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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러가도
-고(故) 리영희 선생의 삶을 기리며
김인기
내게도 세상 보는 눈을 뜨게 해 주셨던 리영희 선생이 그예 별세하셨다. 고인의 영전에서 삼가 조의를 표한다. 그간 숱한 탄압을 받으셨고 또 오래 병고에 시달리셨으니, 선생도 이런 순간을 이미 예측하셨으리. 나도 선생의 여명이 그리 남지 않은 줄은 짐작했다. 그런데도 막상 일이 닥치니 무척이나 허전하다. 이 시대의 큰 선비가 우리들 곁을 떠났구나. 내가 뭐라 더 말을 하겠는가. 나와 같은 작자야 그저 글이라도 꼼꼼히 읽어서 언제라도 엉뚱한 소리나 하지 말아야지. 이게 고인의 뜻에도 부합하리라. 세인들은 선생을 두고 ‘사상의 은사’라고도 하고 ‘지식인의 표상’이라고도 하였다. 일단의 사람들은 선생한테 터무니없는 낙인도 찍었다. 그네들 평가대로라면 선생은 분명 ‘의식화의 주범 또는 원흉’이었다.
서기 1982년 봄이라면, 내가 겨우 성년의 문턱을 넘었을 적이다. 어느 선배가 내게 선생의 저서를 소개했다. 선배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권했는데, 그만 뭐가 어긋나서, 나는 그때 『우상과 이성』을 손에 들었다. 혹자는 선생의 저서를 한 권만 읽고도 크게 변했다고 하는데, 그건 지능이나 감성이 뛰어난 이들이나 그랬던 것이고, 처음 그 책을 읽었을 적에 나는 다만 이 사회가 다소 괴이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이른바 친한파(親韓派)라고 하는 것들이 문제였다. 이들이 과거 식민지 지배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일본인들이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도리어 과거사를 왜곡하며 끊임없이 망언이나 해대는 무리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 나라 집권자들은 내내 이들과 그렇게나 친하다니! 그리고 이게 새삼스럽지도 않다니!
지난 시절 이 나라의 친일파(親日派)라고 하는 것들이 과연 어떤 작자들이었나? 이들이 일본인들과 공기놀이나 제기차기 등을 하면서 서로서로 우의를 다졌다고 누가 그러나? 그게 그런 것이라면, 누가 뭐라나. 이들은 외세에 빌붙어 동족을 짓밟았다. 그 앞잡이가 되어 더러는 총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동족의 재산을 강탈하고 부녀자들을 능욕했다. 이런 자들을 은근히 사주하고 두둔하는 자들도 있었다. 지식인이라 하는 것들이 식민지 청년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심지어는 자기가 가르치던 아이들을 꾀어 정신대에 보낸 여편네도 있었다. 그러면 이들이 일제가 물러난 이후로 이 땅에서 다 사라졌는가? 이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제는 이들이 새로운 주인에 붙어서 겨레의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며 온갖 짓들을 해댄다.
오래도록 나는 사용을 기피하는 말이 있다. 이건 생각이 있는 이들이라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바이기도 하다. 바로 ‘아무튼’이나 ‘어쨌거나’와 같은 어휘들이다. 이건 논리 자체를 망가뜨린다. “아무개가 패륜아든 야바위꾼이든 거기에 무슨 정통성이나 효율성이야 있거나 없거나 ‘아무튼’ 그 지위가 너보다 높으니까 ‘어쨌거나’ 너는 복종해라.” 이게 망발이다. 나는 ‘현실’이나 ‘실용’이란 말도 경계한다. 마치 고질병처럼 그 ‘현실’과 ‘실용’의 정체를 따져보고자 한다. 당장 그 내용이 일정하지가 않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이른바 대세(大勢)라는 게 기회주의자들한테는 편승해야 할 ‘현실’이고 이에 따르는 이득이 ‘실용’이지만 원칙주의자들한테는 그게 꼭 그렇지도 않다. 이들은 그 대세를 의심하고 도전한다. 이게 이들의 ‘현실’이고 ‘실용’이다.
나도 한때 인간들의 만행에 진저리를 냈다. 어떻게 군인들이 총칼로 무고한 시민들을 그렇게 학살하나. 더군다나 그 수괴가 대통령이라니. 이건 용납할 수 없는 불의였다. 나를 절망하게 했던 것들이 또 있었다. 바로 먹물들이 보인 추태였다. 학자니 언론인이니 법조인이니 문인이니 종교인이니 하는 자들이 권력에 야합했다. 어쩌면 그들이 그렇게나 ‘현실’과 ‘실용’에 밝았을까? ‘그럼, 사람은 모름지기 대세를 따라야지!’ 그러면 이들이 타락한 극소수 인사들이었나? 이게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은 청년들한테도 귀감이 되었어야 할 이들이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본색을 끝끝내 숨길 수 없어서, 그 행태가 그렇게나 개차반이었다. 예전에도 나는 사람들이 다 인격자들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쩌다 수괴가 시시한 농담 한 마디 던져도 아첨꾼들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현란한 솜씨를 뽐냈다. 이 와중에 상식과 원칙을 말하는 사람들은 어디론가 끌려갔다. 진실이 바로 불온으로 통하는 시대였다. 이 가운데에 선생이 있었다. 나는 이게 궁금하다. 그것도 영달이라고 알랑방귀나 뀌었던 것들이나 그 후예들이 요즘은 또 어떻게 변신했나? 그 작자가 ‘년’이었는지 ‘놈’이었는지도 이제는 내게 아득하기만 한 문인도 있었는데, 이 인간이 한때 그 무리에 끼어 외국으로 나들이도 가며 온갖 방정을 다 떨던데, 이제는 이 나라 문인들도 이런 꼬락서니에서는 벗어났을까? 나도 선생의 소원대로 선생의 저서들이 이 사회에 더는 필요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날이 언제쯤 오려나.
내가 멀리서나마 선생을 직접 본 게 1989년 2월 25일이었다. 이날에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한겨레신문> 제1회 주주총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 신문의 탄생이 별스러워서 주주들 대다수도 수익에 관심이 없었다. 당장 나부터가 도대체 주식이란 게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도 몰랐으니까. 또 사람들이 그런 걸 굳이 알 뜻도 없었다. 이들이야 신문답지 않는 신문만 있는 이 사회에 신문다운 신문이 있기를 바랐지. 그러니 이 총회에도 수리를 따지는 실무가 아니라 희망에 부푼 감성이 그득했다. 이런 들뜬 분위기에서 진행자가 선생을 참석자들한테 소개하니, 선생은 뭔가 머쓱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수줍게 인사했다. 그간의 험담대로라면 그 인상도 험악해야 할 텐데, 선생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 신문이 세상에 나오기 얼마 전에는 초대 사장을 맡았던 송건호 선생이 내가 다니던 학교로 와서 강연한 적이 있다. 어느 학생이 이렇게 질문했다. “새로 나오는 그 신문의 이념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송 선생이 이렇게 답변했다. “우리들한테는 그런 거 없습니다. 다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할 뿐입니다.” 리영희 선생은 언론인으로서나 학자로서나 오로지 진실만 추구했다. 다른 게 없다. 다만 이 진실이 권력자들한테 불편했을 뿐이지.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데 좌파나 우파가 있는 게 아니다.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우리들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아직도 해괴망측한 선동에 놀아나나. 누구 말마따나 이들한테는 아예 생각 자체가 없는 게 아닐까? 나는 제발 이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국가(國家)를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여기나 보다. 딴은 사람들이 이걸 두고 저마다 달리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한테는 이미 이 공동체의 구성과 운영에 대한 합의가 헌법이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그런데 나는 국법질서를 거론하는 이들조차 이걸 우습게 여기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러면서 이 인간들이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귀신을 섬기듯이 국가를 들먹인다. 그래서 어떤 자들의 탈법이나 불법은 마침내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거듭났을까? 이들이 가증스럽게도 자신들의 치부나 가리자고 멀쩡한 사람들을 향해 ‘국가관이 의심스럽다.’고도 한다. 정작 자신들은 그런 국가관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사람들이 아주 단순한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는다.
이러니까 리영희 선생도 그 고생을 한 것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이 하루아침에 지성인들로 바뀔 수는 없을 테니까, 아마 앞으로도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의 삶은 고단할 것이다. 누군들 몸 편히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면 마음이 불편하다. 때로는 이게 범죄로도 보인다. 사실이 이런데, 그런 걸 탐닉하고서야, 나 어찌 배웠다 하겠는가? 이런 각성으로 사람들이 저마다 존엄을 지키고자 하니, 이게 결국 인정투쟁이 되는데, 이들이 급기야 제 목숨마저 버린다. 바닷물은 단지 3%의 염분만으로 자신의 부패를 막는다고 한다. 아마 이 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제 우리들 곁을 떠난 리영희 선생과 같은 분들이 이 사회에 그 비율만큼만 있었어도 우리들이 이렇게나 비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 그러면 이럴 게 아니라 이참에 우리들이 활달한 경지를 가늠해 보자. 한때 문익환 목사가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 간 적이 있다. 선생이 이 ‘밀입북’을 격려하는 글을 썼다가 나중에 어디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는데,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온 문 목사 또한 무사하지는 못했다. 언젠가 나는 문 목사가 이랬다고 들었다. “사람들이 그래. 내가 평양에서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 그게 바로 북한을 찬양․고무한 게 아니냐? 그래서 내가 이랬어. 그렇게 남쪽은 북쪽을 찬양․고무하고, 북쪽은 남쪽을 찬양․고무해야 통일이 빨리 되는 거야.” 그렇다면 이걸 요즘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게 곡물이든 광물이든 최선을 다해 남쪽과 북쪽이 서로서로 상대방에게 많이많이 퍼주자. 이래야 우리들이 번영한다.” 이게 망상이 아니다.
지난 2003년 10월 24일 저녁에 리영희 선생 초청 특별강연회가 대구교육대학교 101호관에서 열렸다. 이 행사를 대구작가회의에서 주관했는데, 선생은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반도>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나는 선생의 저서들을 이미 여덟 권 남짓 읽은 터라 강연 내용이 어렵다거나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선생의 몸이 예전 같지 않은 줄은 실감했다. 특히 북방한계선(NLL)의 진실을 거론하면서 관련서류를 든 손이 중풍 후유증으로 심하게 떨렸다. 과연 그게 휴전하면서 피아가 어떤 경계선으로 약정한 게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실상조차 도외시하고 요즘도 황당한 인간들이 도발이니 응징이니 하며 설전이나 벌인다. 저들은 누구인가? 이 나라의 군사주권도 행사하지 못하겠다고 나자빠진 인간들이다. 이들이 감히 전쟁을 입에 올린다.
하기야 인류사를 돌이켜보면 인간들의 어리석은 작태도 그리 드물지는 않았다. 이 가운데 하나가 아마 과거에 일본이 미국을 치기로 결정한 것일 게다. 뭐, 이 나라야 그 덕분에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났지만. 그러면 당시 일본의 수뇌부는 왜 그랬을까? 미국과 일본이 전면전에 돌입한다면, 그 승패는 일단 해전에서 난다. 항공기술이 발달한 요즘도 바다를 무시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당시로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자고로 꾼은 꾼을 알아보는 법이다. 그런 만큼 일본의 꾼들도 미국을 상대로 이기기 어렵다는 진실을 진작 알았다.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제독은 아예 자국의 패배를 단언했다는데, 그들은 왜 그랬을까? 이게 우리들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바이다.
다 알다시피 전쟁이 정치의 수단이라는 건 클라우제비츠의 금언이다. 이것도 핵전쟁이 되면 빛을 바래겠으나, 그래도 여전히 우리들은 이를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걸 누가 거꾸로 이해해서 ‘정치’를 ‘겉치레’나 ‘설거지’로 알고 덤비면 어떻게 되나? 이의 교훈도 이미 산을 이룰 정도로 많다.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의 『일본군사사(日本軍事史)』를 읽어보더라도 과거 일본군의 착오도 뿌리가 자못 깊었다. 전쟁 자체도 비극이거니와 패전은 더욱 끔찍하다. 그런 만큼 전쟁은 삼가야 하고, 무력은 평화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렇게나 엄중한 시국에 그 인물들이 체면 때문에 그 판단을 수상한테 일임한다고 했다니! 나는 이런 종류의 참화가 우리들과는 무관했으면 좋겠다.
리영희 선생은 길이길이 사표가 될 이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당신이야 그저 한 사람 몫은 다 했노라 겸손해 했으나, 내 눈에도 그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허위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진실을 찾아 헤맨 그 여정에 얼마나 많은 피땀을 쏟았을까? 그래서 그 특별강연에서도 그랬으리라. 선생은 군더더기를 싫어했다. 그 자리에 염무웅 선생도 있었는데, 염 선생으로서는 아마 친분도 친분이려니와 몸도 불편한 분이 멀리서 오셨으니 의당 그렇게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도 리영희 선생은 “염 선생, 괜히 그렇게 앉아서 졸지 말고 어디 가서 쉬어요, 쉬어! 나한테 염 선생이 새로 들을 만한 말도 없어요!” 했는데, 두 분 사이의 이런 배려가 아름답기도 했고 또 그 대화가 우습기도 했다.
이날 강연이 끝나자 방청객으로 온 어느 분이 선생한테 여권(女權)과 관련하여 질문을 던졌다. 내가 듣기로 그게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으므로, 선생이라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내용이었는데, 선생은 그 여성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나는 국제관계가 전문이고, 이 자리는 이걸 말하러 왔으므로, 그런 건 다른 데서 알아보시라.” 이런 분별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여기에서 바로 전문가와 돌팔이가 갈리지 않을까? 예전에 성인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게 참으로 아는 것’이라 하였는데, 선생은 ‘비록 뭘 안다고 하더라도 말하지 말아야 할 자리라면 굳이 말할 게 없다.’고 한 셈이다. 이러면서도 선생은 목숨을 걸고 우상에 맞선 이성으로 그렇게나 뜨겁게 진실을 사랑한 것이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 빈말이 아니었다면, 선생한테는 우환 없는 날이 없었으리. 선생은 그간 그렇게 지식인으로 헌신하다 질곡의 세월을 뒤로 하고 멀리멀리 가셨다. 선생이시여! 시절은 여전히 고약해도 사람들은 깨어났으니, 선생은 아무쪼록 이런 후인들을 믿으시라. 망월동 그 묘역에서 동지들과 어울리시다 문득 적적하시면 막걸리라도 한 잔 쭉 들이키시라. 여기 남은 아무개도 지금 이렇게 서툴게나마 펜을 들고 선생의 뜻을 받들고자 한다. 이 인간이 경황도 소질도 없어 선생의 업적과 인품을 오롯이 드러내지는 못한다. ‘함부로 그러다가는 그게 찬(讚)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누(累)가 될 거야.’ 이런 마음으로 나는 선생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던 그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지금 이렇게 선생의 삶을 기린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2010.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