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같은 구중궁궐, 종묘 정전(正殿)의 문짝은
일부러 아귀를 맞추지 않았다 한다.
모셔둔 위패의 혼령이 자유로이 드나들게 하기 위해서란다.
나뭇잎 하나가 흔들리면 다른 나뭇잎이 흔들리고
멧새가 울면 또 다람쥐가 쥐똥만 한 눈을 반짝이듯
서로가 드나드는 것은 애초에 우주의 일,
내가 어머니로부터 배운 말들과
내가 수많은 책들로 부터 배운 지식과
내가 이웃들로부터 배운 사회로, 나 아닌 나를 살며
나는 아귀가 꼭 맞는 문을 만들어 닫았던 것인데,
가령 이런 경우가 있긴 있다.
말해질 수 없는 슬픔으로 남몰래 눈물을 삼키며
마른 장작개비 같던 네가 어느 날
곱게 갈아 끓인 잣죽같이 저미고 감싸드는 경우
나는 스스로 문풍지 우는 문이 되고 싶었다.
너의 상처가 나를 드나들며 새로운 영토를 만나는
그런 목숨을 꿈꾸어 본 적이 있긴 있는 것이다.
나뭇잎 하나가 흔들리니 다른 나뭇잎은 안 흔들리고
뱀이 지나가자 멧새가 푸나무서리에서 튀듯
내가 애인들로부터 배운 질투와 증오와
내가 세상으로부터 배운 상처와 추억과
내가 삶으로부터 배운 권태와 환멸과 죽음만으로
문을 닫아걸고선 나의 고독을 우겨댔던 것인데,
추상 같은 호령도 꺾지 못한 사당의 혼령이란 것도
사실 버리고 갈 수 있으나 놔두고는 갈 수 없었던
사무치는 마음 아니겠는가,
그 마음 못 다하여
이 지상의 아귀가 맞지 않는 문으로
가끔씩은 사무쳐서 드나드는 그리움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나는 아귀가 꼭 맞는 문을 만들어 닫았던 것인데, 나는 아귀가 꼭 맞는 문을 만들어 닫았던 것인데, 자꾸 이 말을 되뇌이게 되네요. 내 삶도 돌아보게 되는 좋은 작품 잘 읽었어요!!
아귀가 꼭 맞는 문을 만들어 닫으며, 나 아닌 나를 산다는 말에 정말 공감합니다. 허술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말고, 자신의 참모습 대로 살고 싶은 때가 가끔 있지요!