 전형을 떠올리게 된다. 건설가형은 ‘기존 조직을 잘 경영하기보다 강력하고 다각화된 복합기업으로 건설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는 기업’이다. 이런 유형의 가장 큰 강점은 ‘경영자의 기업가적 능력’이라는 게 대니 밀러의 지적이다. “사업기회의 포착과 이용에서 어느 경쟁사보다 신속하고도 훌륭하다. 이런 기업에는 언제나 상상력이 풍부한 경영자들과 명석한 재무 스태프가 있어서 고속성장 확보에 필요한 거래와 자원의 조달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본 조달에서는 흥행사적 능력을, 기회의 포착에서는 선견지명을, 그 기회를 활용하기 위한 조직화 작업에서는 지치지 않는 정력을 보여준다. 예상되는 리스크를 감수함으로써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는 재주도 갖고 있다.” 대우의 과거와 현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다. 건설가 기업 조직의 특성에서 대우의 오늘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이다. “건설가 기업의 조직은 한마디로 ‘정력과 야망’이다. 이들은 탁월성을 원하며, 놀라운 성공이며, 자신들이 가는 곳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를 원한다. 최종목표를 향해 자기 자신에게든 부하에게든 광신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게으른 굼벵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건설가 기업의 문화는 무임승차를 용서하지 않는다. 건설가 기업은 일벌레를 만들어 낸다. 집권화된 정책결정과 분권화된 운영체계를 유지하는 것도 건설가 기업의 특징이다. 이런 기업은 분권 구조로 돼 있어 재무적 성과를 지향하며 적극적으로 창의성을 발휘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조직이 빠질 위험은 무엇일까. ‘모험가적 제국주의 기업’이다. 괄목할 만한 성공이 탐욕과 자만심을 불러오면 추진력 있던 경영자들이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무차별적인 확장과 다각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의 관리구조에 과부하가 발생하며 운영과정에 다양한 문제가 생긴다. 재무에만 치중하다 보니 제품과 시장 문제는 무시하고 최종이익만을 추구하게 돼 관리의 혼돈에 빠진다. 결국 통제 시스템이 자꾸 늘어나고, 이곳 저곳에서 문제가 생겨 몰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김회장은 자신의 조직이 갖고 있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성장의 단서를 “본질에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시간과의 싸움에서 남을 이길 수 있는)” 인수합병에서 찾았지만 인수합병은 그게 어떤 형태든 위기다. 이질적인 문화를 해결하기 위해 김회장은 ‘대우가족’을 강조했다. 또 인수합병 과정에 갑자기 커지는 조직이 갖는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대적인 ‘관리혁명’을 두 차례나 실시해 방만한 구조를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대우는 끝내 그룹 해체의 비운을 맞게 됐다. 그 이유를 김회장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김우중의 실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 재벌그룹들이 갖고 있는 과도한 차입경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우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자금문제다. 갑자기 돈줄이 막혔다. “우리돈도 좀 써달라는 유럽 은행들의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김우중회장)던 상황은 IMF 체제와 함께 눈녹듯이 사라졌다. 기발한 금융기법으로 다른 기업들을 놀라게 하던 ‘런던 스쿨’ 출신들도 막힌 돈줄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자금난이 초래된 배경을 찾다보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과도한 집중화다. 경영 측면에서 본다면 지나친 자신감과 확신에 따른 김회장의 독단이며, 업종으로 본다면 자동차다. 지역으로 본다면 동구권을 중심으로 한 후발개도국이다. 김회장은 집중화 전략을 차별화된, 그래서 국내외 경쟁자들의 심장을 겨눌 수 있는 ‘비장의 무기’로 보았다. 그러나 이 무기는 ‘비수’가 되어 자신의 심장에 꽂히고 말았다. 경영시스템에서 집중화의 문제는 ‘대우=김우중’이란 구도다. 대우는 전자, 자동차, 중공업, 건설, 무역 등에서 자율경영 체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필요할 경우 유기적으로 공조한다. 문제는 최종 결정권이 김회장 1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집중화는 한순간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다. 그의 선택, 판단, 결정은 곧 대우의 운명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특히 세계경영의 핵심으로 등장한 자동차 사업에서 김회장은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김회장은 아주 뛰어난 지도자며,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지도력을 믿고 따른다. 임원을 비롯해 18만 4000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나름대로 다양한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었지만 사실상 대우의 지휘구조는 단순했다. 김회장은 말한다. “내가 모든 결정을 내리니까요.” 다른 인접 국가들에게까지 사업을 개시하라는 지시를 임원들이 계속 거부하자 김회장은 말했다. “내가 시키는대로 해?”(‘뉴스위크’) 그렇다고 그의 잘못된 판단과 독선이 대우의 오늘을 초래한 근본적인 이유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동차에 미래를 걸고, 결국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로 몰아간 것을 더 큰 이유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자동차라는 세계적인 사업을 통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하려던 김회장의 야심은 지금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이와 관련,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미국 GM과의 애증관계다. 대우사태에서 GM을 빼놓을 수는 없다.
97년 말 닥친 IMF 체제는 국내 기업들에 더없는 위기였다. 그런데 대우는 다른 그룹과 달리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대해 언론과 재계 관계자들은 ‘김회장의 독선이 빚은 비극’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김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판단력이 갑자기 무력해졌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김회장은 새로운 환경에서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우의 위기사태가 표면화된 뒤 미국 경제주간지인 ‘비즈니스위크’는 김회장을 혹평했다. ‘김회장은 채무와 홍보 전략을 이용해 진정한 개혁을 회피하는 데는 노회한 프로다. 그의 차입경영 철학을 폐물로 만든 국제경제의 변화에 수십년간 적응하지 못해왔으며, 이제 와서 적응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럴까. 김회장은 정말 국제경제의 변화를 몰랐을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경영철학은, 얼핏 보면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계산된 도전’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그가 행동하는 강도는 그의 깊은 사고와 비례한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그럼 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해 오늘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됐을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성격이다. 김회장은 본질적, 체질적으로 낙관주의자다. ‘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 꿈은 환경을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꿈이 있는 사람, 꿈을 키우는 사회, 꿈을 공유하는 민족은 세계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며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외치는 사람이다. 그가 경영자로서, 인간으로서 주목을 받은 것은 이것을 실천하고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혹시 낙관론이 그의 판단을 흐리게 했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국제정세 변화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매년 설이면 일본의 자동차회사 도요타를 방문했다. 자동차에 미래를 건 뒤에 행한 연례행사였다. ‘세계 최고의 경쟁력’으로 시장을 이끄는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하나라도 더 배우며, 경영자로서 그들의 위대함에 대해 존경을 표하고 자신의 목표를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유럽 지역에 그의 경제교사가 많으며 그들로부터 입수하는 최신 정보는 그의 선택과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우 위기의 근본적인 이유는 ‘자동차의 비극’이다. 자동차를 세계경영의 전면에 내세우고 전세계에 거점을 구축하는 상황은 한마디로 ‘정지하면 쓰러지는 자전거’다. 달리기 시작하면서 탄력이 붙는 상황에 정지란 일시적 후퇴가 아니라 영원한 몰락이었던 것이다. 김회장은 이런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결별했던 GM을 찾아 전략적 제휴를 통한 재결합을 시도했던 것이다. IMF 체제 직후인 98년 2월부터 GM과의 협상이 추진됐다. 김태구 구조조정본부장이 추진한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9월 갑자기 연기됐다. 대우의 위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보아야 한다. 김회장의 판단 실수는 바로 이 대목이다. 자동차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 믿었다는 것. (주)대우 장병주 사장은 임직원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모든 것을 자동차로 풀려고 했고, 이것이 성사되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김회장 스스로도 이를 인정한다. 여기서 대우와 GM의 뿌리깊은 애증관계를 살피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신진자동차는 일본 도요타와 합작관계가 깨진 뒤 72년 미국 GM의 자본을 유치했다. GM코리아가 출범한 것이다. 그러나 신진과 GM은 갈등을 계속했다. 이로 인해 경영난이 심화됐다. 바로 이때 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몇 차례 부실기업을 인수해 정상화 시키는 수완을 보인 김회장에게 GM코리아 인수를 요청했다. 83년 김회장은 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회사 이름을 ‘대우자동차’로 바꾸었다. GM과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양사 관계는 원만치 못했다. 만성적인 노사분규와 현대·기아자동차 등 경쟁사의 도약으로 경영난이 심해지고, 경차인 티코 생산, 대우의 독자모델 개발 계획 등에 이견을 보이면서 9년에 걸친 양측의 동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92년 10월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합의했다. 양사의 결별은 대우가 큰 변화의 물줄기를 잡는 계기가 됐다. 이는 그 이듬해 김회장이 ‘세계경영’을 선포하고, 그 전면에 자동차를 배치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3개 차종 동시개발’이라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모험이 시작됐다. 김회장은 “자동차가 진출하면 다른 제품은 그 뒤만 따르면 된다”는 신념으로 동구권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자동차 세계경영에 미래를 걸었다.
자동차를 전면에 포진시킨 김회장의 전략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이런 가운데 폴란드에서 대우와 GM의 갈등이 다시 시작된다. 폴란드 최대의 자동차 공장인 FSO 인수전에서 대우와 GM이 경쟁을 한 것. 당시 GM은 FSO 공장 내에 조립라인을 운영하면서 인수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종업원의 3분의 1만 고용하겠다”는 GM의 제안을 FSO 경영진과 노조가 반대하면서 협상이 난항을 겪었다. 김회장은 폴란드 지사로부터 이 정보를 입수한 뒤 직접 현장으로 날아가 실사를 했다. 그리고 획기적인 제안을 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FSO의 협상대표를 만난 김회장은 “단 한 명도 해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13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이 그룹의 인수에 성공했고 GM은 한때의 동업자에게 일격을 당했다. 이 ‘놀라운 뉴스’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세계 최대업체’(대우가 유럽에서 펼친 광고캠페인)인 대우와 김우중회장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인도, 체코, 영국 등지에서 부품 및 완성차 업체의 인수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김회장에게 인수자금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럽 은행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인수지분도 50%를 넘지 않으면서 최대주주가 되는 방식으로 위험을 분산시켰다. 동구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동양의 기업인이었던 그는 ‘코리아 스모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의 용’이란 뜻이다. 그의 행보에 대해 유럽에서는 “징기스칸 이래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유럽을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IMF 한파가 몰아닥쳤다. 대우는 위기극복 방안으로 98년 2월 GM과 제휴에 나섰다. 그러나 경영권 등 ‘무리한 요구’로 난항을 겪다가 그해 9월 ‘없던 일’이 돼버렸다. 그리고 지난 8월6일. 김태구 사장과 앨런 패리튼 GM코리아 사장은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전략적 제휴 협상을 다시 시작하기로 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대우자동차는 지분 60% 가량을 GM에 넘기기로 했다. 대우가 믿다 발등을 찍힌 GM은 이제 대우의 수호천사로 탈바꿈했다. GM은 철저하게 자기들의 계산대로 대우와의 관계를 끌어왔고, 끌고 간다. 대우는 GM과 결별하면서 ‘독립’을 외쳤지만 끝내 그 손아귀에 잡히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대우를 둘러싸고 제기된 음모론의 한쪽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무너지는 기업에서 한결같이 제기되는 것이 음모론이지만 대개의 경우 그 실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대우도 마찬가지다. 다른 기업과 차이가 있다면 대우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기업들의 음모에도 말려들었다는 정도다. 국내에서 지목되는 상대는 삼성이다. 대우가 채권단에 모든 것을 넘기기 전 열린 사장단회의에서는 “재기해서 10년 뒤에 삼성을 쳐부수자”는 말도 나왔다고 한다. 그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지난해 말 삼성이 대우에 빌려주었던 8800억원을 긴급히 회수했고, 이것이 자금시장에서 대우의 돈줄이 막히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삼성자동차의 빅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 갑자기 삼성이 자동차에 대한 법정관리를 신청, 대우를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시각이다. 해외 음모론의 핵심은 한국식 경영에 대한 견제라는 시각이다. 대우의 세계경영 전략에 선진국 업체들이 두려움을 넘어 공포를 느꼈고, 이것이 견제로 이어졌다는 것. 이들의 두려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대우가 펼치는 공세에 마땅한 대응책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책이 없는 두려움은 공포를 가중시킨다. 그들이 당혹해 하는 것은 대우의 공세가 ‘경영교과서에 없기 때문’. 한 업체가 해외 기업을 인수하는 전략이 성공을 거두려면 기술, 자본 등 기본적인 경영조건이 비교우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대우는 이를 무시했다. 기술은 기본적인 것만으로도 세계 시장의 80% 이상을 커버할 수 있으며, 자본은 얼마든지 현지에서 조달할 방안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세계경영은 지극히 한국적이다. 경영의 무대가 세계니까 ‘한국을 벗어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문화, 의식, 관리, 고용 등에서 현지실정에 맞춰 궁극적으로 무국적화를 추진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대우식 경영은 구조에 관한 한 한국적이다. 자동차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를 전자, 중공업, 기계, 금융, 통신, 부품 등이 따르면서 현지에서 또하나의 ‘그룹체제’를 이룬다는 것이 세계경영의 한 축이다. 실제로 대우는 우즈베키스탄, 중국, 폴란드, 베트남 등 전략국가에서 이를 추진했다. 하나가 잘못돼도 잘되는 다른 것이 보완을 하면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런 방식으로 성과를 거두자 소위 ‘선단식 경영’이 도리어 해외진출에서는 유리하며, 특히 선진업체들이 대응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대우의 세계경영은 IMF 체제를 돌파할 수 있는 방법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글로벌스탠더드(미국식 경영체제)에서 보면 대우의 세계경영은 이단이다. 대우는 우리나라 최고경영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미국 GE의 젝 웰치 회장에 대해 ‘그가 진정한 경영의 영웅인가’하고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젝 웰치 회장은 경영자로서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40만명의 종업원을 20만명으로 줄이고 달성한 경영정상화를 그렇게 높게만 평가할 수 있는가.” 대우가 감량경영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시각이다. 또 대우는 조직개편, 능력급제 등 미국식 경영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모두 미국식에 동조하는 상황에 불거진 대우의 돌출행동이 국내외에서 경계의 대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에 따른 ‘국제적 음모’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김회장이 ‘2000년 연산 200만대로 세계 10위 생산업체’를 꿈꾸며 선택한 자동차는 본질적으로 세계적이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강국과 정면대결을 해 경쟁력을 확보하거나 그들의 하청업체를 선택해야 하는 업종이다. 자동차는 국제적이다. 그래서 경쟁이 심하고, 견제가 강력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김회장의 자동차 집중화 전략이 선발업체들을 너무 자극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다.
자동차는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자존심으로 통한다. 100여년 동안 자동차는 ‘그들만의 세계’였다. 지구상에 수많은 나라가 있지만 독자모델의 자동차를 갖고 있는 나라는 두 손으로 꼽을 정도다. 가장 최근에 이 틀을 깬 나라가 한국이다. 그 선두에 선 현대는 완성차 수출 위주의 전략을 택했다. 그러나 김회장의 자동차 세계화 전략은 전세계 어느 기업도 시도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현재 세계적 기업들의 해외공장은 현지로 부품을 보내 조립하는 형태(KD 공장)나, 현지의 부품을 다수 채용해 현지화한 공장이다. 그런데 대우는 현지공장을 인수한 뒤 설비를 보완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현지 최대 업체로 부상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궁극적으로 각 공장(생산기지), 유럽의 연구소, 한국의 연구 및 생산기지를 연결시켜 부품과 기술의 상호공유를 통한 글로벌체제를 갖춘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김회장의 특이한 구상은 주목을 끌었고, 경계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지금까지 김우중회장과 대우가 이뤄놓은 것은 자동차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최근에야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나라(동구권)에서 먼저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과연 경험이 많은 사람들(미국 유럽 등)보다 생각을 잘 한 것일까. 아니면 너무 빨리, 지나치게 욕심을 부린 것일까. 만약 김회장의 본능이 맞아들어 간다면 세계자동차업계에 대변혁이 예상된다.’(미국 ‘포춘’지) 선발업체들의 공세가 본격화됐다. 특히 ‘유럽의 안마당’인 동구권에서의 성공적인 시장 진입은 이 시장에 관심을 두고 있던 GM을 비롯해 이탈리아의 피아트, 독일의 벤츠와 BMW, 프랑스 르노와 같은 유럽 기업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견제가 시작됐다. 대우가 추진하던 유럽지역 기술보유 업체(엔지니어링)들의 인수전략에 브레이크가 걸리기 시작했고, 유럽지역 자동차 수출에 대한 규제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또 대우 공세의 근원인 한국시장에 대한 개방압력이 노골화됐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자동차 선진국들이 한국시장을 개방하라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은 대우가 자동차를 전면에 내세우고 유럽의 심장부와 안마당(동구권)을 본격적으로 공략한 시점과 일치한다. 96년 2월 하순.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사는 “대우와 94년 10월에 체결한 의향서가 파기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95년 대우는 슈타이어의 대주주인 오스트리아신용은행과 이 회사의 자동차관련 4개 사업부문의 지분 65%를 인수한다는 내용에 합의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계약이 깨졌다는 것. 그 배경은 ‘선진업체들의 견제’ 때문으로 확인됐다. 당초 양측은 엔지니어링 부문에서 일하는 200여명의 인력을 모두 대우측에 넘기기로 했다. 그러나 슈타이어측은 “최근 유럽 자동차 업체들로부터 대규모 용역을 받아 일손이 모자라기 때문에 기술인력의 일부밖에 넘겨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슈타이어의 태도 돌변은 벤츠 폴크스바겐 등 유럽업체들의 ‘교사’때문이라고 김회장은 주장했다. “한국산 자동차의 수입 억제를 재임중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96년 1월 유럽자동차 제조업자 단체 회장 취임사), “한국 시장은 아직도 폐쇄적이다. 납득할 만한 시장개방 조치가 없을 경우 한국산 자동차의 유럽진출을 봉쇄할 것이다”(96년 초 프랑스 푸조 이브 바르베 해외담당 사장), “미국측의 기대사항들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한국에 개방압력을 가하겠다. 한국시장의 개방압력과 내수를 초과하는 생산 규모는 곧 해외수출을 급격히 늘려야 한다는 것으로 우리는 이에 대한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96년 초 미국자동차협회 카 회장) 등 해외에서는 대우자동차를 견제하는 발언들이 잇따라 터져나왔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우의 공세에 현대의 위기의식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특히 97년 내수시장에서 대우가 현대와 선두를 다투는 양상이 벌어졌는데 이는 대우에 대한 현대의 전략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는 계기가 됐다. 대우는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등 소위 ‘신차 3형제’를 통해 ‘승용 내수 정상’을 호언했다. 당시 김회장은 “자동차에 관련된 사람들은 부인도 친구도 버리고 일하자”고 외쳤고, 이 말은 현대와 기아의 최고경영자 회의석상에 그대로 보고됐다. 대우의 공격에 현대는 신차전략으로 맞섰다. 주력모델의 새 모델을 잇따라 출시, 대우의 ‘신차 3형제’를 구형으로 몰고 갔다. 현대의 기아차 인수는 대우에 결정타가 됐다. 현대는 기아를 통해 대우의 취약 분야인 RV(레저카)를 집중적으로 쏟아내면서 대우를 코너로 몰았다. 결국 대우는 내수시장에서 96년 따라잡은 기아에 다시 2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독자적으로 보유한 토착기술이나 첨단기술의 부족도 대우의 몰락을 가져온 이유로 볼 수 있다. 대우는 인수합병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공사(현 대우중공업 조선부문)를 인수한 뒤 (선진국들이) 기술을 주지 않아서” 큰 어려움을 겪던 김회장은 영국의 엔지니어링 업체를 인수해 조선산업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 김회장은 기술은 세계에 널려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국내외 기업의 인수에 나선 계기였다. 국내외에 연산 200만대의 생산체제를 갖춰 세계 10대 자동차메이커에 진입하고, 3개 신차를 동시에 내놓은, 자동차 100년사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모험을 하면서 영국 IAD사를 인수한 것은 그의 이같은 경영관을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인수를 통한 기술문제 해결에 대해 내부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또 김회장 스스로도 자동차를 개발하면서 독자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이와 함께 ‘탱크주의’가 잘 보여주듯 기술 부족에 따른 소비자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기술은 필요했다. 이것이 ‘기술의 대우’를 강조하고 대대적인 기술혁신에 나선 배경이다. 하지만 대우는 98년 말부터 시간을 다투며 진행된 구조조정에서 외국기업들이 탐낼 만한 독자적인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또한 세계경영의 표적으로 삼았던 동구권 자동차 시장이 기대치에 못미친 것도 대우에는 큰 부담이었다.
동구에 진출할 당시 김회장은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뒤 ‘자동차 회사 매물’이 많고, 운행차량 대부분이 5년에서 10년이나 돼 대체기에 돌입했으며, 저임에 고기능의 풍부한 인력도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게다가 ‘서유럽의 앞마당(동유럽)’에 거점을 마련하는 것은 언젠가 유럽이 내놓을 국산차에 대한 쿼터제한(수입물량제한)에 대한 대응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유럽 자동차 시장은 김회장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폴란드 공장 외에는 목표에 모두 미달했고, 매년 판매량이 20∼30%씩 감소했다. ‘현지에서 돈을 벌어 투자를 한다’는 세계경영의 기본적인 자금 동원 구상에 차질이 빚어졌고, 이것이 단기 자금의 과도한 차입으로 이어졌다. 이제 대우는 자동차 중심의 소그룹, 전문기업으로 재탄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미국 GM과의 자동차 지분매각 협상을 비롯해 매각 대상으로 잡은 대우증권, (주)대우 건설부문의 향방 등 대우의 운명을 가름할 변수는 있다. 매각시기도 연내로 제한한 채권단과 조금이라도 더 받기위한 대우의 연기요청으로 진통이 예상된다. 또하나의 큰 관심사인 김우중회장의 거취 문제는 이같은 변수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냐에 달려 있다. GM과 매각협상이 원만하게 이루어져 60억달러 이상의 자금이 도입된다면 김우중회장은 ‘실패한 경영자의 퇴진론’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의 거취가 어떻게 결정되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후발기업이 선발기업들의 성장패턴을 답습하면 절대 이길 수 없다”며 남다름을 추구하던 그의 경영전략, “나는 새벽 1시까지 일할 때가 많다. 남처럼 일해서 어떻게 일본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열변을 토하던 그의 열정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신화의 주인공’에서 ‘검증되지 않은 모험의 희생자’로 달라진 김회장에 대한 평가, 그것은 우리 기업들이 맞은 현실이 여전히 냉혹하며 위기상황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